신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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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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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주)천년의시작

출간일 2022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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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시인선 426.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정채원 시인의 신작 시집.

이번 시집에 대해 고봉준 평론가는, 시인이 삶과 죽음, 문명과 자연, 인간과 동물 같은 “대칭적 관계”의 모티프들을 통해 “상식의 경계를 돌파하는 대칭의 감각”을 보여주며, “상식적인 층위에서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이면서 둘 혹은 여럿’ ”인 “세계를 생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 같은 이항적인 감각과 관계 파악은 대립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물과 가치들의 공존에 대한 통찰인 동시에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는 것이다. 시집의 마지막에 배치된 「진화론 P」에서 짐작할 수 있듯 어쩌면 ‘괴물’은 우리 안에 늘 있어 왔는지도 모른다. 정채원 시인은 건기와 우기가 죽일 듯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상반되거나 어긋나는 의미들을 자신만의 탁월한 감각으로 조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얼핏 본 주황물고기”의 희망만으로도 지금-여기를 건너가게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이면서 둘, 여럿이면서 하나


정채원의 시는 이항적 관계의 반복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대칭’의 이미지라고 명명했다. 정채원의 시는 상식적인 층위에서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이면서 둘(혹은 여럿)’의 감각적 세계를 생산한다. 이것은 철학자 들뢰즈가 이접적 종합이라고 명명한 것과 유사하다. 이접적(離接的) 종합이란 상이한 의미가 병존하는 방식의 결합으로서 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함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논리가 아니라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라는 논리가 바로 이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를 다시 읽어보면, 여기에서 인간 존재가 ‘뇌=물질’과 ‘실존적․형이상학적 물음=비물질’의 결합체로 인식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라는 제목처럼 그것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관계도 아니다. 이러한 이접적 성격은 유한과 불멸,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시인은 복수의 시편들에서 생명의 유한성과 기억의 영속성을 상반되는 세계처럼 제시한다. 죽음과 유한성의 기호들을 제시하면서 “기억은 썩지 않아”(「불멸의 온도와 습도」)라고 말할 때는 특히 그렇다. 물질과 비물질의 공존, 썩는 신체와 썩지 않는 기억의 결합, 이것이 바로 정채원의 시에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술어들이다. 다만 시인은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르게 죽어 있으면서 / 푸르게 살아 있지”(「불멸의 온도와 습도」)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과 / 어디선가 막 도착한 사람들”(「하루에 두 번 씩은 춤을」)처럼 상반되는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정채원의 시 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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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에도,

악천후라서

시는 툭툭 피어났다”

 

ㅡ 「시인의 말」 中

 

 

 

 

 

  연금술사

 

 

 

  눈을 뜬 채 한잠 자고 나면

  읽던 책 몇 페이지가 금으로 변하는 날이 있었어

 

  그러나

  울다 잠든 다음 날 아침이면

  그 자리엔 표지가 구겨진 책 한 권이 놓여 있었지

 

  반쯤 타다 만 책을 끼고

  비 오는 거리를 걸어 다녔어

  죽음처럼 다정한 빗방울

 

  불타는 빗방울

  옷걸이처럼 목이 꺾어진 빗방울

 

  세상의 뒤통수가 두 개로 다섯 개로 보이는 날

  비에 젖은 책장을 넘기다 잠든 다음 날

  밤새 노랗게 불탄 머리카락이

  금실금실

  베개 위에서 기어 다녔지

  토스터에서 방금 튀어나온 따끈한 태양을 향해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

 

 

 

  두개골 속 1.5 킬로 고깃덩어리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사랑이란 게 있긴 있는가

  이런저런 것들을 캐묻는다

  자다가도 묻고 울다가도 묻고,

  이 세상에 보이는 건 모두 가짜 아닐까

  이 얼음 같은 사탕도 착각 아닐까

  물질이 자유의지를 갖고 물질을 와드득 깨물고

  물질과 비물질이 서로 밀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또한 누구의 희미한 기억 속일까

  무중력의 공간을 달려가는 그리움은

  백만 미터고 천만 미터고 거침없이 계속 달려간다

  잡을 수가 없다, 그대여 슬픔이여

  내 육신은 고작 백 미터도 도망치지 못하는데

  생각의 꼬리에 매달려 캄캄한 우주를 홀로 유영하는

  나는 누구의 꿈속에서

  그림자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일까

  에포케!*   

  다시 동굴로 들어가자

  뇌가 평생 갇혀 사는 그곳으로,

  살아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곳에서

  낡은 세포는 다 갈아치운 새 물질로

  내일은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될지도 모른다

 

 

  *에포케(epoché, epokhế, εποχη)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판단중지(判斷中止)를 뜻하는 말

 

 

 

 

 


  케미스트리

 

 

 

  자발적으로 두 개의 원소로 분해될 수 없는

  물처럼 두 사람은 흐른다

 

  무표정한 격막을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를 밀어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석의 같은 극이었을까

  너무 닮아 서로를 모욕하는 사이처럼

 

  외면한 채 마주보는 심장은

  서로에게 둥그런 피를 돌리지 못하고  

 

  남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도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보고야 마는 눈

  오후의 뇌 속에는 어떤 뾰족한 물질이 흘러나오는 것인지

 

  성공한 듯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화학 실험처럼

  끝내 수소와 산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물속에서

  한동안 전류가 저릿하게 흘러갔을 뿐

 

  숙성도 되기 전에 변질된 와인을 맛보며

  이 맛이 아닐 텐데

  이 향이 아닐 텐데

  코르크 마개 탓부터 하는 사람들

 

  화합하지 못한 이유와 결별하지 못한 이유는

  어떤 화학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번번이 같은 매듭에서 낯익은 벨이 울리고

  실패해야 하는 이유, 실패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함께 숨 쉬는 물속에서 명징한 기포가 발생하지 않고

  멜로디처럼 탄식처럼 전류가 헛되이 흐르다 멈추는 이유

 

  부서진 계단을 지나

  유리조각 박힌 꽃담을 지나

  물은 오늘도 흘러간다

 

 

 

 


  진화론 P

 

 

 

  직립보행을 시작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발굽이 있는 돌연변이들이 살아남아 후손을 이은 게 시인이 되었다. 단숨에 수천 년 전 풀밭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떠나간 애인의 가장 깊숙한 우물까지 숨어 들어가 보기도 하지만

 

  발굽을 숨긴 채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자들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며 손톱으로 긁은 벽화가 더러 발견되기도 한다. 불긋한 핏자국 같기도 한 그것.

 

  제 안에 키우는 동굴 속, 이따금 빗물이 스며드는 날이면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는 발굽소리 들린다. 뜻 모를 신음소리만 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詩)라는 신(神)을 만들어 냈다고도 하는

 

  꿈보다 수상한 해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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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ㅣ정채원

 

1996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일교차로 만든 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등이 있음. 〈한유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