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오세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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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도서출판 서정시학
출간일 2022년 4월 29일
196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오세영 시인의 신작 시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혹은 사물이 쓰"는 것이라는 그 자신의 말대로 일상과 사물, 세계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시 쓰는 일은 내게 영원을 지향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시인의 말처럼, 영원에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영원에 도달하려고 분투하는 시인으로서의 역정(歷程)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를 왜, 언제, 어떻게 쓰는가 하는 시인의 시론과 함께 그 과정의 오롯한 결실로서의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는 시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그렇지만 시를 쓸 때만큼은 내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었습니다. '나'에 의해서 세계는 의미를 갖게 되고 '나'로 인해서 세계는 그 관계가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의미의 생산자 즉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연유로 나는 저 자신을 홀로 골방에 가두어놓고 시 쓰는 일에 몰두해 왔습니다.
시 쓰는 일은 내게 영원을 지향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 없이 이 허망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바라는 그 영원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원에 도달하려는 노력 없이 이 세상을 살 자신이 없으므로 나는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즉 시 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시인의 산문」 부분
"언어는 원래 신령스러워
언어가 아니고선 신神을 부를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영원永遠을 알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생명을 감동시킬 수 없나니”
ㅡ 서시 「아아, 훈민정음」 中
이명(耳鳴)
너 어디서 우는 것이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운다.
백지를 앞에 놓고 단정히
무릎 꿇어 참회하는 밤,
제대로 한번 외쳐보지 못한,
제대로 한번 통곡해보지 못한
이 한 생을 내 시여, 너는
용서해선 안 된다.
계절은 이미 기울었는데
온 세상
하얗게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하는데
이제라도 광야에 나가 한껏
외쳐야 한다는 것이냐.
밀실에서
실컷 통곡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냐.
이 늦가을 밤
섬돌 밑 아닌, 들창 틈 아닌
실은 내 귓속에서 우는 그
귀뚜라미 한 마리.
바람의 시
머나먼 서역(西域), 한겨울의 고비[戈壁]에서는 산후 우울증에 걸린 어미 낙타가 갓 낳은 제 새끼의 수유(授乳)를 거부하며 홀로 칩거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 궂은 기후 때문이다. 그럴 적에 유목민은 마두금(馬頭琴) 하나를 그의 목에 걸어주는데 바람이 연주하는 그 악기 소리에 점차 마음이 누그러진 어미 낙타는 처음엔 그렁그렁 눈동자를 적시다가 종내는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제 새끼 찾아 품에 안고 따뜻이 젖 물린다 들었다.*
아아, 잘못 살아온 한 생이었구나.
새 집을 지으면서 나도 처마에
풍경(風磬) 하나를 매달아 놓았다.
바람이 쓰는 시.
*유목민들은 이를 후스(Hoos) 요법이라고 한다.
해킹
옛 우리 선조들은 하늘로 가는 통신 수단에만 집착하였다. 그래서 수천 년 동안 비둘기나 전깃줄을 이용했거니 그러나 영악한 현대인들은 이제 발아래 지하도 생각해 냈구나. 땅 밑으로 굴을 파서 통로를 내 벽을 뚫고 담을 타는 그 민첩한 발놀림. 닫힌 공간도 아무렇지 않게 잠입, 침투하여 숨은 정보를 탐색, 수집, 전달해주는 메신저란 실상 쥐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러나 아직도 옛 선조들의 곳간(庫間)을 털던 습성은 잃지 않은 듯 오늘 어느 쥐 한 마리가 내 인터넷 뱅킹을 해킹하여 슬쩍 기백만 원을 훔쳐가 버렸다.
인류의 대소망, 드디어 쥐의 가축화에 성공! 이제 인간에게 사육되어 거실이건 사무실이건 작업장이건 가가호호 제멋대로 설쳐대는 그 미키 마우스.*
*컴퓨터 커서를 움직이는 기구.
빙판길
사랑이 굳으면 꽃이 되듯
증오는 굳어 얼음이 될지 모른다.
추상(秋霜)같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가슴이 얼어붙어
ㅡ 팍 ㅡ
금이 간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오늘의 날씨는 강추위,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냉기류로 온 세상은
하얗게, 하얗게 얼어붙었다.
조심해서 걸어라. 빙판길이다.
삐끗 미끄러지지 말고 풍덩
웅덩이에 빠지지 말고……
같은 물도 흐르면
꽃이 되지만 제자리에서 굳으면
얼음이 된다.

저자 소개 ㅣ오세영
1965-6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 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 저서 『한국 현대시인 연구』 『한국 현대시 분석적 읽기』 『한국 낭만주의 시 연구』 『시쓰기의 발견』 등이 있음. 〈목월문학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