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연/시조의 향기
 
시조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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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일연 
완결여부 연재중 

   

 

   

 

  엉또폭포

                임태진

 

  매일

  울지 않는다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남편 둘 하늘 보내고

  아들 셋 가슴에 묻은

 

  구순의 노모 등 뒤로

  굽이치던 물줄기

    

   엉또폭포에 대해서 찾아본다.

 

  ‘엉또’는 ‘엉의 입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엉’은 작은 바위 그늘집보다 작은 굴을 의미하며 ‘도’는 입구를 표현하는 제주어이다. 엉또폭포는 보일 듯 말 듯 숲속에 숨어 지내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때면 위용스러운 자태를 드러내는 폭포로 높이 50m에 이르며 주변의 기암절벽과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폭포 주변의 계곡에는 천연난대림이 넓은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 있어 사시사철 상록의 풍치가 남국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평소에는 건천으로 있으며 산간 지역에 70mm 이상 비가 온 후 풍성한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ㅡ 한국관광공사 여행지 정보 《대한민국 구석구석》 부분

 

  엉또폭포는“평소에는 건천으로 있으며” “보일 듯 말 듯 숲속에 숨어 지내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때면 위용스러운 자태를 드러내는 폭포”라고 되어있다. 그러니 “매일 / 울지 않”고 나의 속을 “함부로 / 흘리지 않는” 어머니를 “엉또폭포”로 드러낸 것을 알겠다. 그러면 노모에게는 실상 매일 울며 지낼 수도 있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중장 “남편 둘 하늘 보내고 / 아들 셋 가슴에 묻은”에 그 이유가 드러난다. 어찌 한 사람의 일생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생각하기도 싫은 기구함이여! 아마 울음도 나오지 않을, 울음마저 잃어버린 여인 아니겠는가. 내 어머니의 일생을 한 되게 여겼었는데 여기 와서 할 말을 잃는다. 모든 문학 작품은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비록 시의 일이라고 해도 실제 이런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순의 노모”라면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겪은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구순의 삶은 험난한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생사를 가르는 한국전쟁과 희멀건 냉이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건넌 보릿고개 배고픈 시절,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위한 노동의 시대, 민주화 운동의 열망, 과학 문명과 정보화 시대까지 급변하는 세태를 살아온, 살아있는 역사의 삶이다. 노모가 겪은 생생한 삶의 그 현장, 그 급박한 정치적 혼돈의 와중에 제주는 잊히지 않을 큰 아픔을 겪었다.

  ‘4·3사건은 미 군정기에 발생하여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노모의 삶이 어떤 삶이었을지 제주의 지명, ‘엉또폭포’란 제목을 두고 유추해 본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ㅡ 제주 4 ⸱ 3 평화재단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 536

 

   시인은 이 아픔을 “남편 둘 하늘 보내고 / 아들 셋 가슴에 묻은” 노모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단 이 한 줄의 중장 안에서 많은 시인이 오랜 시간 구현하고 증언해 오고 있는 구구절절한 서사를 단번에 짐작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모는 “매일 울지 않”으며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함부로 흘리지 않는” 강인함을 지녔다. 어미로서 살아남은 목숨을 건사해야 하는 것이 우는 것보다 먼저 놓인 과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울지 않는 것으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모진 세파를 헤쳐 나가리라는 단호한 결심을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리라. 시인은 이러한 노모의 모습을 ‘엉또폭포’를 통해서 드러낸다. 자연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평소에는 건천이었다가 한바탕 비가 쏟아지면 위용스러운 자태를 드러내는“엉또폭포”의 물줄기는 대신 쏟아내는 노모의 피눈물인 것이다. 시인은 제주가 안고 가는 역사적 아픔과 그 아픔을 이겨내며 살아온 사람의 강인함을 제주의 자연 ‘엉또폭포’를 통해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구순의 노모 등 뒤로 굽이치던 물줄기”. 이 마지막 장이 주는 짧지만 깊고 강한 충격, 이것이 시의 언어이며, 감동이란 것은 수천 마디의 진술보다 적절한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시조는 이처럼 종장에서 그 맛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종장에서 그 맛을 찾아보려면 초장과 중장이 종장을 향하여 놓여있어야 한다. 시조에서의 초장과 중장은 종장이라는 종착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의 시조들도 그런 예이다.

     

 

  플라타너스  

                                   배경희

 

  햇빛을 두고 내렸다 구름이 많아졌다

  저녁은 엄마를 삼키고 버짐이 다 말라갔다

  바람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나뭇잎을 몰고 다닌다

    

  제목 ‘플라타너스’를 보고 어릴 적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신작로에서 본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일렁거림을 떠올렸다. 그때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많았다. 문득 플라타너스 아래에 서서 바람에 일렁거리는 나뭇잎의 그 시원한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림책에서 보았던 큰 물고기, 가오리를 떠올렸다. 큰 나뭇잎들의 흔들리는 움직임이 한 떼의 가오리가 심해의 푸른 바다 어디에 무리 지어 흐르는 것 같았다. 바람이 심해지면 가오리 떼는 바람의 방향 따라 마치 물결에 실려가듯 우르르 마구 더 세차게 일렁인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참이나 그 일렁임 속에 멍하니 있으면 나도 아득히 물속에서 같이 흐르는 느낌, 같이 춤추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느낌은 어른의 손바닥을 감싸고도 남을 나뭇잎의 크기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싱그러웠다. 그 뒤부터 플라타너스를 보면 나를 감싸안는 깊은 물 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는 느낌을 받는다. 태초의 생명은 물에서 나왔다. 플라타너스, 그 큰 잎사귀의 일렁임 속에서 물에서 유영하는 태초의 생명처럼 한없이 자유롭고 벅찬 흐름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플라타너스를 검색해본다.

  

  버즘나무과 플라타누스(Platanus)속에 속하는 교목. 북아메리카·유럽 동부·아시아가 원산지이다. 비늘 모양의 수피(樹皮), 크고 낙엽성이며 대개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진 잎, 둥근 두상꽃차례와 씨를 갖는 점이 특징이다. (……) 버즘나무는 전 세계 각지에서 가로수로 사랑받는 나무이며, 한국에서는 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부른다. 플라타너스(platanus)라는 이름(정확히는 학명)은 그리스어의 'platy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넓다' 는 뜻이다. 즉, '잎이 넓은 나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시조의 초장은 “햇빛을 두고 내”리고 “구름이 많아”진 불길한 조짐으로 시작한다. 초장의 이 불길함은 결국 “엄마를 삼키고 버짐이 다 말라” 간 저녁으로 이어졌다. ‘버짐’은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플라타너스를 가리킨다. “엄마를 삼킨” 것과 “버짐이 다 말라간” 것은 조락의 상관 관계가 있다.

  이 시조의 풍경은 플라타너스의 잎이 떨어지는 늦가을 저녁이다. 저녁의, 햇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두고 내렸다’는 것과 ‘버짐이 다 말라간’ 것의 모든 풍경이 엄마와 연관되어 있다. 종장에서는 이 스산한 풍경에 ‘바람’이 등장한다. 버짐이 다 말라가서 나뭇잎이 바람에 많이 떨어졌다. 버짐나무 잎사귀는 그 크기로 인하여 낙엽이 될 때는 온 세상을 누렇게 보이게 한다. 늦가을 찬 바람이라도 불어 낙엽이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풍경은 비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시조에서의 풍경도 바람이 나뭇잎을 몰고 다니는 저녁이다.

 

  그런데 그 바람의 방향이 “시계 반대 방향”인 것에 ‘시’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서 바람이 부는 방향은 두고 내린 햇빛과 저녁이 삼킨 어머니가 계시는 방향이다. 시계 반대 방향의 바람은 과거를 향하여 부는, 엄마와 얽힌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이다. 그 바람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픈 태초의 그리움을 안고 있는 바람, 종장 첫 구의 “바람”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다. 더구나 시인은 그 바람을 여태도“나뭇잎을 몰고 다니”는 현재형으로 드러내었다.

  담담한 묘사 속에 마음이 표현된 종장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의 깊은 감정을 하나의 풍경으로 담담하고 건조하게 묘사해 내었다. 자연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했다. 바람이 불면 해류에 쓸리는 물고기처럼 싱그럽게 일렁이던 플라타너스는 엄마를 삼켜버린, 버짐이 다 마른 저녁의 상실감을 그 큰 잎만큼이나 더욱 크게 부각시킨다. 그러한 한 풍경의 모습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이런 제재의 선택에서도 시적 재능은 드러난다. 그리고 또한 감정을 배제한 드라이한 표현에서 더욱 깊은 절제된 슬픔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눈썹이 젖다

                             손수성

 

  중환자실 창문은 바다에 젖어 있다

  방파제와 등대는 하늘에 젖어 있다

  태풍이 암벽을 덮쳐 그 너울 솟구치고 있다

   

   위의 「플라타너스」가 드라이한 풍경의 묘사로 슬픔을 자제했다면 이 작품은 초장부터 종장까지 온통 그 풍경이 젖어 있다. 풍경도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가장 넓은, 바다와 하늘이다. 감정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종장으로 갈수록 감정의 쓰나미 속으로 빠지게 된다. 단시조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용량이다. 그러나 그 감정을 거대한 풍경에 대입함으로써 직접적 토로의 통속에 빠지지 않고 산만하지 않으며 단도직입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시인은 어떤 위급한 상황을 “중환자실 창문은”이라는 한 구로 드러내었다. 중환자실은 생사를 다투는 위급한 환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가족의 면회까지 제한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다. 시인은 면회를 간 중환자실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솟구치는 눈물을 사경을 헤매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 하는 배려일 것이다. 혹은 시인 자신이 중환자일 수도 있겠다. 그러한 시인이 내다보고 있는 그 창문 밖은 온통 바다이다. 그 바다에는 방파제와 등대가 있고 중환자실 창문과 방파제와 등대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하늘에 젖어 있다. 보이는 풍경은 모두 젖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풍경들이 젖어있는 이유는 제목에서 보듯이 시인의 눈썹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 눈썹이 젖어 있으니 보이는 풍경이 모두 젖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갖고 있는 거리는 시인의 눈썹에서 가없는 바다와 하늘로 확장되었다. 그 넓고 깊음은 화자가 느끼는 슬픔의 크기와도 같다. 단시조의 운용이 오묘하다.

   종장에서 급기야 젖어있는 눈썹으로 눈물이 솟구친다. 그 눈물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온다. “태풍이 암벽을 덮쳐 그 너울 솟구치고 있”듯이 솟는다. 거대한 울음이 종장에서 밖으로 터져나왔다. 초, 중장의 “바다”와 “하늘”은 슬픔의 크기이며. 종장의 “태풍”은 뚫고 나갈 수 없는 암벽을 만나고 있는 슬픔의 강도이다.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라면 이보다 더 큰 슬픔의 비유가 있을까? 그 크기와 넓기가 장중하고 무변하여 벅차다. 포항 바닷가에 살고 계시는 시인의 작품이어서 그 진솔함이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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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연 ​ l

1980년 《시조문학》 천료. 시조집 『빈 들의 집』 『서역 가는 길』 『저 혼자 꽃 필 때에』 『달집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 『꽃벼랑』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 『너와 보낸 봄날』 『깨끗한 절정』 『향긋한』, 시조선집 『먼 사랑』 등, 일역 시조집 『花の崖(꽃벼랑)』, 영역 시조집 『All The Daughters of The Earth(세상의 모든 딸들)』, 동화집 『하늘 발자국』, 시평집 『시조의 향연』이 있음. 〈한국시조작품상〉 〈고산문학대상〉 〈한국단시조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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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호(vol.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