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백진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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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불이 켜지면 비로소 밤이 된다 신은 빛이 알알이 박힌 침구를 편다 인간은 오래전 신이 내린 저마다의 작은 은총을 켠다 이로써 지상은 천상의 거울이 되어 밤새 다투어 반짝거리는 것이다
어느 날 새하얀 회랑을 거닐던 신은 다 시들어가는 풀 한 포기를 보았다 잠시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물을 주었다
어둡고 버려진 집 햇빛이 비치면 온통 먼지투성이인 작은 시체들이 바싹 마른 몸으로 잠들어 있다 고통이 깨어날까 봐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커튼을 닫는다 빛이 들어올 수 없게 신의 행렬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신은 그늘이 없는 나무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다 마른 땅에 물을 주었다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 죽음에서 깨어났다
깨진 그릇
그릇을 받쳐 든 자와 화살을 쏘는 자 비를 내리는 자 정의를 부르짖는 자
선의는 흰 옷을 입고 있다 옷이 금세 더러워진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자 울먹이는 자
설탕 한 자루와 딸기나무 아이는 솥을 젓고 있었다 나비가 날아왔다 날개를 접으면 종이가 되는
신의 무료와 종이접기 양면 색종이의 보색과 보호색을 가진 동물들 아름다움을 숨기기 위해 왕은 하나뿐인 딸을 종탑에 가두었다
화살 두 개가 날아왔다 운명의 장난처럼 죽은 자의 이마와 산 자의 손등에 피가 화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시덤불에 방울방울 맺힌 산딸기들 메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소리쳐 부를 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꿈속에선 언제나 멀어지는 누군가가 있었고

백진희 l
2021년 《포엠포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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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공시사의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