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곽효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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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주)문학과지성사 | 출간일 2023년 10월 23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91.
1996년 《세계일보》, 2002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곽효환 시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
전작 『너는』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계의 안팎에서 시련과 상처를 견디며 눈물짓는 이들을 너른 품으로 끌어안아 보듬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대의 곡절과 흐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주로 나열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터전을 이루어온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어진 삶과 사랑하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의 순간순간을 소리 없는 눈물로 버텨낸 주체들이다. 이때의 ‘소리 내지 않음’은 자칫 힘없고 유약한 수용처럼 보이지만, 역경의 무게와 어둠을 기꺼이 감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단단하고 뜨겁다. 시인은 이 무명의 눈물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를 추동해온 동력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번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은 근현대사의 뒤꼍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가만히 쓸어보고 기억하며 되짚어보려는 하나의 특별한 문학적 시도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사람-풍경의 고현학
‘소리 없이 울다 간’ 존재들을 조명하는 시인에게 “차단된 삶의 여로이고, 단절된 역사의 현장이며, 잊혀가는 오래된 정감의 고향이자,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그리움의 진원지”(『슬픔의 뼈대』 해설)인 북방은 특히나 유의미한 공간이다. 이에 『지도에 없는 집』(2010)에서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시원과 궁극을 찾으려는 그의 북방 여정은 이번 시집에서도 계속된다. 연해주, 북만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곽효환의 시편들은 거대한 북방의 원형을 차근히 완성해나가며, 그동안 시인이 계획하고 꾸려온 “고되고 길었던 여정”의 끝 또한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묵묵한 울음과 식지 않는 슬픔이 존재하는 한 그는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 / 다시 여장을 꾸릴 것”(‘시인의 말’)이다. 사람과 사랑만이 몸을 기댈 수 있는 기적이기에.
멀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넘는 북방 공간이나 베트남 등 남방 공간까지, 가까이는 그의 오랜 근무처 인근이었던 광화문이나 청계천까지 오감을 열어놓은 시인의 발걸음은 넓고 깊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걷다가 때때로 ‘시대의 정거장’이나 ‘시대의 강가’에 머물며 서성거리고 귀 기울인다. 그렇게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찻길과 물길의 내력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그래서 시인은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말한다. 소극적 수용 단계를 넘어서 적극적 회통과 그것을 위한 다가서기의 의지적 발화다. 그러다 보면 사연 많은 말들을 채록하게 되고 이런저런 소문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들을 가로지르면 사람살이의 다채로운 풍경첩을 마련하게 된다. 그렇게 마련한 ‘사람-풍경’을 독자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 곽효환의 시적 의지이고, 그 결실이 바로 이 시집이다.
― 우찬제(문학평론가)
“아마도 역려에 들어
잠시 몸을 누이겠지만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
다시 여장을 꾸릴 것임을.”
ㅡ 「시인의 말」 전문
만선열차
옛사람을 찾아가는 북방의 길
긴긴 여름날도 기울어
안개 같은 어둠에 싸인 장춘역
먼 곳으로부터 왔을 밤 기차는
만주에서 더 깊은 만주로 혹은
어느 먼 변방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벌판
하나둘 불 밝히기 시작한
지붕 낮은 집들의 그림자 흐려지고
오래전 싸늘한 만선열차에 올라
철도가 닿는 만주 어디쯤 머물거나 살았을
어린 송아지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북으로 북만으로 다시 북새(北塞)로
거기서 다시 북동이나 북서로
더러는 더 멀리 흩어진 붉은 길에
허기처럼 밀려오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본다
염상섭 안수길 이육사 백석 윤동주 송몽규
그리고 순이 혹은 월이라고 부른
그리운 무명의 사람들
늘 봄이고자 했던 북만의 도시
그러나 끝내 봄이 아니었던
지워지지 않는 그늘과 슬픔이 차창에 맺혀
북만을 가르는 열차에 실려간다
입석(立石)
궁성도 전각도 없는 들판
무심히 흐르는 작은 물길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는 당신을 닮은 내가
저쪽에는 날 닮은 당신이 있습니다
눈 오고
바람 불고
비 내려도
서로를 닮은 우리는 그렇게 바라만 보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꽃잎을 실은 물줄기가
우리 사이를 적시고 흐르는
달빛 사무치는 어느 봄밤
나는 물길 건너 당신에게 가고
당신은 들길을 지나 내게 옵니다
그렇게 다시 우리는 마주보고
서로를 그리워 합니다
우리는 그랬습니다
표정도 미동도 없이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눈과 코와 귀와 입이 닳고 해어진 어느 날
지쳐 쓰러져 흙더미에 파묻힌 당신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이는 어디에 계신가요
호아(虎牙) 협곡*
아득히 먼 고원에서부터 격류해온 물줄기
대평원으로 굽이치기 직전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들 사이
협곡에 갇혀 거칠게 울부짖는다
아무도 오르지 못했을 법한 잇단 봉우리
가장 높고 험준한 곳에 세운 작은 사원 하나
비껴드는 석양빛에 물드는 사람 아래
더 붉게 물든 황색 물줄기의 꿈틀거리는 도사림
오늘밤 협곡에 뜬 별들과 밤새 수군거리다
날 밝으면 강둑 너머 거침없이 쏟아질 것이다
더 크게 굽이치고 더 크게 사행하며 그렇게
더 멀리 새 길을 낼 것이다
*의창(宜昌)과 형주(荊州) 사이 장강이 합류하는 협곡.
호흡뿌리
염분을 머금은 갯벌 진흙 밖으로
뿌리에서 밑동까지 마디지고 뒤틀린
아랫동을 드러낸 나무들을 본다
뒤섞여 들고 나는 붉은 강물과 해수에 수없이 잠기며
물 위로 혹은 땅 위로 붉은 숨을 내쉬면서
줄기를 지탱하고 가지를 뻗은
문어발 모양의 호흡뿌리를 드러낸
맹그로브숲
폭탄과 고엽제가 무수히 쏟아졌던
메콩강 하구 껀저섬,
단지 숨을 쉬기 위해 땅 밖으로 뻗은
나무들의 호흡뿌리 사이사이에
어느 날 지의류가 움트더니
방게 바위게 꽃게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조개류가 들고 언제부터인가
민물과 해수 물고기들 산란하고
치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곤충과 산호초와 악어가 들고 마침내
새와 원숭이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숲의 기적
죽음과 폐허의 참혹한 그림자를 거둬내고
앙상하지만 단단한 나무들이 이룬
기적을 넘어선 생명의 요람을 본다

저자 소개 ㅣ곽효환
1996년 《세계일보》, 2002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시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등이 있음.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