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영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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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도서출판 서정시학 | 출간일 2021년 12월 31일
서정시학 시인선 186.
2015년 《서정시학》으로 등단한 이영란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이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의 삶의 국면들, 곧 어떤 일이 벌어진 장면이나 형편들을 시의 재료로 삼고 있다. 시의 화자들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보통 사람들'로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 시집의 시편들에 구축된 언어적 형상들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은 대체로 미궁의 형상이다. 그것이 미궁의 형상인 이유는 인간의 삶이 불가해한 암호와 같이 해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은 너무나 뻔하게 정형화된 양식의 연속이자 반복일 뿐, 문제는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영란이 구축하는 시의 기호들은 이제 작품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우주를 지칭하는 데에만, 곧 인간 삶의 ‘사방연속무늬’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 그것들은 ‘사방연속무늬’의 그물과 어둠 속에 갇히고 숨어 있던 어떤 것들을 시의 언어로 이끌어냄으로써 그것이 드러나게 할 것이며, 그것은 다시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비의와 진상을 깨닫도록 해줄 것이다.
사방연속무늬의 그물과 겨울별서(別墅)
이영란의 시에서 인간 삶의 정형화된 양식의 연속과 반복으로서 사방연속무늬는 마치 밀림의 식물들처럼 부단히 증식하면서 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이영란에게 인간의 삶 자체의 형상이자 인간의 삶이 산출하는 모든 것의 형상인 사방연속무늬들의 짜임은 마치 천라지망(天羅地網)과도 같아서 우리 인간은 거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앞으로 그것들은 ‘사방연속무늬’의 그물과 어둠 속에 갇혀 있고 숨어 있던 어떤 것들을 작품의 언어적 형상 속으로 이끌어냄으로써 그것이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영란의 시들이 ‘사방연속무늬’의 그물에서 벗어나서 급기야 그것을 찢어낼 수 있는 힘을 간직한 예지의 언어를 향해 비상할 수 있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란다.
― 강웅식(문학평론가, 고려대 강사)
“꽃 피우자고 시작한 일이
서리의 뒤끝을 수습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ㅡ 「시인의 말」 中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
기슭에서 출발한 수영은
반드시 기슭을 잡는다
어제는 두 곳의 장례식과
한 개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모두 반복했고 닮은 꼴이었다
닮지 않은 날이
기쁜 날이었다
나날이 건너다니는 징검다리는
첫돌과 마지막 돌이 감쪽같이 닮았지만
우리는 젊을 때 가졌던 결의와 다짐을
어디선가 물에 빠뜨려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계율이 떠오르고
일정한 몇 개의 패턴들처럼 물은 흘러간다
어제와 내일은 얼굴도 없이
슬그머니 도둑같이 다녀가지만
혹은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은
영락없이 사고 여객기처럼 길게 연기를 날리며
불온한 기억의 숲 너머로 사라지곤 한다
제일 많이 닮은 것은
맑은 날의 하늘과 흐린 날의 지붕들이었다
닮은꼴로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반복을 위해
남자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닮은 날들이 나를 지우고 갔다
그래도 세상은 나름 친절하였다
갑자기 늙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서로 닮은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 수 없는 기슭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겨울 별서(別墅)
먼저 긴 굴뚝을 장만해야 합니다
검은 연통을 희디 흰 채로 통과하는
그런 고집스런 자세여야만 합니다
물은 늘 흐르는 물이어야 합니다
물통을 들고 키 작은 버드나무
얼음 꽃이 가득 핀 그런 물가까지 가서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물길을 뚝 끊어다 놓고
연기가 다 빠진 불로 차를 끓여야 됩니다
창문은 혼자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추위들이 비집고 들어올 문틈이며 벽 틈쯤은
모른 척해야 합니다
뒤꼍 바람벽에 걸어둔 시래기에
파란 바람이 버석거리는 동안
들쥐가 쪼르르 숲 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뒷산을 긁어와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
무쇠솥은 들썩이며 제 힘을 과시합니다
내리다 만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바뀌고
고샅은 막히고 고립무원이 될 것이므로
이른 아침 은빛 머리를 정갈하게 빗질해야만 하겠습니다
겨울 별서엔 몇천 평
흰 눈의 습자지가 있지만
필력은 쉬이 녹고 마는 것이라
다 제때가 있을 것입니다
키가 적당한 나무를 마당에 세워놓고
여러 가지 새들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즐거운 쇠락
오래된 골목이라면
지겨울 만도 할 것인데
녹슨 철문을 넘어 능소화가 넘친다
이 집엔 팔월만 가득하다고
후덥지근한 마당 끄트머리를 밀고 철문을 넘는다
들어오는 시절은 끝이라고
이젠 쇠락을 밀고 이 집을 나갈 차례라고
우거진 넝쿨이 문 밖으로
꾸역꾸역 넘쳐 나오고 있다
우르르 몇 번의 이사로 빠져나간 집
더 이상 안쪽이란 안쪽은 없을 것 같은데
굳게 닫아건 문이 있고 그 문을 열고
나오고 싶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듯
몸은 집에 두고 마음만 길 밖에 세워놓을 때
살짝 지나가는 빗방울에도
팔월의 바닥은 능소화 꽃송이들로 넘친다
쇠락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지
누군가 빈 병 하나를 담장 안으로
던져 넣으면 쨍그랑 소리를
곧바로 던져내는 저 집은 빈집이지만
이 골목에서 가장 환한
팔월이 독채 삼는 즐거운 쇠락
담장 안의 꽃들은 대개
담장 밖을 분란시키지만 팔월은 낮아서
뒤꿈치도 없이 담을 넘는다
불구
몸에서 나온 그림자를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을 수는 없어도
구겨 넣을 수는 있다
그때 몸은 불구가 된다
나무의 그림자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나무에 들어가듯, 들어가서 절그럭거리듯 한낮으로 흘러나온 그림자가 어둑한 저녁으로 들어간 몸은 쓰러진 잠이 된다
일그러진 기형을 달고 다닌 한여름 한낮은 쉴 새 없이 땀이 난다
한번 들어간 기형은
불구로 굳어간다
말에도 기우뚱 숨어 있는 검은 그림자가 직진을 버리고 말은 늘 진중(塵中)을 헤매고 있다
균형을 잃은 실사(實寫)가 전유물이 된, 사실
모든 말들은 다 불구다
머리도 꼬리도 아닌, 비루한 행태를 보인다
한번 구부러진 몸짓을 교정하기 위해
평생의 교정을 허비한다

저자 소개 ㅣ 이영란
2015년 《서정시학》 등단.
〈경북일보 시니어문학상〉 〈해양문학상〉 수상.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