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정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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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주)함께하는 출판그룹파란
출간일 2022년 10월 30일
파란시선 0113.
2017년 《서정시학》으로 등단한 정재리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순서 바꾸기’를 제안한다. 그는 “그리기도 전에 고삐를 지”우자고 한다. “집도 짓기 전에 마을로 초대”하자고 한다. “약속하기도 전에 악수하고 헤어”지자고 한다. 고삐를 그리고 난 후 지우개로 지우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약속하고 악수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의 순서이다. 그는 결과를 먼저 행한다. 그렇게 하면 이 세계는 덜 지겨워질까? 시인은 그것을 실험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세계를 꿈꾸며, 그것을 언어로 짓는다. 그는 납작하고 평면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빠르게 이목구비를 생략하며, 안정적 구도에 기울기를 주면서 원인 없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이 창조한 이 이상한 세계에 우리를 초대한다. 이 시집을 읽는 독자는 이 납작한 세계에서 순서 바꾸기 놀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납작하고 빠르게 기울(이)기
정재리 시인에게 서정시란 서정 주체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전통적으로 서정시는 언어를 압축적이고 경제적으로 사용한다. 언어(기호)에 의미와 감정을 풍요롭게 투자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에 백 개의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압축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서정시는 깊이를 확보한다. 그런데 정재리 시인에게 서정시는 그러한 깊이 없이도 가능하다. 또한 그는 세계를 재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은 서정시로부터 탈주하거나 서정시의 문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분명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는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이 있다. 세계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 임지연(문학평론가)
정재리 시인의 시는 다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 말하지 않음, 그것을 보여 준다. 단순하게 절제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이런 매력은,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낸다는 동양화의 화법 중 하나라고 하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을 생각나게 한다. 절제의 여백을 통해 그 여백을 중심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그려 내는 마음은 오래도록 묵직하게 다가온다. 말없이 “칼로 긋듯//그런 눈물”을 보여 주고(「유성」), “한 번 간 사람을 열 번 보내고 돌아서”는 마음을 보여 준다(「흰색을 향하여」). 그런 마음은 내게로 돌아오는 사람의 말 같고 동시에 나를 떠나는 사람의 말 같아서 시를 읽는 마음은 오도 가도 못하고 사로잡히고 만다. 그의 시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자 고유한 매력이다.
또한 시인은 말을 감추고 감춘 말을 사랑해서 아프다. 그리고 넌지시 감춰진 마음의 빈 곳을 바라본다. 그렇게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숨겨 둔 마음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아니, 아프다. 쓸쓸하다. 그의 시를 몇 번씩 거듭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의 마음은 “달팽이 혼자 들어간 길”이거나(「내이도」) “빈 병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는/뱀 한 마리” 같지만(「불현듯 빛나는 테두리」),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시인이 만든 어떤 장소에 닿을 수 있다. 그 장소에는 외딴집 한 채가 있고, 그 집은 빈집이다. 방금 누군가 머물렀던 온기로 따뜻한 그런 집이다. 아무도 없지만 쉽사리 떠날 수 없어 가만히 나를 돌아보게 된다.
― 이승희(시인)
“양이
물고기가
아픔을 모른다고요?”
- 「시인의 말」 전문
직립의 시간
새로 산 버킷 햇은 검정색 자카르 원단
자카르 자카르 자꾸 발음해 보면
달려드는 자칼을 입에 물고서
머리 다리 꼬리와
머리 다리 꼬리를
바늘귀에 끼웠을 것이다
한 걸음씩
어떤 가로에 어떤 세로가
없던 머리 위에 없던 이야기가
집요해 아픈 줄도 모르는 무늬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저것 봐 날렵한 솜씨에 대한 칭찬이 무성해질수록 두 귀는 뾰족해지고 커다래져서
남자에게 충실하지 않은 여자가 환생하면 자칼이 된다는 인도 속담까지 다 들렸을 것이다
두 다리와 네 다리 사이를 오가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
거울 앞에 서서
G 모양 로고를 옆으로 돌려 쓰면
돌이킬 수 없는 안과 밖
머리 안에 숨기고 있어 내보일 마음이 적다
모자는 소중하고 조금 작다
모자 파는 아저씨처럼 자가드 자가드
올이 풀리듯 무심하게 말해 보면 한결 친숙해지는
도톰하고 매끈한 직조
고개를 꼿꼿이 들고 나는
두 손으로 쓰고 한 손으로 벗었지
표현
설원에 서 있는 하얀 말을 본다
긴 속눈썹 긴 다리에 관절 마디가 볼록한 어린 말
혼자 서 있다
언덕 너머엔
요정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사람보다 많은 말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궁금해
평원에서 눈을 들어 가장 먼 곳을 바라보면
돌아오는 항해의 시간
자신의 그림자를 알지 못하는 말
조용한 두 귓속으로 바람이 훅 들어오면
외로움을 배울 것이다
문득 키가 자랄 것이다
아, 또 눈이 온다 눈이 와
흰 바탕에 흰 말은 무슨 색으로 그리나요
온통 하얀 그림 속에서 하양을 잃고
자칫 떨어트린 잉크 방울로 검푸른 눈동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그리워 하나요
악천후처럼 지나가 버린 마음을
다시는 못 보게 된 것을
또 어떻게 그리나요
수면
블루에는 블랙이 가라앉아 있다
눈 감고 있다
참고 있다
피콕블루 마조릴블루 한블루 미드나잇블루 가로로 그으면 먼 물결
잠들기 전에
수심에 대해 말하려 하지만
말줄임표와 느낌표 사이의 어조를 결정하지 못해
깊이 잠긴다
견디고 견디다 마침내 견고해지는
바위가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언덕은 그림자로 뛰어내리고
죽고 못 살던 애인은 옛 애인이 되어 버리고
돌아누울수록 불어나는 이야기들
배를 뒤집을 꿈이라도 꾸겠네
파랑이 인다 파랑은
물고기가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물결 파 물결 랑
어쩐지 벨벳 같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면
야옹, 새벽잠을 깨우는 환청
항구의 빛나는 푸른 눈 그 검은 고양이 안아 본 적도 없는데
환상통을 앓는 이유
깊은 바닷물로 지붕을 들어 올리는 시간
알고 보면 가벼운
프러시안블루다
행잉
누구일까요
벽에 기둥에 공중에
매달리지만 붙잡지 않는 저
이름이 생각 안나
화분 밑 바코드를 올려다봐요 토분 디시디아 10,000
부를 것도 아닌데
귀는 매일 열려 있고요
무엇일까요
부를 노래는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두 팔을 아래로 떨어뜨릴 때까지 어둠 속에서
숨을 멈추는 관객은
어딘가에 모든 걸
걸어 본 사람
이젠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
저면관수하는 방법을 서투르게 배우며
아가미의 호흡에 빠져드는 사람
너의 취향은 단조의 슬픔이란 말을 들었고
기꺼이 반음 내려와
고요한 잎들
아래로 자라는 아이가 있어요
있어요 저기
위로가 필요한 아이인데 정작 아무런 표정이 없고
햇살이 창을 비껴 들어올때 잠시 미간을 찌푸릴 뿐
누가 정확한 방향으로 손가락질하며 묻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얼마예요 물은 며칠마다 주나요

저자 소개 ㅣ정재리
2017년 《서정시학》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