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문효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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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 출간일 2023년 12월 25일
지성의상상 시인선 038.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효치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신작 시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평생을 바쳐” “하다 보면 세상을 밝히는” 어떤 존재에 대해 그려 보이고 있다(「해」). 그것은 한자리에서 빛남으로써 위의를 드러내며, 개별 존재들로부터 존중을 받는다. 이는 만물을 살게 하는 태양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 세계에 붙박여 언어의 빛을 길어올리고 나누는 시인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시력(詩歷) 57년, 이 땅의 아픈 삶들에게 대가 없이 나누는 햇빛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하는, 일생을 시에 바쳐 온 시인의 여전한 바람을 읽을 수 있다. 시집 속 시편들 한 편 한 편이 시인의 그런 단단하고 환한 깊이를 드러내는 데 한 치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문장 저편에 숨겨진 세계의 단단함
시인은 구체적인 진술이나 상상력보다 선문답처럼 시의 요체(要體)만 툭 던져놓는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성과 숭고함, 여백으로 대표되는 문효치의 시편은 흡사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앞에 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한 듯 단단한 세계는 체험적 삶의 현재성과 냉철한 사유로 귀결됨을 여러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성찰적 사유는 “도를 닦아야지” 선언으로 시작된다(「세상을 건너갈 때」). 도를 닦아야 하는 당위성은 “억누르는 핍박과 억울한 누명”에 내재되어 있다. 이는 6·25전쟁 당시 월북한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감시, 이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피폐와 죽음의 공포가 연관되어 있음을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표제시 「헤이, 막걸리」에 드러나듯, 시인은 한때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고 술로 허무를 달래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화도 많이 내고, 욕도 많이 했으리라. 한데 “숨어서”(「길」)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길도 찾아낼 만큼 인고의 세월을 견딘 시인은 세상이 “다시 따뜻한 손”(「새해 아침」)을 잡아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고 반성한다. “밟으면 밟히는” 억압과 핍박의 길 또한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임을 깨닫는다.
― 김정수(시인)
"비치는 햇빛이나 흘러가는 시간이 쓸쓸하다.
센 아픔도 못 견딜 고독도 아닌 이 허전함의 함정.
그러나 잘 보면 이것의 저 안쪽에서 연푸른 싹이
온건한 반가움으로 움터 올라온다."
ㅡ 「시인의 말」中
헤이, 막걸리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술병이 돌아간다
술이 돌아간다
바람개비가 돌 때
한 사내가 돌아간다
술은 돌아 돌아
어디로 흘러가는가
계곡물이 흘러간다
술이 흘러간다
한 사내가 흘러간다
세상의 심층
내장의 어느 계류
바람개비가 돌아갈 때
아, 나도 어지럽게
새 세상 만나러
돌아 돌아 간다
배가 익을 때
햇빛 한 주먹
지나가다가 배나무에게 붙잡혔다
봉지 속에 처넣어
가지에 달아 놓았다
말이 달린다
내가 한 말이 달린다
나는 말 위에 타고 달린다
가속도가 붙는다
말은 내 생각과 다른 길로 달린다
말은 제 의지대로 달린다
나는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가 없다
말의 뜨거운 목덜미를
힘차게 부여잡고 달린다
말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른다
무언가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 하기 때문이다
내 머리도 그렇다
통증이 온몸을 뒤덮는다
그래도 또 말을 한다
말은 말이 된다
지도를 보며
소싯적 세계지도를 보다가
바다가 육지보다 넓다는 걸 알았다
푸른색 바다 위엔
붉은색 뱃길이 쭉쭉 뻗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요코하마까지
부산에서 싱가포르
런던에서 리스본
나는 일쑤 그 배에 올라탔다
인천에서 희망으로
군산에서 사랑으로
포항에서 극락으로
마음대로 붉은 선을 그으며
바다 위에
꿈을 그려 넣었다

저자 소개 ㅣ문효치
1966년 《한국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계백의 칼』 『어이할까』 『바위 가라사대』 등, 시조집 『너도바람꽃』, 선집 및 전집 『백제시집』 등이 있음.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삿갓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