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윤금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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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문학의전당 | 출간일 2023년 9월 15일
시인동네 시인선 213.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윤금초 시인의 신작 시조 시집.
이번 시집에는 단수 시조는 없이 연시조와 사설시조가 주조를 이루며, 혼합 연형시조도 더러 보인다. 그동안 시인이 애써 개척해 온 다른 언어들과의 상호텍스트성도 여전히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윤금초 시인은 커다란 스케일, 동서와 고금을 교차하는 박람(博覽)의 상상력, 지역어의 활발한 활용, 야성적 에너지의 끝없는 분출과 용해 과정을 스스로의 독자적 역량으로 갈무리해 간다. 그의 이러한 시조 미학에 대한 중후하고도 지속적인 굴착 의지를 두고 ‘시인’의 존재론과 ‘시조’의 양식론에 대한 실천적 응답이자 시조의 현대적 가능성에 대한 정공법적 반응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윤금초 시인의 정형 미학은 뭇 생명들의 유한성을 다루면서, 그러한 실존적 시간에 대한 순명의 의지를 선연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시인 윤금초’의 실존적 시간들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의 이번 시조집이 한동안 우리 시대의 충실한 시조사적 범례가 되어줄 것을 기대한다.
미감(美感) 눅진 풀어낸 신들린 붓놀림
우리 시조시단에서 윤금초 시인만큼 새로운 실험을 최대치의 확장성으로 보여주는 시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윤금초 시학의 핵심이 형식에서의 절제와 다양한 변형 사이의 긴장, 내용에서의 역사와 현재형 사이의 길항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전통과 창조 사이의 균형이 없다면 시조의 양식적 확장은 거의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할 것이다. 그만큼 윤금초 시조가 시현하는 정격(正格)과 파격(破格) 사이의 확장 의지와 현실에 대한 유추적 관심이야말로 우리 시조가 개척해 가야 할 미답의 권역이라 할 것이다. 결국 윤금초 시학은 고전적 구심과 실험적 원심 사이의 균형을 특유의 내적 깊이로 보여준 탁월한 사례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대시조 양식에 대한 창조적 몸짓은 기층언어의 조탁 과정을 현저하게 보여주면서 기층언어의 미감을 살려내는 데 온몸의 적공을 들이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그는 사물과 시간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펼쳐나가면서 그 안에 추상어보다는 구체어, 문어보다는 구어, 표준어보다는 지역어를 지향한다. 이러한 언어적 자의식으로 가득 찬 그의 시학은, 우리 정형 시단을 풍요롭고 구체성 있는 언어의 보고(寶庫)가 되게끔 해주고 있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 한양대학교 교수)
“무딘 대패 울러 매고 오매사복 헤맸나 보다. 톺아보나, 뒤집어보나 쭉은 대팻밥 늘비하다.
해거름 천창 너머로 만 길 적막 되짚는다.”
ㅡ 「시인의 말」 전문
저물녘 물질명사
밀대 끝에
피어오르는
오방 색상 비눗방울
짧고 짧은 그림자를
음표처럼 찍어낼 쯤
깨금발
서리까마귀
땅거미를 쪼고 있다.
백야(白夜)의
박명(薄明)인가?
우중충 잦아든 거리
한 단계 낮은 음계로
짙어지는 어둠 속에
적의(敵意)의
비적 떼 바람
벼린 칼날
허공 가른다.
눈 뜨고는
왜 못 봤을까,
눈 감은 뒤
형형한 빛.
선하품 지긋 깨물고
물질명사 만지는 저녁
샛강 물
헐린 입술로
바람벽을 핥는다.
해머링 맨*
천근만근 쇠망치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광화문 한 모퉁이, 노동 하는 거인 하나
날마다 열 시간 남짓 세상을 쪼고 있다.
한 치의 틈도 없는 저울 같은 몸짓으로
눈도 비도 어깻바람, 하릴없이 맞아가며
밥 앞에 주린 시간을 망치 들어 퍼 올린다.
연등 환히 불 밝힐 땐 공염불 주워섬기고,
크리스마스 다가올 땐 산타 모자 둘러쓰고,
제 안에 이는 불길을 다독이고 있나 보다.
*Hammering Man. 서울 광화문 세화미술관 앞에 설치돼 있는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움직이는 조각.
독의 계보 2
어느 날 묵상 중에 ‘고(蠱)’라는 말 떠올렸어.
한 개 그릇 위에 세 가지 독을 지닌 벌레족 포개놓은 글자 말씀이야. 두꺼비 왕지네 독사를 그릇 속에 가둬놓고 죽자 살자 싸우면서 서로 잡아먹게 하는데 말씀이야, 이때 마지막 승자를 ‘고(蠱)’라고 하지. ‘고’를 꺼내 그놈 독을 음식에 버무린 다음 그것을 사람이 먹게 하면 어찌 되겠어? 가슴이 답답해지고 순간 복통 일으키고, 얼굴이 누르스름해지거나 퍼렇게 변하지. 하먼, 하먼. 나중엔 피 가래 토하고 항문에선 피고름 쏟아지고. 에구머니나….심지어 몸속으로 독이 흘러들어 그게 끝내 벌레 되고 나중엔 내장마저 파먹는다나, 어쩐다나.
어머나, ‘고’를 알고부터 가위눌려 자지러졌지.
사물의 그림자
나팔꽃 넌출인가, 햇살 줄기 창틀 휘감고
부쩍부쩍 기어오르는 눈부신 촉수 따라
수많은 빛의 입방체, 사방팔방 넘실댄다
물안개가 피워 무는 실오라기 숨결 너머
포플러 이파리 흔들 물개 박수 치는 새 떼
부싯깃 짧은 반짝임, 마른천둥 몰고 온다.
하늘 가녘 팽팽하게 순간장력 미당길 때
허공도 공갈빵마냥 별안간 부퍼 오르고
내 시의 구상명사도 탱글탱글 영글어간다.

저자 소개 ㅣ윤금초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큰기러기 필법』 외 다수, 시조창작 실기론 『현대시조 쓰기』 외 다수의 저서가 있음.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