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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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효숙 

 

 

 

 

시 미학으로 삶을 감당하는 일

     

● 김효숙

 

 

 

 

   

  1. ‘이후’들  

  

  첫 문장을 “자연은 좋겠다”라고 쓴 시를 읽었다. 대상 앞에서 무력해진 시인의 자조 같기도, 탄식 같기도 하다. 이어지는 문장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나의 집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들이 불에 탔다”[「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시결》 2025년 가을호]에서 이 탄식의 이유가 구체성을 입는다. 자연과 인간의 마을 간 분리선을 두지 못하므로 화자는 자연재해를 인재라 여기며 인간인 자기에게 벌을 가하고 있다.

  산불 같은 자연재해는 스크린 처리로 실재의 공포를 가공하는 까닭에 실감이 나지 않는 시적 제재다. 스펙터클이 실재를 압도하므로 그렇다. 그럼에도 위의 시는 최근 시에 담긴 시인들의 경험 중 단연 실감을 더하는 지구 가열화에 산불이 더해진 극한 상황을 타전한다. 허구의 미학을 앞세워 체험을 무효화하지는 않으면서 생생한 감각으로 경험을 버무려내고, 인간의 마을 깊숙이 침공한 기후 위기를 체화한 언어를 구사한다.

  이렇게 삶의 구체성을 언어화하는 시를 보면, 시적 상상력과 실재―사유와 체험―는 분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첨예한 오감의 소지자이기에, 삶과 생활이 상호 침투하는 영역에서의 언어 활동인 시에 자신의 경험이 자연스레 스며들었을 것이다. 세계무상을 절감했음에도 시인을 긴장시키는 ‘시’가 그를 비탄에만 빠져 있지 않게 반동하는 힘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살아 있는 시 자체의 언어로 몸소 시가 된 시인이다.

  지난 봄철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을 때부터 종전과 다른 규모와 열감에 놀랐었다. 이어지는 여름은 ‘덥다’는 형용사 하나가 그 계절에 통용되는 모든 어휘를 평정할 정도였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을 넘어 인류세의 모럴을 사정없이 일깨웠다. 인간 생명의 역사를 지구 생명의 역사 속에서 일궈 왔다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인류 조상이 자연에 손상을 입혔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러나, 인류가 문제이지 지구는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 앞에서는 우리의 의식이 급선회한다. 인류에 종말이 닥친다 해도 지구 생명은 변이를 거치며 인간과 별개로 존속할 것이므로 그렇다. 따라서 지구 생명과 인류 생명을 아우르는 ‘자연’이라는 말로는 전 지구적 기후 변화의 문제 같은 것은 풀리지 않는다. 요컨대 자연/인간을 이분해 놓고 어느 한쪽으로의 포함 원칙에 따라 자연을 우위에 두느냐 인간을 우위에 두느냐 하는 식 말이다.

  잠시 이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선은, 이전(pre)의 자연은 야생이고, 이후(post)의 그것은 야생이 사라졌거나 소멸한 상태라는 점. 이는 인류세 개념으로 접근하여 인간 존재론을 지구 생명의 일부로 보는 경우다. 인간의 손길과 발길이 닿는 곳의 자연이 변형되면서 더 이상 야생일 수 없는 상황을 이른다. 다음은, 인간의 영향력과 무관하게 자연이 사멸했거나 진행 중이라는 점. 이 경우를 설명하기 위한 합성어인 ‘포스트자연’이 인간의 영향력 바깥에서 소멸해 버린 야생을 일깨운다. 인간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까지도 죽음 직전까지 왔으며, ‘이후’의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전’의 자연과 현격히 다른 상태일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빙하·열대림·남극 같은 야생이 ‘이전’의 그것이 아님을 통렬히 지각한다. 신화의 시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던 자연이 그 신화를 급속히 탈각하기 시작한 시점과 화석 경제의 급진전은 동일 선상에 있다.

      

  2. 유구한 자본  

  

  김이듬 시인은 어느 대담에서 “여름날의 싱그럽고 풍성한 안부를 전하고” 싶다며 상냥하게 첫말을 건넨다. 뒤따르는 표현인 “생을 억누르는 필연적 조건들”1)에서 어쩔 도리 없이 현실과의 불화를 노출한다. 내면의 고통을 직접 발설하지 않고 밝은 감각을 지니려는 의지를 흐리는 저조한 기운이 읽히고 만다. 맹렬하게 타 들어가는 집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시인을 구하는 것도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성을 지닌 모든 것이 전소했으나 몸만 잔재처럼 남아 그 안타까움을 시언어로 옮기면서 언어 잔존감마저 의심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는 시를 쓰고 있다. 그중 마지막 연이다.

 

  친구들은 내게 말한다 힘내라고 극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친구여 삶은 극복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닌 것 같네 덮쳐오는 불길을 무너지고 쏟아지는 흙더미를 갈라지는 자신의 복부를 마주한다면 배부른 소리 경이로운 미학적 세계나 창조하게나

― 김이듬, 「생활과 시」(《시결》 2025년 가을호)

 

  오묘한 비유를 구사하지 못할 만큼의 고통을 오장육부가 찢기는(“갈라지는 자신의 복부”) 감각으로 언표한다. 이전부터 세워 온 “언어의 집”을 “사치”로 여기는 사태가 급습하면서 ‘기관 없는 신체’가 된 듯 보인다. 자연이 무력감을 안기고 있으나 도리어 자기에게로 환원하는 성찰적인 발화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전경화한다. 기후 변화의 직접 원인 제공자가 아닌데도 정작 누구보다 먼저 피해자여야 하는 지구 어느 지역의 취약한 공동체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자리에서 시인은 말을 한다.

  집과 돈, 추억과 시집이 불쏘시개가 되어 자본 체제를 비웃듯이 타오를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작 갈아입을 속옷도 없어 시야가 환”해질 때 목도한 것은, 애초에 벌거숭이로 이 세계에 던져졌을 때의 자화상, 말하자면 자신의 본 모습이었을 테다. 만유의 포식자인 불이 그 대신에 자본을 뱉어내 주지 않는다면 화자에게 목전의 ‘진짜’ 위기를 극복할 방도란 것은 없어 보인다. 고도의 소비 패턴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욕구가 거대 경제의 윤활유가 되어 줄 때 양자의 순환 속에서 부흥하는 자본 체제를 멈춰 세울 방도를 과연 누가 획기적으로 마련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시현실의 화자는 “삶은 극복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테다. 자기 몫의 삶일지언정 거대 구조 속의 무력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친구들에게 “배부른 소리 경이로운 미학적 세계나 창조하”라고 냉소를 보내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이렇듯 뼈아픈 고통이 밀어내는 냉소의 미학을 용인해야만 우리는 악성의 조건에 포위되었음에도 화자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을 보냈다고 적은 구절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가없는 관용이 그에게 현실을 이겨 낼 힘을 부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사태로부터 고통의 이유를 타자에게 전가할 수 없는 인류 공통의 아픔을 껴안게 된다. 기후 위기라는 생생한 위험이 이 시대인이 추구하는 안정과 행복에 위해를 가할 때 그것을 극복해야 할 적으로 타자화하는 현실 대응 방식은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미래가 굳건히 자본의 축을 중심으로 운행된다면, 기후 위기는 언제나 현재적인 지구 환경으로서 위협적인 것이 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군대 막사 같죠 어쩌면 후방에 설치된 야전병원처럼 보일 거예요 요즘 나는 건축물이 땅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공부하고 있어요 지면 위에 놓인 이 작은 조립식 주택이 나의 집입니다 아직 주소는 없어요

 

  읍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쌀부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참치캔과 김도 있네요 나는 손이 떨려서 쌀을 쏟았지 뭐예요 움푹하게 뚫린 마음 사이로 사근사근한 번민이 날벌레로 올라와요

 

  신이 나를 사랑해서 나를 이재민으로 만들어주고 가설 건축물에 살게도 해주시네요 시에 쓸 얘기가 쌀처럼 떨어질까봐 파란만장 상상 초월 상황도 주시고요 나는 요즘 사람이 사람과 어떻게 이어지며 관계를 맺는지 공부하고 있어요

 

  폐사지 같은 움푹한 공터에 똑같은 열두 동의 조립식 주택 중에 맨 마지막 집이 제 집입니다 나는 이따금 땅에 누워 하늘을 보죠 별자리를 점치고 내일 날씨를 예보하는 업무를 맡은 사람처럼 큰 장마가 오면 주택들이 물에 휩쓸릴지도 몰라요

― 김이듬, 「오지의 건축물」(《시결》 2025년 가을호)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이가 있다. “신이 나를 사랑”한 대가가 “이재민”이며 “가설 건축물”이라 여길 만큼 심리적 내면 파손의 정도가 심각하다. 이 역설의 진실은, “파란만장 상상 초월 상황”이라는 거짓말 같은 극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건축물과 땅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이후에 “큰 장마” 같은 기후 충격이 가해진다면 가설 건축물이 휩쓸려 갈지도 모른다며 미래의 위험까지도 앞당겨 자기화한다. 트라우마에다 프리트리우마(pretrauma) 증후군까지 겹쳐 미래를 지레 앓게 되었다. 신변의 불안을 내면화한 채 살아가야 할 “열두 동의 조립식 주택”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탐구하게 된 내면에는 어느덧 동류 감정이 자리한다. 자연의 위력에 대응하기 위한 인위적인 무장이 무용한 현실 바탕에서도 살아갈 힘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주체는 같은 처지의 사람뿐이다.

  현실 원칙에 제압당한 화자는 지금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주술을 걸어보는 일이 허황한 공상만이어선 곤란하게 되었다. 주소도 없는 “조립식 주택”이 “오지”로 나앉은 풍경은 또 다른 재해에 취약한 구조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부인할 수 없는 최고도의 고통 속에서 이 인류세는 어떤 희망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모든 불행은 개인을 스스로의 힘에 기대게 할 뿐이고, 모든 희망은 아래로부터의 가능성이 아니고선 품어볼 수조차 없는 것일까. 개인의 기후 행동이 지금까지의 삶을 대대적으로 전환하는 실천 행위여야만 가능한 규약을 과연 누가 먼저?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실행하느냐는 문제를 뚫고 나갈 방법부터 마련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시인은 ‘나 하나쯤이야’를 폐기하고 ‘바로 나’라는 감각을 현실화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의 출처는 과학이나 사회학일 테고, 기후 행동은 철저히 개개인에게 전담될 것이므로. 이 시를 읽는 모든 ‘나’들을 포함하여.

    

  3. 열기의 유산  

    

  강철과 콘크리트로 세운 문명 도시에서 외부의 침공자를 차단하며 살아가는 인간. 이곳이 더 이상 도망칠 데가 없는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구 온난화가 흔적도 소리도 없이 가열화로 치달으며 불량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경고가 반복될수록 우리의 의식이 무감해진다는 게 더 문제다.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또 다른 자아가 우리에게는 있다. 아래 시는 환상과 결합한 상상력의 자극을 동원하여 우리의 불감증에 불침을 놓는다. 지구 온도가 급속히 임계점에 도달하더라도 적응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자들에게 지구는 결코 인류 생존의 장소일 수가 없다는 점을 폭로한다.

 

여름 바깥에서 노동자 / 눈 뜨지 못하고

 

내가 살던 마을의 여자들 / 할 말이 점점 없어졌다

 

남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몇몇 / 가장들도

 

곧 무너질 구역에서 / 고양이 / 나가지 않았다 귀신이 된다는 걸 알려야 / 하는 걸까

 

서로 / 헐뜯지 않았단 걸 확인한 밤엔 / 헐뜯을 것조차 타버린 걸 확인한 밤엔

 

먼저 도망친 사람들은 / 도망쳐 나온 사람에게 / 얼음과 과일 맛 음료를 담은 잔을 / 권하기도 하였다

 

구해놓은 잘 곳 한 구석을 / 숨을 곳으로 / 내어주기도 하였고

 

새벽이면 / 교회에선 예배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 돌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하지 / 않아도 되었다

 

새 여자들을 위해 / 남은 축복 찾아 모두 넘겨주는 여자들이 / 채소를 다듬고 권했으며

 

아이나 개나 애인들을 향하여 / 기울어진 어린 여자들은

 

새 축복을 반쯤은 남겨두고 / 쪽잠에서 바삐 깨어났다

 

오래된 소파에 모로 / 누우면 나는

 

은빛 원피스를 입은 / 문장

 

반질반질하게 닦이고 삭아가는 / 노래로 바꾸고

 

젖은 먼지를 닦아내는 / 폭염의 밤

 

홀로 죽지 않으려고 / 성실해지는 사람이 숨을 고르고 / 보이는 별을 본다

 

홀로 지워질 걸 예상하면서도 /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끼는 아이가 있다고 들었다

 

먼 곳 남겨진 / 무게를 끌어오는 노동의 / 물과 불의 슬픔

 

내가 태어난 건 / 기이한 사랑을 새로 / 만들라는 이유가 아닌데

 

반짝이는 밤의 도시가 저기서

 

타고

 

조금 떨어진 마을에선

 

새 여자들이 / 서로의 이야기를 재차 / 남기고 / 그런 / 자신을 향한 애도를 미리 허락해두는 날들

 

풀에 손이 베인다 갈수록 / 거세어진다 여기로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먼 곳의 사람들이 / 보내왔다

― 윤은성, 「기이한 은빛과 초록의」(《문파》 2025년 가을호)

 

   “폭염의 밤”에 기름을 붓듯이 도시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서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 불타는 구역과 그 바깥의 구역, 도망친 사람들과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혼재하고, 성소인 교회는 구원의 장소로 외로이 존재한다. 의지처를 찾는 어리고 약한 존재자들, 곧 무너져 내릴 집들, 미처 도망치지 못하여 잔류 중인 이들이 있다. 그 와중에 화자의 정체는 자명하지가 않다. “은빛 원피스를 입은 / 문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불난 도시를 원격화한 글쓰기 주체일 수도, ‘불’일 수도 있는 다중 정체성이다. “기이한 은빛과 초록의” 그 무엇일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할 뿐 지시어는 표류한다.

  앞에서부터 상황을 조립해 보면, “여름 바깥에서 노동자 / 눈 뜨지 못하고”에서 노동자는 여름 바깥에 처해 있다. 할 말을 잃은 “마을의 여자들”, “몇몇 / 가장들”, “고양이”가 화재 구역에 남아 있으며,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모두가 절박한 상황이다. 노동자가 ‘여름 바깥’이라는 은유와 결합하여 의미화하는 지점을 보면 그는 이 상황에 ‘적응 가능한 범위(Goldilocks zone)’의 바깥에 처해 있다. 말하자면 인간이 견뎌내기 어려울 만큼 한계를 초과한 열섬이 된 도시는 이미 골딜록스 존 바깥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노동자를 보건대 시인은 이 인물을 내세워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의 열기를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폭염과 불이 만난 화염의 시너지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몸을 움직이거나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 “아끼는 아이”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타자에게 먹일 채소를 손질하는 여자들이 있다. 마지막 시간이 닥쳐서야 헐뜯기를 중단하고, 사랑이 기이하게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새 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남기면서부터 도시를 덮친 대참사가 종말 이미지로 비등한다. 이 여자들이 마지막 사람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이 시는 이야기 전승자의 마지막 시간에 초점을 맞춘 아포칼립스를 방불케 한다. 환상처럼 엮어 인간의 최후 시간을 실감 나게 전하는 이 시에서 읽히는 것이 단지 허황한 상상력이 빚어낸 종말 이미지로 그친다면 시의 효능감은 추락하고 말 것이다. 환상을 주입해야만 간신히 현실을 감각하고, 그 위험성을 간단히 일과성으로 처리하고 마는 우리로서는 얄팍한 의식으로라도 다음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

  정체불명의 주어 ‘나’를 모종의 ‘불’이라 지목하면 비로소 시 제목의 “기이한 은빛과 초록의” 대치 상황이 현실감을 높인다. “오래된 소파”가 최초의 발화 지점일 수 있는 불은 애초에 “은빛 원피스를 입은 / 문장”처럼 차갑게 빛나기를 꿈꾸었던 인공 빛의 어떤 기전일지도 모르겠다. 타 들어가는 도시에 “남겨진 / 무게를 끌어오는 노동의 / 물”은 사력을 다하여 화재를 진화하려는 누군가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미력하기만 하다. “풀에 손이 베인” ‘불’이 화를 돋우며 화력을 높이고 있어서 가녀린 풀들이 거센 화마의 저지선이 되어 줄 수도 없다. 불타고 있는 도시에서는 “살고 싶다”는 비명만이 “먼 곳”의 소리로 허공을 맴돈다. 은빛 문장이라는 비유가 가능한 어떤 불이거나 전기가 “반짝이는 밤의 도시”를 덮칠 만큼 점점 위력을 키워가는 도시의 최후를 우리는 사실인 양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떠한가.

 

자본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자본도 사라지지 않아

서울은 여전히 어딘가에 있고

 

서울에 비가 내리면

서울과 남극이 구분되지 않고

천천히 녹아가는 사탕처럼

혀끝에 남는 단맛 그리고

 

천천히 잠긴다

― 강성은, 「도착」(《문파》 2025년 가을호) 부분

 

  우회하지 않겠노라는 강성은 시의 리얼리티 한 도막에서 지구 가열화는 진보를 멈출 수 없는 자본 주의의 궁극이다. 남극에서 북극까지, 서울에서 오지까지 유동하는 자본의 역학에 점령된 세계에서는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내린다. 마르크스가 근대의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자본주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고 진단한 이후, 이 시에서 강성은은 그 유령으로 하여 자본 도시인 서울과 극지인 남극의 기후를 차별화할 수 없게 된 정황을 상상한다. 극지의 거대한 빙하가 녹아 해양으로 잠겨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선연히 밀어 올린다.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숭앙하는 인류의 물질주의 사고를 전면화하기도 한다.

  시인은 특히 “노동자”의 사라짐과 남극의 변화상을 같은 위치에서 주목한다. 모든 불변하는 가치들이 거대자본의 유동성으로 통합되면서 본연의 성질을 잃고 변형된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앞서 본 윤은성의 시에서 화재 진화에 나선 노동 주체가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오면서 무섭게 번지는 불과 사투를 벌이는 것과 다르게, 강성은 시에서 노동자는 “기계”로 대체된 노동의 세계에서 본래의 노동자가 사라지는 정황을 이야기한다. 본모습에서 벗어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전변하는 세계에서도 자본의 능력은 굳건하지만, 기후 변화의 위기감 앞에서만은 누구나 평등하리라는 전언. 만물의 기원이 빛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을 믿는다면 그 빛이 곧 열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두 편의 시는 암시한다.

  또 다른 시인은 가난과 죽음을 동일화한 시 「가난 도둑」(임경섭, 《시와산문》 2025년 가을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가난을 훔친 자는 결국 / 진정한 가난을 훔칠 수 없었기에 / 죽음 이외에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가난=죽음이라는 등호 성립을 모면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자본을 훔치는 일이다. 하지만 자본의 속도를 앞질러 가 훔치는 기술은 자본가 소유의 지식이 아니던가. 자본은 자본을 훔치며 비대해지지만, 가난이 가난을 훔치면 왜소해진다. 가난의 가난 훔치기는 죽음이지만, 자본가의 자본 훔치기는 이 사실이 알려질수록 남모르게 부러움을 키우며 속앓이를 하는 사람을 증가시킨다. “진정한 가난을 훔칠 수 없었”던 시적 주체에게 가난은 물성을 지닌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떤 진정성, 말하자면 시인이 썼듯이 가난 중에도 사랑의 역사를 쓸 수 있었던 일을 되풀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이기도 할 테다.

 

쉽게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미래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휴가를 갔다

당분간 편하게 쉬고 싶어서

 

앞으로 날씨는 더욱 무더워지고

이러다 인류가 사라질 거라는 예상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동안

 

집착을 버려야 괜찮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미래는 생각했다

일정한 해안선과 높이를 잊어버린 물결처럼

 

하지만 햇볕은 너무 뜨거웠고

여름은 날씨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계절로 변했고

 

이대로 살기는 힘들 것 같다며

더 이상 희망을 갖기 어렵다며

 

겨울이 긴 곳을 알아보거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계속 미래를 찾고 있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군

 

가능성을 좋아하는 미래는 다시 돌아가

겨우 버텨야 하는 누군가의 여름이 되었고

새롭게 세운 누군가의 계획이 되었다

 

어느 곳에든 미래의 자리가 있었지만

이미 다 알겠다는 듯

 

멀리 보는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 정영효, 「지금은 없다」(《시산맥》 2025년 가을호)

 

  “지금은” 없는 것이 예전에는 있었다. 하지만 여기가 “미래”인데도 어쩐 일인지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름은 날씨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계절로 변했”다는 시인의 직관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감내했던 계절 일기의 한 도막처럼 익숙하다. 시인이 적고 있는 미래가 이미 현재를 침탈하고 있으므로, 예견된 미래의 현재화에 어느새 도달한 자의 기록으로 이 문장은 다시 읽힌다. 예견할 필요조차 없이 앞당겨진 미래를 사는 우리로서는 부단히 사라지는 현재를 견디는 일만이 하루의 과업이 되었다.

  그럼에도 계속하여 미래를 찾는 무리가 있다. 미래라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습적 사유를 되풀이하는 이들. 가능성 하나만은 기어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낙관적 꿈꾸기를 거듭하며 미래라는 것을 만든다. 미래가 이미 현재가 되었기에 그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미래는 새로이 돋아나야만 하고, 계획을 세워 미래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기에 새로운 세계를 건립하리라는 포부를 결코 현재의 난관이 몰수하지는 못한다.

  반면에 “멀리 보는 사람들은 함부로”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이 결구가 전하는 바처럼, 미래는 어디에나 있으나 이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는 이들은 미래에 다녀오기라도 한 것 같은 현실주의자다. 이상에 몰입된 자들에게 있어야 할 미래와 다르게 이들에게 미래는 변곡점을 둘 수 없이 직진하는 현재의 연장선이다. 그런 이유로 정영효 시에서 기후 행동의 주체는 미래에 기대를 거는 부류가 아닌, 지극히 현실주의자로 보인다. 그래야만 한다는 시대의 당위성을 담아낸 이 시에서 주체는 “새롭게 세운 누군가의 계획”표 앞에서 도달하지 않은 미래에 기대를 걸기보다 눈앞의 사태를 직시한다. 극단적으로 뜨거워진 햇빛의 열기가 과거 사람들이 행한 것의 누적으로서 유산이라는 점을 말이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 사람의 연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조용히 입을 닫은 채 그는 그렇게 한다.

    

   4. 하나의 실재, 각기 다른 생각   

 

  자기만의 탁월한 기후 적응력을 믿으며 미래로 도망치는 꿈을 꿀 수 있는 자 과연 누구일까. 생존 중인 모든 존재가 단 하나의 운명인 기후 위기에 공평하게 봉착했을 때 여전히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있는 근거가 더는 없어 보인다. 미래에는 이보다 더한 사건이 발생할 거라는 두려움조차 없는 이에게는 현재도 마찬가지로 미덥지 못한 환경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지구 가열화의 악영향이 미치는 최전선이 자본 경제의 주변부 계층이라는 말은 자연을 사물화한 근대 기획을 지목하는 발언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학자 노엘 카스트리(Noel Castree) 같은 이는 자연을 다르게 본다. 근대 기획이 진행되기 이전부터도 자연은 변형과 변경에 의하여 존속하는 것, 집단화했을 때만 그 현존을 믿을 수 있는 환영 같은 것, 실재적인 생물물리학적 과정이기보다는 하나의 관념이라고 적는다.2) 이 밖에도 자연을 담론적 구성물로 본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자립이 불가능한 사회적 구성물로 본 폴 와프너(Paul Wapner) 등은 자폐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연구자들이다(47~48쪽). 하지만 어느 쪽에 서든 지구온난화의 가속화는 무효가 있을 수 없는 실재다. 다만 누구든 하나의 실재를 놓고 다르게 표현하는 자유를 누릴 수는 있다.

  자신의 상상력을 초과하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허구의 미학으로 그것을 감당하는 시인의 긴장된 언어는, 최고도의 고통이 실존재를 관통하는 순간을 언표한다. 아주 작은 마른 풀잎들, 마른 나뭇가지들끼리의 부딪침, 플러그에 연결된 소파 위의 어떤 기전이 발화 지점일 수 있음을 말하는 시에서 우리는 사소한 존재들의 위력에 소스라친 뒤에야 그 있음의 이유가 후순위로 따라오는 경험을 했다. 또한 지금-여기에 없는 것을 영영 복구할 수 없다는 세계상실의 감각은 미래마저 소거한다.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려는 고투와 자본의 얽힘 속에서 노동 주체는 줄곧 자본의 외곽에서 실존의 불안을 내면화해 왔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자연과 분리되지 않는 자아를 껴안고 있었다. 기후 위기를 초래한 행위자 중 한 사람이기에 실재와 허구의 분리가 어렵기만 했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데려가는 방향 상실의 시가 아니라,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곳에 나를 세워놓는 시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전면화와 우회하기,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구사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가 태어나지만, 시적 진실은 이러한 기법을 뛰어넘는다. 그러니 ‘불’과 여름철의 열기가 만난 파국적인 기류를 그린 시인의 리얼리티 감각이 실재인지 허구인지를 판별하려는 시도는 이 현상을 방치하는 것과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원인을 다 알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지구 가열화라는 실재의 가중처벌이 심화하고 있는 지금-여기의 시인은 오늘도 급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가늠자를 대보면서 기후 변동의 원인에 예민해져 있으리라. 인간이 가닿은 적이 없는 자연이 변형되거나 사라지는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류세의 자세로 말이다.

 

 

                                    

    1) 김이듬 · 정다연 대담, 「시가 주도하는 삶」, 《시사사》, 2025년 여름, 한국문연, 22쪽.

   2) 안드레아스 말름, 김효진, 『이 폭풍의 전개: 뜨거워지는 세계 속의 자연과 사회』, 도서출판 갈무리, 2025.6, 44~46쪽. 이후 이 책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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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시의성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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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VOL.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