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홍일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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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주)민음사 | 출간일 2023년 4월 14일
민음의 시 312.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홍일표 시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줄곧 언어로 포획될 수 없는 인간 질서 너머의 세계를 좇아 왔던 홍일표 시인의 시에는 그만의 독특한 감각과 사유로 찾아낸 신비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몸'을 새로운 신비의 원천으로 발견하고 있다. 시인에게 ‘심장’은 몸 안에 깃든 ‘인간 질서 너머의 세계’ 그 자체이다. ‘조금 전의 심장’을 통해 시인은 온몸의 감각기관을 활짝 열고, 전에 없이 삶에 밀착된 몸짓으로 세계를 마주한다. 시인이 열어준 길을 따라 우리는 몸과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방식에 감각을 내맡기게 된다.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낯설고 매혹적인 반짝임과 그림자, 희미한 소리들이 물밀듯 다가든다. 그렇게 시집 속 시편들을 따라가다 보면, 생성되는 순간 끊임없이 사라지며 이어지는 언어 바깥의 소리들과, 저마다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박동하는 새로운 심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눈사람의 언어와 미지칭의 얼굴들
홍일표 시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자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사물과 존재 들이 뱉어 내는 말, 해석되지 않고 문장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세계의 맨얼굴을 붙들어 보려는 과정을 시로 쓴다. 이는 첫 시집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그의 고유한 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섬세한 관찰과 정교한 묘사는 워낙 시인의 특장이지만, 온몸의 감각기관을 재배치하여 세계의 감각기관과 조응하려는 몸짓이 더욱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살아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집은 언어 밖에서 출렁이는 존재자들이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보여 준 것을 증언하려는 시인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변신은 보는 것을 멈추고 소리에 집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시인이 일상적인 시각적 인식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기척을 감지하기 위해 동원하는 시적 장치가 바로 안개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안개 이외에도 구름, 강물, 빗방운, 눈, 바람, 허공 등이 시의 주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모였다 흩어지고 있다가도 사라지며 끊임없이 몸을 바꾸는 순간적인 것, 정해진 색채나 형상이 없이 떠도는 흰색 또는 텅 빈 색의 유동적인 것이다.
― 오연경(문학평론가)
“언어의 바깥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이어진 적막한 길 끝에서 잠시 서성이다 돌아가는 저녁 어스름이겠다.”
ㅡ 「자서(自序)」 전문
문자들
글자는 글자를 살지 않고 반성하지도 않는다
불이 꺼진 컴컴한 글자들
실명한 검은 활자들을 책에서 끄집어낸다
죽은 씨앗 몇 알 떨어진다
콕콕 쪼아 대도
먼 곳에서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던 맥박을 기억하지 못한다
장맛비에 젖어 부풀던 책에서도 싹이 돋지 않는다
톡 건드리면 도르르 굴러 떨어지는 글자들
빈 가지 끝에 붙어 있는 죽은 벌레 같다
오래 필사하던 향 짙은 봄의 문장들도
제 몸을 부수며 하얗게 일어서던 파도의 격정도
검은 무덤이 된다
오늘의 표정을 가둔 감옥이 된다
글자는 글자를 살지 않아서 자기 목소리를 잊었다고 한다
글자를 떠난 색색의 감정들도 모두 잊었다고 한다
동백
동백에는 울컥이라는 짐승이 산다
백년이 지나고
다시 천 년이 지나
눈도 귀도 없이
바닥엔 붉은 심장의 조각들
허공의 단두대 아래
덩어리째 나뒹구는 반역의 대가리들
조문객 하나 없는 동백나무 상가에
누가 붉은 조등을 내다 걸었나
하나둘 불이 꺼지고
제 죽음을 스스로 발아래 묻는,
비문 하나 남기지 않은 허공의 벼랑 아래
열 번 스무 번
제 몸을 던져 장사 지내는
울컥이라는 짐승
동백나무 옆을 지나며 다연발 총소리를 듣는다
탕, 탕, 탕 봄이 쓰러져 핏덩이로 뒹군다 늦은 밤 조등 하나 들고 일찍 당도한 미래를 조문하러 가는 저, 저 이는 누구신가?
동사(動詞)
‘갑자기’라는 말에 고라니가 산다
‘느닷없이’라는 말에 멧돼지도 산다
차례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튀어나온 심장
심장이 지르는 소리에 불이 붙는다
고요했던 나뭇잎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소나기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맨얼굴로 달려온다
소나기를 쫓아 고라니가 뛰어간다
멧돼지가 돌진한다
인간이 붙여 준 이름을 던져 버리고
유일한 사건이 된다
고라니는 해석되지 않는다
멧돼지는 문장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몇 번을 접어도 접히지 않는 고라니
몇 번을 구겨도 구겨지지 않는 멧돼지
색
미황사 대웅보전이 단청을 맑게 씻어냈다
색의 해탈 같다
늙은 나무의
눈부신 유골
색 너머를 정독하면서
조금씩 색을 건너왔다
나무가 잡고 있던 색의 행방을 두리번거린다
색 바깥으로 나가 어디에 머무는지
색색의 감정들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에 깨어나는 색이 있다
홍매로 건너간 색은 죄 없이 얼굴을 붉히고
담장 옆 배꽃으로 옮겨간 흰색은 가장 비슷하게 죽음을 닮아간다
마음을 지운 뒷산 바위처럼
대웅보전의 맑은 뼈가 희게 빛나는 오후
멀리 달마산 기암괴석이 색의 행로를 내려다본다
색이 오가는 길이 조금 더 환해진다

저자 소개 ㅣ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