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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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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일요일 044

가만히 있어도 되는 날입니다 | 신혜정 시집

펴낸곳 시인의일요일

출간일 2026년 03월 18일

 

 

 

 


 

시인의 일요일 044.

 

2001년 《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한 신혜정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

이번 시집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찰나 속에 영원이 깃들고 영원이 다시 찰나로 돌아오는 독특한 감성으로 가득하다. “아득하거나 너무 가까움이 문득 아찔하다는 생각 순간이 곧 영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바라보다」)처럼, 시인은 익숙한 것들의 너머를 바라보도록 이끌며 현대 사회에서 잊힌 것들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시인은 “영영 눈멀어 보시겠어요? 영원을 보시겠어요?”(「엑소포니」)라고 묻는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을 감각하도록 당신을 초대하는 마녀의 질문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시인이 창조한 ‘뒤틀린 질서의 집’이라는 독자적인 세계관이다. 이곳에서는 중력과 방향이 사라지고(「무중력 쇼」), 파괴가 새로운 질서가 되며(「플루토」), 탄생과 죽음의 순서마저 뒤집힌다. “생에서 생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물에서 물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숨에서 숨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아가미」) 같은 존재론적 질문들이 당신의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신혜정 시인은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 언어 이전의 상태, ‘엑소포니’로의 변이를 시도한다. 이는 생물학적 퇴행이 아닌, 결핍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는 급진적인 진화이며, 시인의 깊은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이 독특하고 기이한 세계가 기존의 가치와 세계에 갇힌 당신을 무너뜨리고 영원의 질문을 던진다.

 

 

 

 

눈멀어야 입장 가능한 영원의 집

 

 

신혜정의 시집은 영원과 찰나의 목격자인 그의 화자들이 분기(分岐)하는 집이다. 사라지거나 지워지거나 잊히거나 흘려보내지거나 지나쳐버린 고아 유령들이 찰나를 비집고 영원의 틈에서 말을 거는 집. 시인은 자신의 몸을 영원과 찰나가 교차하는 성으로 내어주고, 한때 자신들이었던 화자들을 머무르게 한다. 이 집의 거주자들은 이미 죽은 자이며 죽어가는 자이고 죽음으로써 죽어감으로써 산 자, 살아가는 자다. 우리는 그 집으로 진입하면서 영원과 찰나의 관계망 속으로 연루된다. 하지만 저 집으로 입장하기 위해선 몇 가지 경고음을 숙지해야 하낟. 이는 첫 번째 시 「편지ㅡ에필로그」 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시인이 규정하는 세계의 질서는 이처럼 몇 가지 법칙을 따른다. 경고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머뭇거려야만 한다. (중략)

신혜정의 시집을 덮으며 우리는 다른 밀도의 시간 속을 걸어간다. 죽어 다시 태어난다. 영원은 그렇게 우리와 악수를 한다. 영원은 멀어버린 눈을 뜨며 말할 것이다. 나는 끝도 없이 타오르는 집 한 채에서, 끝내 오지 않을 너의 노크를 이미 듣고 있었노라고. 신혜정은 긴 기다림을 상형문자로 각인한다. “영원히 / 뒷모습으로만 남는 / 부조가 될 것입니다.”

 

― 김유태(시인 · 문화부 기자)

 

 

 

“혹독한 겨울이었다

잔가지를 쳐내자

상처에서 잎이 돋았다

봄의 한가운데였다.”

 

ㅡ 「시인의 말」中

 

 

 

 

 


 

바람의 집

 

 

 

모래바람이 불어와 꼼짝없이 게르에 갇혀 있습니다. 여과 없이 훅, 들어오는 자연의 움직임과 불안정한 통신에 기대 희미하게 안부를 묻습니다. 모스부호처럼 짧고 명확하게. 그러나 무엇을 전할까요. 바람에는 지평선 너머에서 도착한 말들로 가득합니다. 풀을 뜯던 수다스러운 양의 일상, 갈퀴를 휘날리는 말들의 이동, 평원을 가로지르던 영양의 발자국, 언젠가 당신이 남긴 약속의 말이 도착합니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소식은 흐릿하지만 그것을 어렴풋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기억을 이 바람이 어렴풋이 실어옵니다. 와해된 기억들이 게르의 천장을 흔듭니다. 바람의 가장자리가 펄럭입니다. 온통 둥근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끝도 시작도 없는 평평한 세계의 중심에 나는 다시 둥근 집을 짓고 스스로 갇힙니다. 여과 없이 훅, 들어온 당신에게 온통 마음이 빼앗기던 그때처럼 중심을 잃고 흔들립니다. 비포장도로를 매끄럽게 지나온 바람의 울퉁불퉁한 상처는 누구에게 가 닿을까요. 덜컹거리는 문틈에도 바람의 살이 베입니다. 아주 오래된 슬픔이나 애써 잊었던 상처 같은, 어렴풋한 것들이 지나갑니다. 훗날의 우리는 오늘 날려 보낸 바람의 통각을 기억할 것입니다. 너무 오래돼 와해되기 직전 구름의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불이 나기를 기다려 발아하는 쉬오크*의 솔방울에 오늘의 바람을 담습니다. 뜨거운 생의 한순간을 위해 백 년 천 년을 품는 오랜 기다림으로 모스부호처럼 짧고 명료하게 나는 오늘, 타오르는 중입니다.

 

 

*섭씨 200˚C 이상으로 타오를 때에만 발아하는 나무의 일종.

 

 

 

 


 

하품

 

 

 

오늘은 지루해도 내일은

눈물 나게 좋을 거야

 

방금 하품을 마친 내게

당신이 말했지

 

잠깐의 무료함을 달래느라

손톱을 깍던 나는

 

그거 눈물 나게 좋은데

라고 말했지

 

눈물을 훔치며

 

 

 

 


 

얼음의 집

 

 

 

먼 곳에서 안부가 도착합니다

사방이 막힌 이곳은 그러나 투명합니다

 

당신의 안부는 조명처럼 너무 환해

잠깐 눈을 감습니다

 

동공이 수축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이 조금 흐릅니다

 

눈앞에는 모두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반짝입니다

쇼윈도에 걸린 마네킹처럼

나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운 이의 번호를 눌렀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올 때의 허무처럼

닿는 자리마다 녹아 없어지는

그러나 이곳은 투명합니다

투명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바람에 얼음 알갱이들 실려옵니다

어쩌면 비로소 당도한 모래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잘 지내십니까?

몰래 썼던 일기장을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이곳에서 내 일기는

잘 전시되고 있습니다

 

시리고 투명하던 마음

닿은 자리마다 녹아내리던 당신의

안부가 켜집니다

 

가만히 백야의 해가 뜹니다

진 적도 없는데 다시 뜹니다 마음처럼

가려는 곳에 기어이, 햇살이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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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ㅣ 신혜정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라면의 정치학』 『여전히 음악처럼 흐르는』, 산문집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 『흐드러지다』가 있음. 본지 책임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