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봉윤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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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 쓸다
아침나절 어지럽던 머릿속 이야기들을 쓴다,
아니 쓸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이미 붉게 물들었거나 벌레 구멍이 나 있다 분명 백지를 쓸었는데 나뭇잎 잔뜩 떨어진 나무 밑, 빗자루 자국만 가득하다
먼지를 풀풀 내는 징그러운 짐승의 털 같다.
책상 위에는 빗방울로 만든 악보가 사막으로 빚은 화분이 생쥐로 만든 종이가 뾰족한 너의 목소리로 부스럭거린다.
백지를 쓸고
나무 밑을 쓴다.
세상의 구겨지는 종이들 중 깨끗한 백지를 못 보았다
종이를 구기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게 쓴 글자들을 구기는 것이다
귀는 입으로 달려가고 입술은 말달리듯 고삐를 놓치고 손가락이 둥그러지며 펄럭인다.
깨끗해지라고 쓸었을 뿐인데
아, 어지러운 저 획들
나무 밑을 흙바닥을 한참동안 읽었다
마당을 구길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가끔은
짐 싸 본적이 있는지
늘 비좁은
한 채의 이불 같은
어쩌면 얇은 귀가 있고
신발에 신발이 겹치던
그러모았던 것들이 바싹 붙어 있던
자꾸 겹치게 되고
깨어 떠나던
방들이 너를 소비한다
공상은 얼마나 넓은 박스인지
눈치를 보는 목록들은
어디로 옮겨갈까
그 따뜻한 무게로
우리는 간다
한 장의 복권처럼
불현듯 나타나는
다른 생의
한밤중에 누워 생각해보면
벽을 뚫고 나가
마이너스 된 동그라미를 달고
덜덜거리는 승용차를 몰고
어디로 옮겨 갈 수 있을까

봉윤숙 l
201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꽃 앞의 계절』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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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호 공시사의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