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충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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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말리지 않는 맛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텀블러에 빨대를 꽂아
입을 갖다 댈 때까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 짧은 시간에도
라면은 불고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생명체가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어!’
나에게 텀블러를 준 너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천장과 잠시 친구가 되기 전에
불어터질 뻔한 라면과 입을 맞췄다
라면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점점 사라지지만
나는 라면이 있어서 사랑을 다시 짚을 수 있었다
나에게도 여전히 백지 여러 장이 남아있었다
샤프심을 괜히 부러뜨리면서
무슨 맛인지도 알지 못한 텀블러의 비밀을 파헤쳐보다가
여러 번의 실패가 생긴 뒤에는
손가락을 일일이 세어보기도 했다
열 개인 걸 알면서도
밖에는
내가 맛 본 적이 있는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아무 맛도 없었다
시원하고 청량했다
안경을 먼지가 뒤집어씌우도록
비가 멈추지 않는 여름이 올 거라 믿으며
나는
너에게 텀블러를 다시 건넸다
우여곡절을 겪고 싶어서
이상하게도,
우리의 지금
질펀하게 새어 흐르는 비밀이 있었다
똑바로 보고 싶어서 안경을 구했어 너는 뭐 하면서 지내니? 난 이제 밖에서도 조그마한 글씨도 잘 보여 그래서 여태껏 잘 안 보였던 곳으로 가다가 내가 보았던 모든 것들이 원래 저랬다는 걸 깨달았지 지금은 창문 앞이야, 밖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풍경을 생각하다가 멀리 서 있는 가로등만 보고 있어 그새 내 몸에도 누가 나 모르게 구멍을 냈는지 며칠째 들고 온 신문지가 점점 너절해지고 나는 애써 창문을 다시 닫으려다가 어떤 빗방울을 잡았는데 아주 작은 크기인데도 누군가를 크게 집중시킬 수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언젠가 너에게도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구멍이 내 무의식에도 뚫리는 순간, 나는 너한테 안경을 쓴 소감을 물었는데 너의 대답은 불안정한 심장박동수로 대신했지 갑자기 꺼졌다가 밝아진 형광등 아래, 홀연히 여행을 떠난 너에게 이제야 안부를 묻는다
네가 있는 거기는 어떻고, 거기의 너는 괜찮니?

이충기 l
2020년 《사이펀》 등단. 시집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최소한의 안녕』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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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공시사의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