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진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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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시인선 26
그때 나는 아름다웠다 | 박진임 시집
펴낸곳 작가
출간일 2026년 01월 15일
작가 시인선 26.
2004년 《문학사상》에서 평론으로 등단한 이후 활발히 비평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는 박진임 교수가 첫 시집 『그때 나는 아름다웠다』를 출간하였다. 그는 “나는 ‘공연히’를 내 시세계의 상징어로 삼아 나만의 세계를 가꾸어 보려고 한다. 더러 내 시가 건조하거나 딱딱하게 되더라도 나는 정확한 근거나 이유가 있는 것만을 말하려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 경험과 기억만을 표현하려 한다. 부풀리지도 덧붙이지도 말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에 이끌리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흐리지도 말고. 안개 속을 걷듯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며. 또 고통스럽더라도 내 시적 영토의 가장 밑바닥까지 파내려 가보려고 한다. 내 기억과 경험 속 아픈 부위를, 다시 한 번 아니 에르노의 표현대로, 칼로 도려내듯 파고들어 보려고 한다.”고 말하며, 1960년대생 한국 여성의 자화상을 진솔하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며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詩로 기록한 자화상
언젠가는 후회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말하려 한다. 미국 시인 앤 섹스턴의 시구처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외치려 한다. 그러나 나의 방식으로 이렇게 새롭게 부르짖고자 한다. "마침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나는 거칠더라도 정직한 방식으로 내가 살아온 나날들을 시로 남기려 한다. 내가 기록할 때에만, 내 기록을 밟고 누군가가 더 용감하게 일어설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더 멋지고 자유로운 삶, 더 조화롭고 아름다운 시대를 볼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 「자전적 산문」 부분
나는 나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을 그냥 스쳐 보내지 않기로 했다"
ㅡ 「자서」中
삼대
엄마는 스물둘에 나를 낳았고
나는 스물다섯에 딸을 낳았다
팔순, 환갑, 서른다섯
세 여자가 함께 걷는다.
세 자매 같은
세 세대가 걸어간다.
보릿고개 시절,
고기도 생선도 없는 멀건 미역국을 먹었던 우리 엄마.
가난한 유학생 시절,
빈민을 위한 배급 우유와 치즈를 먹었던 나.
또, 자유를 누리며
샌드위치 한 쪽 먹고 일만 하는 딸.
유속이 서로 다른 세 줄기 강물 위에 뜬
세 척의 배.
각자의 노를 부지런히 저어가며
나란히 물에 뜬
세 척의 배.
서로 멀어지지 않으려고 늘 살피는,
그 풍경.
꽃무늬 나일론 속치마
네 살 때
큰집에 찾아온 보따리장수,
꽃밭을 하나 어깨에 떠매고 왔다.
대청마루에 둘러앉은 할머니와 고모들 사이,
보따리 매듭을 풀자
나비 날개처럼 일렁이며 하얗게 얼비치는 하늘이 나타났다.
남해안 동백꽃 붉은 입술들,
막 터진 석류알처럼 알알이 배긴 그런 하늘,
어디선가 나비 떼가 몰려오는 듯,
신비한 향기조차 일었다.
나무꾼이 숨겨둔 선녀의 날개옷,
걸치기만 하면 전설처럼 두둥실 날아오를 것 같은데
네 살짜리는 가질 수 없다기에,
문고리를 잡고 돌아서서 울었다.
무지개 말고도 고운 것이 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날.
아름다운 것은 무지개처럼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처음 배운 날.
사이공 함락의 날
ㅡ 오션 부응의 시 「불타는 도시의 오바드」를 읽고
마침내, 베트남 대통령 궁에 탱크가 진입한 것은
미군 철수 48시간 뒤였다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추고---
어린 날 검두둥이 시절…"
라디오에서 미국 노래가 흘러나왔다.
"꿈속에 보는 화이트크리스마스."
그 노래가 탈출의 암호임을 아는 사람들은 대사관으로 몰려갔다.
헨리 키신저는 19대의 헬리콥터를 대기시켰다.
미국인 0000명, 미국에 부역한 베트남인 000명.
펜타곤이 준비한 명단은 정확했다.
19대의 헬리콥터는 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암호는 암호의 기능을 잘 실현하였다.
'켄터키 옛집'
'화이트 크리스마스'
탈출의 시각을 알리는 신호였다.
"돌아오렴"
"돌아오렴"
그날,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Voice of America)는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소리였다.
돌아와 켄터키 옛집에 가자꾸나.
돌아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함께 누리자꾸나.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추고---"
암호를 아는 자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켄터키에, 미국 땅에 집이 없었던 그들.
"꿈속에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꿈속에서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본 적이 없었던
아열대의 베트남 사람들.
그들에겐, 노래는 그냥 노래였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어디로 달려야 할지는 더욱 몰랐다.
켄터키와 크리스마스,
베트남전이 끝나고 있었다.
십오 년, 격렬했던 연애의 밤은 그렇게 끝났다.
서로 엉겨붙어 피 흘리던 기나긴 밤이 끝났다.
오, 오바드(Aubade)!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그 노래들은 오바드,
연인들의 아침 작별 인사의 노래였다.
미 대사관 지붕 위에서
마지막 헬리콥터가 떴다.
켄터키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몰랐던 더운 지방 사람들이
날아오르는 헬리콥터에 매달렸다.
라디오에서는 마지막 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후렴처럼,
탄식처럼,
또는 원망처럼.
울음 섞인 메아리처럼.
"켄터키 옛집에"
"꿈속에 보는."

저자 소개 ㅣ박진임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등, 평론집 『두 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석사, 미국 오리건주립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