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추천사 김현[202104vol.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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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알코브
희는 돗자리 위에 앉아서 소프라노 리코더를 분다
우리는 아마 이곳으로 소풍을 나온 것 같다
강의 흐름과 우리의 시간이
무관하게 느껴질 때 연령은 교체되고 있다
말에도 힘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유령에게 서로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혼자 있지 마 혼자 있지 말고 언제나 같이 있자
생크림 범벅 심장 한 피스를 교환할 때는
공책에 매달아두었던 엄지만 한 자물쇠가 필수라고 생각했고
우리는 걷다가도 앉아 자꾸만 강 건너보는 일을 했다
소풍은 끝나지 않고 이곳은
세계로부터 오목하게 패인 우리의 작은 뜰
이다음에 희는 정원사가 될 거라고 말한다
나는 천장이 아주 낮은 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책을 모두
뒤집어 꽂아둘 것이다 책등이 책장에 기대도록
오래 눕혀두는 일을 할 것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모두 이 숲속의 식물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학명과 의미
유령
저기 지나간다 또
모르는 말로
하얗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고 너무도 사람 같은 얼굴로
희는 돗자리를 개어 옆으로 밀어둔다
우리는 맨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청새치자리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우리는 끝에서 끝을 이어본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한 살에서 백 살이 되어버리는 아기들처럼
주먹을 쥐었다 펼치면 단단하게 묶인 체리의 리본 매듭
가장 달콤한 것을 사랑해보기로 해
우리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무언가 진심으로
미워할 수 있게 되겠지
마당이 넓은 집을 갖게 된다면 마른 꽃을 넣어놓을 거야
바닥에 쌓인 꽃 주워 뭉쳐다가 눈싸움하는 여름
그리고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아마도 어린 멧비둘기
그것 그림자.
포인터
나는 언제나 뒷문을 닫고 나서는 어린애였어
좋은 말을 해주면 타버리는 난초의 끄트머리처럼
다정한 사람들은 서로서로 알지도 못한 채
내게 너무 많은 물을 주곤 했지 그때
너무 많은 물을 아래로 뚝뚝 흘려보내면서 걷다보면
바닥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 나 그거 잘 알거든
너무 투명하게 손에 잡히는 유리막대 같은 미래
그걸 손에 꼭 쥐어보면 차갑고 가느다랗게
손금을 파고드는 단단함 어떻게 하면 깨져버릴까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 다 내다본
나의 과거는 불쑥 나를 찾아와서 나를 가엾게 보네
재수 없어
내가 슬퍼질수록 더 기뻐지는 사람이 있는 것만 같아
어항 속에서 잡아 먹히고 잡아먹는 게 나인 것처럼
나는 왜 자꾸 나랑 싸우지?
학교 복도 끝 거울 앞 벽에 묻은 틴트 닦아낸 자국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문질러 보면서
모두 똑같은 분홍색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끔 몰래 나를 벌주기 위해 작정하고 내려온
신처럼 그렇게.
각주
가끔 미움이 묻혀 있는 곳에 가서 흙을 밟다 온다. 내가 일광욕하고 있을 때 등 뒤로 다가왔던 걸 확 묻어버린 것이다. 젖은 땅을 적당히 깊숙이 파헤치고 나는 그것을 안으로 구겨 넣었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면서. 왜 나를 여기 처넣어? 그것이 웃으며 물어서 나는 그것 위로 흙을 주워 던졌다. 파낸 것 쌓아 덮으며 봉분을 만들었다. 가끔 흙을 밟다 오려고.
왜냐하면,
나는 어릴 적 배운 찬양을 아직도 외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걸 부를 때면 함부로 떳떳해 지는 사람으로서 흙은 언제나 누워 있고 흙은 밟기가 좋기 때문에.
물결
흐르지 않아도 빛이 비치는
해수욕장에 가면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 등을 드러내 보이고 있지는 않았고 누군가 내 팔에 자외선차단제를 마구 바르면서 가만히 있어, 찰싹 때리고, 나는 땀과 그것이 뒤섞이는 걸 본다. 백탁. 흰 땀이 뚝뚝 흐르는 것. 사실 나는 미움이 어디에서 자라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것과 가끔 도모하고
우리?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미움이 흙 속에서 싹싹하게 다 썩어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다.

201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등단.
2020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추천사
● 김현
아침 일찍 해수욕장에 다녀왔습니다. 홀로 해변에 앉아 책을 읽었는데, 책의 내용보다는 그 아침의 고요한 풍경이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다리가 짧고 통통한 반려견을 끌고 맨발로 해변을 거닐던 두 서양 남자의 움직임 이라든가, 아이들이 몰입하여 만든 모래성을 부수는 파도, 바다의 윤슬, 손을 꼭 잡은 채 바다를 향해 서 있던 연인들의 뒷모습(죽지도 않을 거면서). 그리고 여러 번 되뇌어 보았던, 시인님이 보내온 시의 이런 구절.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 다 내다본 나의 과거는 불쑥 나를 찾아와서 나를 가엾게 보네……”
어떤 시는 위안을 주기보단 위안을 받기 위해 쓰이기도 하지요.
잘 지내시나요?
아프지는 않나요?
봄의 바다로 향하는 버스에서 시인님의 시를 멈칫멈칫 읽으며, 저는 제 유년의, 생활의, 감정의, 사랑의 알코브를 떠올렸습니다. 알코브란 서양식 건축에서, 벽의 한 부분을 쑥 들어가게 만들어 놓는 곳을 뜻하지요. “세계로부터 오목하게 패인” 그 공간에서 시는 탄생합니다. 시인님의 시가 안내하는 여기 이곳이면서 동시에 이곳이 아닌 장소,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지 않은 (듯한) 존재를 통과하면서 저는 한동안 머물지 않던 저의 오목한 공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시공간을 우리는 ‘내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내면에 상처가 없는 사람도 없고 내면에 사랑이 없는 사람도 없다. 저는 그렇게 기도하며 “함부로 떳떳해지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제 최초의 알코브는 교실의 흰 커튼 뒤더군요. 커튼 뒤로 쑥 들어가 있으면 커튼의 흐름과 저의 시간이 무관하게 느껴져서, 종종 창문에 입김을 불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단어를 적곤 했습니다. 너무 투명한 것을 원치 않아서, 곧 깨져버리길 바라면서. 그럼 그때만큼은 밖을 건너다볼 수 있었습니다. 미운 사람을 미워해도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도 되었습니다.
어떤 시는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쓰이기도 하지요.
살아 있나요?
아직, 죽지는 않은 채로.
제가 아침 해변에서 읽었던 책의 제목은 ‘환한 숨’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편집자가 한 권의 책과 함께 보내온 다음과 같은 문장에 힘입어 한 계절을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평안한 봄 되세요.
그가 보내온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게 상처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숨을 쉬어야 해요.”

김현 l
시집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호시절』 『낮의 해변에서 혼자』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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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