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인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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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도서출판 현대문예
출간일 2022년 9월 27일
현대문예 작가선 164.
1990년 시집 『목 타는 그리움』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인석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고향’으로 표상된 삶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다양한 기억의 소환과 시적 변주를 통해 구현해내고 있다. 존재의 시원이 된 현재였으나, 지금-여기에서는 현실적 부재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름들은 간절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이유로 떠오른다. 삶의 속성인 ‘시간성’은 그 일방향성으로 인해 언제나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상실감을 안겨주며 그것은 시인 자신이 말하듯 “평생의 짐, 고독”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형의 삶을 위해 시인은 “어디든 정붙이고 사는 곳이 고향”이라는 의식을 애써 가져보지만, 근원적인 상실감과 외로움은 보이지 않으나 늘 생의 뒤편에 도사린 “비밀 문건”처럼 엄연히 존재한다. 예민한 촉수를 가진 시인의 경험과 감각은 개인적이다. 그러나 그 지극한 순도(純度)로 인해 보다 보편적인 정서와 감동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의 말처럼 “유실된 질문만 남아 있는” 존재들의 부박한 삶이지만, 세상살이란 어쩔 수 없이 “모와 각과 둥긂이 섞인 동네”이기에 그곳이 조약도든 선운사든 통영이든, “모두가 고향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의 위안과 함께 “꽃내 나는 이야기”인 삶으로서 보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능금처럼 물들어서 깎아낼 수 없는 기억
저녁 같은 마음으로 뒤를 보니
그녀는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듯
폭 좁은 길 옆 고택 마당에 올라서서 꽃잎을 호주머니에 담고 있다
꽃잎을 담는 게 아니다
능금처럼 물들어서 깎아낼 수 없는 그 기억을
가슴 한켠에 들이붓고 있는 것이겠다
아마 내년 이맘때쯤 그네들도
섬진강 등에 업혀 다시 오신다는 약속도 들어 있을 게다
― 「홍쌍리 매화마을에 와서」 부분
“없다. 또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한 사람만이라도 기억해준다면
있다는 것이다.”
ㅡ 「시인의 말」 中
까치가 들겄다
하나님께서 노점에 부어놓은 햇볕이
한 포대 반도 남지 못한 듯하다
노파는 생생한 가난을 독점하고
고봉으로 가난을 밀어내고 있지만
해돋이에게 상추 한 상자 마수걸이 하고
부추 한 다발 판 게 전부
툭 떨어진 동백꽃처럼 안쓰럽다
햇볕은 서쪽 구멍으로 다 빠져나갔다
허리 통증을 얼리며 일어선,
다 낡은 골판지의 궁색한 그 자리에는
엉덩이로 몰린 땀방울이 딱 그 크기의 수묵화로 피어 있다
참 진하디진한 그늘색이다
가난의 온몸이다
산다는 게 마당의 수리 덜 된 장독 같다지만
아랫목으로 가는 길이 이리 먼가
까치가 노파 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린다
심장에게
부족한 애비였다
내밀 수 있는 것은 눈썹 밑에 번진 물결 뿐이구나
아들아, 딸아 동백꽃처럼 살아야 한다
어지니꽃
하늘에다 사람을 그리다가 이름을 입혔더니 오동나무 정원에 그림자로 와 있다 자작나무 같은 그림자에 다시 자색 옷을 입혔더니 꽃이 되어 웃고 있다 그림자도 자죽으로만 남는 게 아니고 꽃으로도 피어난다 가슴 중턱이 천둥처럼 쿵쿵댄다
내 눈빛이 달빛에 닿아 하늘이 밀릴 때면 어지니꽃은 내 손을 꼭 잡고 성륜사 눈발에 손바닥 낙관을 찍고 웃기만 한다
그리고 가끔, 나에게는 언제쯤 봄이 오냐고 묻는다 나는 입김이 훈김을 밀어올리면 봄이 온다고 그때는 산동마을 산수유꽃 보러 가자고 여름 오면 마삭잎표 수영복 입고 수영도 하고 가을이면 맨발로 강천사 느티나무 낙엽 밟고 걷던 길 걸어보잔다
겨울이 다시 오면 당신이 건네준 붉은 장갑 끼고 법성포구 자취를 더듬어 그리웠던 것 서러웠던 것 나누어 보듬고 통영 여행도 떠나잔다
달마을
운림마을 산꼭대기 집에
핍진해진 상수리나무한 그루가
온몸에 감춰둔 단풍을 한 묶음씩 덜어내고 있다
나는 마당이 키운 햇살을 걷어와 그의 몸속으로 밀어 넣고
서화백*이 허공을 더듬어 그려낸 달마을 안쪽으로 들어간다
둥근 옛날의 저녁이 낡은 의자에 얹혀 있다
사람들은 몰려와 등을 만지고
동백꽃 같은 안부를 묻고
노파는 행랑채에서 통기타 가락이 번져오자
입을 오물, 오물거리며 둥싱둥실 천진한 모습이다
건넛집 큰아들 장작 패는 소리
김씨네 막내둥이 소 떼 모는 풍경 너머 새댁네의 아기 울음소리도
꼭 굿거리장단 같다
참 평화로운 마을이다
가끔씩 사람들은 팽나무 그늘에 모여
몇 필씩 가져온 웃음을 풀어놓고 십 원짜리 내기 장기를 두고
여편네 살가운 흉도 보고
빨래터 아낙들은
누구네 큰아들이 누구네 막내딸을 짝사랑했다고
슬몃 정 묻은 말을 흘리기도 하는 그런 기름진 마을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따뜻한 부대낌이 있어 좋다
종소리도 새끼를 치는 메밀꽃 피는 그 나라
*서강석 화백

저자 소개 ㅣ김인석
1990년 시집 『목 타는 그리움』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그대 영혼에 사랑의 수를 놓으리라』 『실풀기』 『봄의 무게』 『나는 그 이름을 백 년째 부르고 있다』 『어지니꽃』 『피멍이 자수정 되어 새끼 몇을 품고 있다』 『꽃대에 강물이 가득해서』가 있음. 〈광주문학 올해의작품상〉 〈매천황현문학상 본상〉 〈현대서정문학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