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상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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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방 속의 꿈꾸는 새 모자
너는 언제쯤 네 모자를 가져갈 거니? 네가 벗어놓고 간 모자를 볼 때마다 그 속에 네가 들어 있는 것만 같아 만지기도 전에 손가락부터 움찔움찔 뻣뻣해져 네가 벗어놓은 바지에도 티셔츠에도 팬티에도 너는 없는데 벗는 순간 네가 송두리째 빠져나가 다른 것들과 섞여버렸는데 모자만은, 네가 썼던 모자만은 끝까지 네 존재로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아 섬뜩섬뜩 놀랄 때가 많아 어떨 땐 네 모자가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의자 위에 있는 네 모자를 보고는 마치 네가 그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아 깜짝, 소름이 돋을 때도 있어 도대체 네 모자에 무얼 집어넣은 거니? 설마 네 모자에 우리들의 추억을 몽땅 집어넣고 너는 다른 모자를 쓰고 유유히 떠나버린 거니? 우리가 함께 걷던 길보다도 우리가 함께 먹던 음식보다도 우리가 함께 즐기던 바람보다도 하늘보다도 공기보다도 더 가까이, 더 집요하게 내 곁에 붙어 있는 네 모자 빤히 눈뜨고 나를 감시하고 있는 듯한 네 모자 제발 부탁이니 이제는 네 모자를 가져가주렴 내게서 치워주렴 다른 건 모두 내 손으로 치우고 버렸는데 네 모자만은, 그 속에 네가 들어 있는 것만 같아 내 손으로 멀리멀리 창밖으로 훨훨 날려버릴 수가 없어 그러니 제발 네 모자의 질기고 못된 함정 속에서 나를 좀 빼내줘 나를 좀 자유롭게 해줘 추억은 수집품이 아니야 우리도 이제는 신발에 들어온 돌조각을 털어내듯 그 방에서 나와 가방을 싸고 그 속에 새 모자를 집어넣고 훌훌 떠나야 하지 않겠니? 여행가방 속의 꿈꾸는 새 모자가 되어 홀가분하게 아주 홀가분하게!

김상미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가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웹진 월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5.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