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건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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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국학자료원 새미(주)
출간일 2022년 7월 30일
1967년 《한국일보》 등단 이후 50여 년을 한결같이 시업을 일구어 온 이건청 시인의 시전집.
시인은 이번 시전집이 1959년 문청 시절의 작품부터 2021년 작품집의 시편들까지 “이제 시인으로 살아온 나의 소산을 모두어” 총망라하고 있음을 밝히며, 이번 작업이 “시 이외의 다른 가치를 더 높여 추구하지 않았으며, 시를 지니고 세상 풍진 쪽으로 가서 시가 아닌 가치를 탐하지 않았음도 부끄럽지만 밝혀”두는 일이라 쓰고 있다. 또한 자신이 “삶의 구석구석에서 직면하던 낙망과 좌절을 헤쳐갈 때, 시가 기쁨이고 희망이었음도 밝혀두어야겠다”고도 말한다. 책의 구성이 최근의 시집들을 앞에, 과거의 시집들을 뒤에 실은 것도 “현재의 나로부터 자신을 성찰해 보려는” 뜻이라 밝히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순정한 마음이 오롯하게 전해져 오는 이번 전집이다.
이건청의 시
진작부터 나는 이군의 참신한 시풍과 그의 타고난 남다른 시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보다 알찬 성숙을 기다려, 세상에 그를 소개하는 자랑스러운 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성숙에의 길고 긴 인내와 자기 완성에의 어수선한 과정을 거쳐, 이제 그의 광우리에는 잘 익은 과일로 그득하게 채우게 된 것이다.
그는 내면에 깊이 침잠하여, 현대정신의 위기와 심연을 의식의 심층에서 형상화하고 있었다. 불안과 방황, 좌절과 열등의식의 표상물로서 그의 작품은 오늘을 증언하는 심각한 문제성과 너른 공감권을 간직하고 있다.
― 박목월 시인의 「서문」(첫 시집 『이건청 시집』, 1970)에서
“시인으로 사는 일의 보람과
시 쓰는 날의 환희를 안겨준
모국어에 감사를 드린다.”
ㅡ 「시전집 서문」 中
별똥별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1광년, 9조 5000억km.
여름밤 질펀히 넘쳐나는 우리은하 밖
안드로메다 별자리까지는 250만 광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어느 빈터로
꼬리를 달고 스쳐가는
별 하나 있네
- 『실라캔스를 찾아서』(북치는마을, 2021)
곡마당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곡마단이 왔을 때
말은 뒷마당 말뚝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곡마단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갈 때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쫓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
날이 저물고, 외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말은 그냥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곡마단 곡예사가 와서 고삐를 풀면
곡예사에 끌려 무대에 올라갔는데
말 잔등에 거꾸로 선 곡예사를 태우고
좁은 무대를 도는 것이 말의 일이었다.
높고 좁은 등허리 위에서 뛰어오르거나
무대로 뛰어내렸다가 휘익 몸을 날려
말 잔등에 올라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곡예사는 채찍으로 말을 내리쳐
박수소리에 화답해 보였다.
곡예사가 떠나고 다른 곡예사가 와도
채찍을 들어 말을 내리쳤다.
말은 매를 맞으며 곡마단을 따라다녔다.
곡마단 사람들이 더러 떠나고
새 사람이 와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쫓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
-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서정시학, 2017)
늙은 시인의 초상을 위한 에스키스
짠 바다였네. 누구도 안 보이는 거기 암초가 있고, 그 암초가 그리움을 심해에 쌓고 있는 걸 알지 못했네. 암초 위에 이는 작은 포말이 암초의 마음인 것도 알지 못했네. 부서지는 흰 포말이 무인 등대 하나쯤으로 서서 해 뜨고 해 지는 세상 바라보고 싶은 암초의 마음인 걸 아무도 알지 못했네.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몰랐네. 무인 등대 하나 세우고 해 뜨고 해 지는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암초의 마음인 걸 알지 못했네. 암초 하나 짠 바다에 잠겨 있었네.
- 『굴참나무 숲에서』(서정시학, 2012)
말향고래를 찾아서
ㅡ 내가 처음 만난 말향고래
광화문이었다. 경무대로 가자고, 선두가 외치고 있었다. 말향고래야 가자. 그래, 눈 감으면 안 된다. 가자. 말향고래야,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순정이 물결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순백의 교복과 교모 속, 고등학교 3년 소년이었다. 교문을 타 넘고 있었다. 출렁이고 있었다. 태평로 대로변 휴지를 찍어내던 신문사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방파제 밝은 파랑이 파랑을 몰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연초록 잎새들이 박수와 환호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광화문 복판을 지나 중앙청 쪽으로 달려가면서 경무대 쪽에서 울리는 수백 발의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총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피에 젖어 쓰러지는 대로에서, 학생들의 대오가 진짜 말향고래로 변하는 것을, 용연향과, 머릿속 경납까지 온전히 지닌 진짜 말향고래가 된 후, 낡고 질긴 대낮을 밀며 헤엄쳐 가는 것을.
-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동학사, 2010)

저자 소개 ㅣ이건청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경기 이천 출생.
시집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망초꽃 하나』 『하이에나』 『코뿔소를 찾아서』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반구대암각화 앞에서』 『굴참나무 숲에서』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실라캔스를 찾아서』, 기획 시집 『로댕ㅡ청동시대를 위하여』, 시선집 『해지는 날의 짐승에게』 『움직이는 산』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이건청 문학선집』(전4권)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한국시협상><목월문학상><김달진문학상><고산문학대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