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오선지 위의 시어들
 
오선지 위의 시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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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지상 
완결여부 연재중 

 

 

 

 

오선지 위의 시어들 16

— 박정만 시「어떤 흐린 날」

“날 저물고 비 내리면 어이하나”

 

 

 

내 마음의 어느 모래밭에 

꽃잎처럼 찍혀진 발자욱 하나, 

사랑의 잔물결마냥 꽃 무동 서니 

날 저물고 비 내리면 어찌하나. 

 

꿈은 

오지 않는 길처럼 사라지고 

사랑은 

금단의 열매처럼 멀어졌으니. 

  

— 시집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문학사상사. 1987) 

   

 

  늦었다. 반딧불이의 신호를 받기 위해서는 좀 더 서둘렀어야 했다. 6월 초 늦어도 6월 보름께까지는 반딧불이가 출몰하는 어느 곳이든 저물기 전부터 서성거렸어야 했다. 매달 열기로 작정한 공연은 세 번째 주말, 월초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마치면 바로 월말, 그렇게 몇 달을 보내며 꿈도 꾸지 못했던 반딧불이가 환영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했던 건 6월 보름 즈음이었다. 구슬픈 초여름 비가 내렸었던가. 비 그치고 난 오후 무지개가 아른거렸었던가. 기억은 아슴아슴 하지만 어쨌든 “날 저물고 비 내리면 어이하나(원문: 어찌하나)” 노래 만들어 놓고 수십 년째 발표하지 못한 이 구절을 취하지도 못한 채 읊어도 그리 슬프지 않은 저녁이었다. ‘박정만’. 그냥 박정만이 아니고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잠자는 돌」)의 박정만을 기억해 내다니. 거의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외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며 황홀한 일몰에 눈멀어 길을 잃어도 좋았던 그날, 밥 한 끼를 잃더라도 내일은 꼭 떠나야 한다고 다짐했던 건 읊어대는 시 구절 위로 음표처럼 반딧불이가 출렁였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김성동의 말대로 마치 기갈지옥(飢渴地獄)에서나 온 것처럼 액체로 된 것이라면 하다못해 농약까지 마시려 했던 술꾼 박정만의 저녁이 그가 떠나고 40여 년이나 지난 지금, 마치 나에게 보내오는 모스 부호 같아서, 간절한 구호의 신호 같아서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그의 신호를 찾아가는 일은 허황되지만 좋았다.

 

  말이 죽고 글이 죽고 오직 침묵만 살아 더 큰 침묵이 되고 그게 칼이 되어 살을 찌르던 시절의 저녁이면 어김없이 술에 취했던 시인은 누구든 붙잡고 통곡하듯 물었다.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찰나의 3박 4일. 그러나 억겁의 시간이기도 했던 1981년의 초여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고 이유도 모르는 질문에 기억 못 할 답을 했고 수십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 만큼의 고문을 받았고 그리고 끝내 고작 43세의 나이에 잠자는 돌이 되었다. 전두환의 80년대는 혹독했다. 그 시절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시인 황지우는 고문을 “마취 없는 외과수술”로 표현했고 수술대 위에선 모든 이들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상실한 기억을 안은 채 평생을 살았다. 1981년 5월, 지난 일 년여 아무 일 없이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한수산의 소설 「욕망의 거리」의 한 대목이 군사정권의 눈에 거슬렸고 이내 한수산 필화 사건이 되어 7명이 고초를 치른다. 그중 한 명인 박정만이 그 고문을 당한 이유는 작가인 한수산과 같은 대학을 나왔고 몇 번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고통은 주되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은 주지 않았던”(황지우 「나의 작품 나의 얘기 — 흉측한 삶」, “80년대 고문 체험” 중) 고문의 시간을 견디던 그는 88올림픽 폐막식이 성대하게 열렸던 그해 10월 2일 봉천동 그의 집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이승과 작별한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20여 년 동안 고작 2권의 시집을 발표했던 과작의 시인은 87년 후반부터 88년 여름까지 6개월 동안 300여 편의 시를 썼고 매달 한 권씩 6권의 시집을 냈다. 이른바 시마(詩魔)에 들었던 그의 고백은 절절하다

  “나는 겨우 술로써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다. 몸은 거의 완벽한 탈진 상태였고, 정신은 기화하는 액체와도 같이 제풀에 흐물거렸다. 새삼 사는 일이 눈물겹게 생각되었지만, 일어나기는 고사하고 이제 자살조차 꿈꿀 힘이 내게는 없었다. …… 온몸이 불같이 뜨거워지더니 때 없이 구토가 나고 방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처럼 얼크러져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밀려 나갔다. …… 한 편을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박정만, 「그 처절했던 고통의 시간들」 중)

  그가 남긴 마지막 시[終詩]는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이고, 그의 죽음을 알린 이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기형도였다.

 

  저수지를 둘러싼 오솔길 옆 개망초 군락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해가 막 서쪽의 능선을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모래밭에 꼬-옻 잎처럼 찍혀진 발자욱 하나아-” 박정만의 유고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이었을까. 그의 서정이 몹시 부러웠고 그의 서사가 아득했던 아련한 시절, 시마(詩魔)에서 굳이 헤어 나오지 않았던 그의 시 속에 숨어있는 현란하면서도 진중한 음표를 나는 천천히 손으로 그은 오선지 위에 적었었다. 아마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무더웠다는 어느 해의 신혼 방이었고 자주 만지지 않았던 클래식 기타를 튕겼을 것이다. 이 노래는 아직도 나 혼자만 알고 있다. 혼자 걷는 어떤 날에는 “꿈은 오지 않을 길처럼 흔들리고(원문: 사라지고)”가 좋았고, 상념에 젖은 어떤 날에는 “사랑은 금단의 열매처럼 스러졌으니(원문: 멀어졌으니)”가 좋았다. 어떤 구절이든 마음이 울렁이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참나무가 우거진 숲은 금세 어두워졌다. 형체만 보이는 능선 위로 초생달이 떴고 한바탕 바람이 불어 거대한 울음소리를 냈다. 반딧불이는 오지 않았다. 간절한 구애의 불빛을 목격하는 일은 역시 허황되었다. 그러나 실망할 게재는 아니었다. 사랑을 이루었거나 사랑할 필요가 없어진 게지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달빛도 사라진 밤의 숲길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처럼 노래하는 것만으로 괜찮았다. 노래 위를 배회하는 반딧불이의 신호를 그려보는 것만으로 하나도 서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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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  l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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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호(VOL.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