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병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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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푸른사상사 | 출간일 2023년 11월 27일
푸른사상 시선 183.
2011년 《발견》으로 등단한 박병란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누적된 통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대한 고요하게 분출시키는 모습으로 그려 보인다. 이런 몸짓은 마치 혼합된 감정을 낱개로 해체하는 모습과 흡사하며, 세상의 가장 조용한 끝점에서 삶을 반추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보편적인 것들로부터 어떤 갈등을 체화하는 일은 너무 흔해서 차라리 쉽지 않다. 그러니 흔한 갈등은 갈등 그대로 두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시인은 주변에 산재한 갈등을 자신의 몸에 관통시켜 녹여내며 사유를 형성해낸다. 이런 방식은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시집 속 시편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지나온 통증의 시간을 토대로 현재의 삶을 따뜻하게 견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통과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담담히 맞서 부르는 시인의 이 지극한 삶의 노래는 혹독한 생의 겨울을 건너는 많은 이들에게 쉬 가시지 않는 온기를 나누어줄 것이다.
존재와 부재의 계절을 몸으로 쓰다
아프다. 아름답지만 차갑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성에의 아름다움이다. 곳곳에 ‘여름’을 펼쳐놓고 있지만 잇몸 시리게 하는 감정이 자못 얼음의 파편으로 흩어져 있다. 하지만 놀라워라, 시인은 그 차가움을 녹여 마침내 여름의 뜨거움을 주조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원래 쇠 맛을 지닌 밑동 붉은 포항 시금치 같은 사람, 선한 것에 무작정 무릎 꿇는 따스한 사람이었던 것. 그리하여 시인은 이윽고 흉방에 위치해 길방을 가리키는 어떤 별처럼 주름의 안쪽으로 깊숙이 자리 잡는다. 극심한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연료로 이웃의 혹독한 겨울에 따스한 온기를 전한다. 마음 시린 이들이여, 시인이 안간힘으로 끓여낸 이 ‘흰죽’ 한 그릇으로 절절한 사랑의 아픔을 끝내 녹여내시라.
― 장옥관(시인)
박병란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과 미덕은 정려한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흰죽같이 말없이 내 앞에 앉으시”(「흰죽」)는 시상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마치 빗방울이 창을 여리게 두드리듯이. 뿐만 아니라 시의 음성에는 사색의 정교한 내용이 담겨 있다. 박병란 시인은 “내 몸에 흐르는 너”(「나의 전부를 알았더라면」)를 관심 있게 노래하는데, 이때의 ‘너’는 가변적이다. 그것은 나를 포함해 이 세계와 모든 존재가 언제든 바뀔 준비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지거나 미래의 시간에 다시 돌아올 가능성과 그런 예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가 오거나 오지 않아서 헤매는 마음의 들녘을 이 시집은 가만히 보여준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 마음의 공간인 나의 들녘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 문태준(시인)
가라앉은 것은 사라진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느낌마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감정은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림이 시작된다. 침잠의 깊이가 클수록 표층에 와닿는 통증의 정도가 세지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감정의 깊이를 토대로 박병란의 시를 살편 한 문장으로 함축하자면 “가버린 것과 오지 않는 것 곁에서 서성이는 말”(「부록(Anexo)」)이라고 정의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최은묵(시인)
“한 가지 색의 고유함보다
무엇과 무엇이 함께 만들어내는 고유함에는
힘이 있었다”
ㅡ 「시인의 말」 부분
읽기 쉬운 마음
우리는 왜 그토록 화가 나서 각자 문을 닫았나. 말하다 말고 서로를 남겨둔 채 하루 번갈아 하루씩 입을 다물고,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이 연약한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부목처럼 힘이 다 빠져 언제 휩쓸릴지 모르는 우리, 형편없이 덧댄 쪼가리같이, 저만치 벗어던진 신발 한 짝같이, 함께 살아도 같은 마음인 적 있었나. 어쩌자고 일요일마다 비가 내렸나,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문이 없는 곳에 매단 달력처럼 어디서 노크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았을, 병은 아픈 것이 아니라 서러운 것, 병을 얻고부터 하루도 슬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너무 멀쩡해도 너무 아파도 우린 제대로 설 수 없을 거야,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 방문 앞을 서성이는, 읽기 쉬운 마음이 모여 사는 섬, 물음표와 감탄사를 한 몸에 지닌 까닭에 때때로 그 마음은 자주 들켰다
덕무*
마음 그늘이 버짐으로 피어나는 겨울
언 습기가 배어나와 얼음벽이 된 방
더는 지켜볼 수조차 없는 아해들의 눈빛
해의 각도를 따라 상을 옮겨가며 책만 보던 덕무가
오늘은 맹자를 팔아 밥을 산다
쌀밥은 뱃속 가득 눈물로 미어지고
움파 한 줌 얻어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좌 씨를 팔아 나에게 술을 산다
무엇을 바꿀 수만 있어도
맹자에게 밥을 얻고
좌 씨 부인에게 술을 얻어먹는데
어떤 것도 무엇이 될 수 없어서
언 땅에 아해를 묻다가
하나 남은 삽자루마저 부러졌다지
동강 난 가난마저 돌이킬 수 없었다네
검푸른 추위가 저녁을 덮친다
멀리서 온 달빛이 해발을 넘는다
별의 좌표 일러주던 고단함에도
마음만은 노숙(露宿)하지 않았네
* 조선 시대의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
Preserved flower*
숲이 불탄 날로부터 한 달, 매트리스가 깔리고 먹고 자고 이불도 털지 않은 아이의 동굴, 괜찮나요 먼지는 알아서 뭉쳐요 커튼에 가려 실내 먼지는 보이지 않고 구석은 썩지 않고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요 아무 눈에 띄지 않아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 바닥 뒤에 숨어요 동굴은 길어 터널, 괜찮나요 먼지의 허파는 응급처치를 마쳤어요 밤을 거꾸로 털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을 익히고 있어요 우리 모두 괜찮나요 지난 몇 달은 장갑차에 깔린 쥐새끼처럼 납작해졌죠 마스크는 어제 빨아 널었어요 마주하지 않아도 숨이 막혀, 색깔을 믿는 만큼 나는 마스크를 믿지 않아요 이제 풀밭을 잊어요 내가 아는 숲은 다 졌어요 꽃은 유리병을 탈출하여 거꾸로 매달린 채 아름다운 참수에 이르지요 거실에 꽃이 말라가요 주목하세요 세계가 우리를 추적 중이에요
* 화학약품 처리를 하여 생화 형태로 보존한 꽃.
서쪽의 말들
도착한 꽃 상자는 길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에도 꽃이 핀다
포장지를 벗기다가 잊어버릴 만큼 한참을 벗기다가
얼지 말라고 다치지 말라고 두른 은박지 폼이
내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복을 삶는다
흰 것이 더 희어지게
더는 희어질 수 없을 정도로 폭폭 삶다가
느닷없이
신은 사랑처럼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야,
영화 속 대사가 생각났다
내복은 빨래통에 들어가 거품을 느낀다
자꾸 느끼고 느끼다 보면
꽃처럼 풍성하고 맑아질 것이다
꽃을 꽂자 영화처럼
더는 꽃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많이 꽂자
꽃은 지나치게 자기를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건 신도 마찬가지니까
신이 지루할까 봐 꽃을 피우는 겨울을,
이다음에도 사랑해야지

저자 소개 ㅣ박병란
2011년 《발견》 등단.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가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