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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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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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작시 -

 

 

    *

   스쿨버스

         

 

 

 

  어린 새 한 마리가 떨어졌습니다

  떨어지기 전에 이슬을 묶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매일 태어나는 거였습니다

  일어나기 싫었습니다

  그날도 당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늘 바빴지요

  엄마는 삼시세끼 야식까지 바빴지요

  선생님은 잡무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우리는 멀리 있는 내가 아니었지요

  가로수보다 가까이 

  개집보다 가까이 있었지요 

  우리는 한 버스 안에서 묶였지요

  이젠 스스로 묶을 일도 없어졌지요

 

 

 

 

 

 

 

  *

  해고

 

 

 

  학교에서 내가 배운 건

  배울 게 없다는 거였고

  그걸 알게 된 건 학교 밖에서였다

 

  학교 밖이 학교였다

  세상이라는 대학

 

  직장에서 내가 배운 건 

  직장에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다는 거였다

 

  하천에선 연어가 뛰었고

  뱃속에선 태아가 뛰었다

 

  화창한 봄날에 결혼하고

  볕 좋은 가을날에 실직한다

 

  연봉도 안 되는 퇴직금

  깨버린 국민연금

  기저귀 실업수당

 

  꿈꿀 수는 있어도 

  생활할 수 없는 꿈 앞에

  감당 불가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

 

  광야가 아니고 황야다

 

 

 

 

  *

  시 읽는 밤

 

 

 

 

  부질없는 밤이다

  부질없는 말의 밤이다

 

  첫 줄을 어떻게 읽는담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첫 줄을

  먼 이곳을

  결국 도착하지 않을 

  없는 첫 줄을

 

  첫 줄만 읽으면 되겠는데

  첫 줄이 오지 않는다

  첫 줄의 호흡곤란

  첫 줄의 생사불명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시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덮어써도

  

  정말이지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시라는 장막 뒤로 숨어도

 

  시라는 이름의 영토는 넓고도 드넓어

  그 많은 시들을 읽을 수 없고

 

  넘겨버리고 넘겨버리고

  던져버리고 던져버리고

  그러다 필사해 가며 읽는 시를 얻는다

  중얼거리며 걷는 시를 갖는다

 

  없어 못 파는 세상이 아니다

  남아도는 세상이다

 

  그나저나 첫 줄을 어떻게 읽는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첫 줄을

  지금껏 없던 첫 줄을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지금 막 당도하는 첫 줄을

  끝끝내 오지 않을 

  먼 이 사람을

 

  첫 줄만 쓰면 되겠는데

  아직도 출발하지 않는 첫 줄을

  어떻게 쓴담

 

  덧없는 밤이다

  덧없는 언어의 밤이다

 

  시를 읽으려 시를 읽는 밤이다

  시를 읽지 않으려 시를 읽는 밤이다

 

 

 

 

 

 

  - 자선 대표작 -

 

 

  *

  불굴의 피로

 

 

 

  피로가 피로하다

  여자가 쉬는 날에도

  돌멩이가 우는 날에도

 

  그 와중에도

 

  이웃집 꽃사과나무는

  지난해와는 다른 꽃사과꽃을 듬뿍 보내왔다

 

  우리집 찔레꽃은

  지난해와는 다른 흰 꽃을 한창 보내왔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지나갔다

 

  꿈?

  꿈 없이 실컷 자는 것

  

  원?

  원 없이 잘 때 자는 것

 

  피로가 극성이다

  피로가 지극정성이다

 

  잠만 자던 방

  잠만 자던 밤

  하지는 않고 잠만 자던 방과 밤

  그런, 그날들이 흘러갔다

 

  평일이 끝나도

  주말 마감 기계들은

  벌써 여러 해째 피로를 마감하지 못한다

 

  파도야 

  유사 이래

  패배를 모르는 생활이겠지만

  나는 언제 나다운 나였는지 모르고

  너는 그런 나를 또 모르고

  형제자매들은 죽은 시간에 묻어간다

 

  가까스로 

  밀리고 밀리다 떼밀리다 엎어지듯 도착한 해변에는

  수평선을 조망하는 지친 발끝이 있다

  무한 리듬과 입 맞추는 열혈 심장이 있다

  유한을 깨무는 입술이 있다

 

  파도야 

  바다 이래

  여일한 생활이겠지만

  며칠 쉬기라도 할라치면 못 견디게 보고픈 피로마냥

  피로는 피로를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로가 피로를 먹여 살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피로가 푸르다

  피로가 열렬하다

  사파리가 쉬는 날에도

  비행기가 뜨지 않는 날에도

 

  어제의 피를 타고 또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다른 피를 타고 가야 하리라

  다른 피로 갈아타야겠지만 

 

  삶에서 내리지 않는 한

  삶을 갈아버리지 않는 한

  내릴 수가 없다

  멈출 수가 없다

 

  파도는 파도를 밀고 가는 걸까

  떼밀려가는 걸까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피로가 피로하다

  피로가 과로하다

  피로는 피로를 모른다

  인간은 인간을 모른다

 

 

 

 

  *

  무(無)의 저녁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너는 없고

  이 저녁은 이곳에 없을 것이다

  너는 떠나지 않고 떠났다

  나는 돌아오지 않고 돌아왔다

  네가 없는 여기 이 시간을 뭐라 불러야 하나

  남아 있는 사람들이 허공을 깔고 앉아 운다

  없음의 더없는 있음 속에

  그 숱한 있음의 덧없음 속에

  또 하루가 하루를 버리듯 가버렸다

  바깥을 잃어버린 시선들이 거리를 지나갔다

  타인을 지나가는 것도 타인

  타인을 이룩하는 것도 타인

  고요가 고요를 찾아가듯이

  네 없는 이곳에는 이곳조차 없다

  이곳이 없는 곳에서 너는 어쩌자고 자꾸 돌아오나

  매일 다시 태어나 그날 삶을 끝내듯이 살고

  이 비루한 거리로 저 석양과 함께 돌아오고 싶구나

  돌아와 깔깔대며 소풍 가고 싶구나

  네가 없는 나라에 내가 있다

  이게 무슨 조화냐

  이 저녁때 평범의 극치를 누리고 싶구나

  일상의 사치 위에 드러눕고 싶구나 

  네가 여기 없는 동안 너는 태어나고

  너가 없는 곳에서 나는 죽어간다

 

 

 

 

 

  *

  처럼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 해병

  방광으로 들어간 거머리처럼 

  전신 발광하는 육체

  벌집 가옥 네 눈빛

  압정으로 들어찬 

  해바라기 네 얼굴 뒤로

  유한에 걸려 울부짖는 호랑이의 폐처럼

  지뢰밭에 들어선 아무 생각 없는 발목처럼

  칠레 산티아고에서였지

  진압봉에 뒤통수를 맞고 눈알이 빠져버린

  비명을 다물고 입만 벌리고 있던 소년처럼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에서였지

  관중석으로 날아든 팩에 얼굴을 가격당한 소녀처럼

  비명을 꿰매고 있는 빗방울 가슴들처럼

  빗소리를 긋는 유리창처럼

  면도날을 긋는 피처럼

  시간을 바닥 치게 하는 시간처럼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바늘처럼 퍼붓는 햇살을 꽂고 지내는 돌처럼

  화사한 봄날 지축을 흔드는 

  중대 대대 연대로 밀려드는 몽고군 말발굽 소리에

  찌그러지는 심장과 쪼그라드는 뇌 안처럼

  사람을 긋는 사람처럼

  망가진 나를 조망하는 나처럼

  무릎이 저지르고 

  팔꿈치가 저지른 당신처럼

  새끼손가락이 노래하고 

  엄지발가락이 춤추는 음악처럼

  그 겨울 새벽 어린 가슴에 듣던

  증조모의 숨넘어가던 소리처럼

  식욕과 성욕의 롤러코스터 육체처럼

  눈동자나 입술만큼이나 

  잊기 어려운 그 여인의 음부처럼

  욕설을 파묻고 있는 내 입술처럼

  내일이면 쓰레기가 될 것들이

  오늘이 가기 전에 이미 쓰레기인 것들이

  새로운 쓰레기들이

  전위라도 되는 양 놀고 자빠졌고

  정부를 위해 있는 정부와 

  아군이 누군지 모르는 우중들의 나라와

  세습 권력 못지않은 격세 권력과

  김(金)가 못지않은 박(朴)가처럼

  김(金)가 박(朴)가 저리 가라 이(李)가처럼

  늘 적에 붙어먹는 남과 북처럼

  그걸 뜯어먹는 동과 서처럼

  서로 비방하며 기대는 국경처럼

  노예인 줄도 모르는 

  국민이라는 이름의 노예들과

  자신이 사는 나라에 뭘 기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늘 삶이 먼저였고, 삶을 구해야 했건만

  문장이나 만지고 있던 나와

  나조차 구하지 못하는 나처럼

  한국시에 범람하는 처럼처럼

  처럼을 종결하는 종결자처럼

  끼니처럼 돌아오는 굴욕과

  졸음처럼 쏟아지는 애국심과 

  공권력이 권력 편이라는 걸 다 죽을 때가 돼서도 

  속거나 겨우 눈치 챈 노인네들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법과

  유전무죄 무전유죄 고무줄 양형처럼

  평생을 까먹으며 일생에 끌려가는 피해자들과

  그걸 까맣게 모르는 가해자들처럼

  동고서저의 백두대간처럼

  서고동저의 호치민 루트처럼

  피골과 피골 사이에서 우는 아프리카처럼

  해골과 해골 사이에서 웃는 아메리카처럼

  지구의 악성종양 미국처럼

  차기 악성종양 중국처럼

  소규모 암덩어리 한국처럼

  연대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국의 개털들처럼

  노예들의 독창이 합창이 될 때까지 노예들은 노예들이고

  합창이 끝나면 도로아미노예인 것처럼

  세상은 기어코 바뀌지 않거나 끝끝내 바꾸거나

  바꾸려는 자는 지 에미 애비부터 바뀌게 하거나

  이 붙어먹고 빨아먹을 생

  죽을 듯이 죽일 듯이 빨다가

  단맛 빠지면 버리고 버려지는 생처럼

  교체되는, 교환되는

  메마름과 메마름 사이

  눈물과 피눈물 사이

  한과 여한 사이

  등 돌리고 자는 여자들처럼

  등 꼬부리고 무릎에 손 찌르고 자는 남자들처럼

  가장 무거운 나를 내려놓기가 가장 힘든 것처럼

  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고

  지 하고 싶은 말만 하려는 인간들처럼  

  그러고도 인생이 모자라는 인간들처럼

  인간들처럼 말 안 듣는 동물이 없다

  죽이지 말라고 해서 안 죽일 인간이 아니고

  살지 말라고 해서 안 살 삶이 아니고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올 죽음이 아니다

  가지 마라 그렇게 당부해도 가니 인간이고

  뒤돌아보지 마라 그렇게 경고해도

  뒤돌아봐 콘크리트 기둥이 되는 직립보행들처럼

  눈동자까지 올라온 눈물을 

  둘둘 말아 심장으로 다시 우겨넣는 사내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그대 어두워지는 저녁 이마처럼

  무한대의 어둠을 끌고 지상으로 올라와

  결국 굴러 떨어지는 그대 불꽃 눈물처럼

  불쌍한 수컷들의 세상과

  갓난애에게 젖꼭지 물리는 기분과

  다 큰 사내에게 젖무덤 빨리는 기분처럼

  검은 음모(陰毛) 속 백모(白毛) 한 가닥처럼

  더없는 우리들의 구취와 덧없는 우리들의 손등처럼

  이번 연애가 가면 오지 않을 이번 여름과

  하늘이 빵꾸 나 사흘돌이로 비 쏟아지자

  비에 둥둥 불은 돼지가 배 뒤집고 네 발 달린 자동차와 

  네 발 달린 슬픔으로 둥둥 떠내려갔던 지난여름과

  살벌하게 시퍼런 겨울바다보다

  빠져 죽고 싶게 아늑한 그 가을하늘과

  나흘돌이로 내리 퍼붓는 설설 기는 영동 설국에서

  자동차 한 대 다닐 수 없는 도심 대로를 대로행 하던 그 겨울과

  황금 물들던 은행나무 벤치에서 

  셔츠가 찢어지도록 입술을 퍼붓던 그 가을밤처럼

  허리가 허리를 껴안고 도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그대 마음의 흠집과 낯빛처럼

  돌 가슴에 남은 한 점 온기처럼

  잎을 떨구고 침묵을 껴입는

  안개도시를 헤엄치는 11월의 나무들 물결과

  한 겹 한 겹 바다를 벗겨나가는 파도와

  대양으로 입수하며 멈칫 멈칫 

  지나온 물길들을 너울거리는 하구의 노을과

  줄줄이 바다로 끌려들어가는 전세계의 강물들과

  전세계의 피로 복용자들과

  사소한 나라에서

  사소하지 않은 감정으로

  사소한 저녁에 입장하는 어둠처럼

  일시적이고 덧없는 감정들 속에

  누구의 편도 아닌 밤의 등 푸른 빛깔들과

  파리하다 못해 푸르기까지 한

  야근 끝난 아침 공기처럼

  나는 마음을 죄다 그녀에게 갖다 박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않던 그녀의 먼 눈길처럼

  세상에 남은 한 점 물기처럼

  여자가 그리웠던 밤과

  여자를 눕히던 밤과

  여자 없던 숱한 헛된 밤과

  남자를 기다리던 밤과

  남자를 받던 밤과

  남자를 받지 못하던 숱한

  야속한 밤과 야비한 밤과

  타인이라는 국경을 넘나들던 기막힌 밤과

  그녀의 질 속으로 미꾸라지처럼 

  음경이 미끄러져 들어갈 때

  잠시일지라도 잊는 만근심처럼

  사랑했던 사람에서 원수하는 사람처럼

  구멍에서 시작해 구덩이에서 끝나는 삶처럼

  견뎌야 했던 것은 견딜 수 없는 삶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나쁜 세상처럼

  그래도 입맛 다시는 세상처럼

  매일 매일이 생존 기념일이고 전생인 하루와

  숲의 뿌리까지 쳐들어가던 태풍에 뿌리 뒤집히던 나무들의 이틀과

  목까지 들어찬 홍수와 해일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토하던 그 이웃 나무들의 어쩌지 못하던 사흘과

  멀고 먼 열흘 무한과

  발목 가까이서 보거나 말거나 핀 제비꽃의 봄과 

  초록에 자리를 내주며 야위어가는 연두의 어제와

  통장 잔고가 만 원 이하였던 날이 별 헤듯 했던 지난날과

  성(聖)스러운 파도의 리듬과

  성(星)스러운 모래 불꽃과 

  성(性)스러운 눈깔과

  나뭇잎이 발명하는 바람의 광대뼈와

  바다에 빠져 익사 직전인 사람처럼

  파고에 허우적거리던 바위섬과

  파도 앞에도 파도였고

  파도 뒤에도 파도였던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을 가지지 않았던 뭘 모르던 초여름과

  전속력으로 호수 위를 뛰어가는 

  한 무리의 새들이 선물하는 중력의 그제와

  기어코 가지지 말아야 했던 사람을 삼켰던 초가을과

  안 가는 데가 없는 누구의 편도 아닌 낮은 물의 그끄저께와

  시를 잊지 못하는 스물네 시간과

  헤일 수 없이 너의 깊은 눈에 별빛조차 검던 일분과 

  손 쓸 수 없는 일초와

  넋을 놓게 하는 남태평양과

  넋을 잃게 하는 인류와

  우유를 엎지르자 실수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아빠가 그랬죠 선수 치던 어린 딸처럼

  말 한마디 때문에 혈관이 울고

  말 한마디 때문에 창자가 웃는 사람처럼

  나는 여럿이다, 감당이 안 되는 나와 나의 나와 겹겹의 나처럼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로 돌아온다 

  돌아와 혼자서 혼자를 사랑하듯이 걸어다닌다

  혼자는 내 젊은 날의 이명(異名)

  혼자 아무런 목적 없이 그 도시의 

  골목골목을 걷는 걸 끔찍이도 아꼈고 사랑했었다

  그 도시의 골목길을 그 도시의 혈관을 타고 가듯이 걸어다녔다

  그 거리에서 내 사랑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파괴되듯

  한 줄 한 줄 글을 쓰고 싶었다

  한 음절 속에 들어가 있는 

  해와 달과 별과 물과 불과 땅과 강과 길과

  숲과 눈과 비와 몸과 말과 삶과

  두 음절 속에 들어가 있는

  지구와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천둥과 석양과 적요와 노래와 

  사랑과 미움과 눈물과 마음과 인간과 죽음처럼

  나의 전세계(全世界)가 마치 전세계(前世界)인 양

  손쓸 새 없이 흘러가버린다

  삶이 너무 빠르다

  일만 년 전 사냥하다 문득 뒤돌아선

  그대 눈빛에 어리는 햇빛의 사연처럼

  내가 언제 적 너였는지 

  내가 언제 적 나였는지

  내가 언제 적 우리였는지

  우리가 언제 우리였던 적이 있었는지

  과거는 평생진행형

  미래는 현재진행형

  과거를 묻지 말려거든 미래도 묻지 마라

  부(父)의 음경이 모(母)의 질 속으로 들어가듯이

  연어들이 강의 밑구멍으로 들어오고 

  살아야 할 날들이 

  살아내야 할 날들이

  살았던 날들이

  모천을 향해 마지막 힘을 더한다

  아직도 급류와 포식자들이 줄줄이 진을 치고 있다

  끝까지 살맛나는 극한 항해다

  단 한 마리의 정충이 단 한 명의 인간이 되어

  대양을 갈아타게 될 때까지

  수억의 수십억의 절망은 계속된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삶이 푸드득거리기 시작하고

  다시 날이 밝고 다시 나를 출발한다

  절벽에 질리는 파도와

  파도에 질리는 절벽처럼

  절망을 이기는 절망처럼

  두려움을 이기는 두려움처럼

  낯섦을 이기는 낯섦처럼

  고통을 고통하는 고통처럼

  어디 가지 않는 내 피처럼

  가장 큰 공포는 내가 죽는다는 공포고

  그걸 놓아줄 수 있는 것도 내 죽음이듯

  악몽을 벗어나려 더 세게 악몽을 껴안고 껴입는 이승처럼

  마초나 페미나 되다 만 반(半)인간들, 반수(獸) 인간들과

  이성(異性)한테 잘 보이려 아양 떠는 하루아침의 이성(理性)처럼

  아무리 잘 치워도 지구 안 쓰레기처럼

  먹음직한 나무들에서 군침 도는

  잎과 꽃들이 피어나는 세상처럼

  나무들이 발명하는 해마다 다른 잎과 꽃처럼

  우주적인 한 사람 한 사람과 

  먼지적인 한 인간 한 인간과

  별의 씨앗이 되는 한 점 시간처럼

  이 스산한 유한에도 목숨이 은하처럼 반짝인다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고

  태어난 게 그 다음으로 좋은 것처럼

  대기권을 뚫고 들어오는 외계의 침묵과

  외계로 나가는 인류의 언어처럼

  사랑 없는 우주처럼

  낯선 행성에 도착해 처음 발 내리는 숨소리처럼

  세계를 하러 가는 세계처럼

  유신(身)론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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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

19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견자』, 『한 남자』, 산문집 『시인일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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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여, 너는 고통하는 인간이구나

 

 

 

  노예라는 자각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평면적인가. 하지만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들은 살면서 견딜 수 없는 서러움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이 서러움의 감각에 무뎌지지 않음으로써 30여 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에도 여전히 특유의 부정성을 잃지 않는다. 특히 그의 신작시와 대표시를 읽으며 그가 삶을 노동의 관점에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째서 노동이 문제시되는가. 여기에는 ‘반시대적 생활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무엇이 작동하고 있다. 속물적인 교양에서 벗어나 진정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그는 노동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끌어오고 있다. 가령 「해고」에서 ‘실직’의 문제는 자연과의 일체감을 잃어가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규정된다. “연봉도 안 되는 퇴직금/깨버린 국민연금/기저귀 실업수당”은 사회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하다. 하여 박용하는 “하천에선 연어가 뛰었고/뱃속에선 태아가 뛰”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가 비극적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고발한다.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이 재앙이 되어버린 현실은 인간에게 그가 나아갈 드넓은 광야가 아닌 광막한 황무지로 느껴질 뿐이다. 이어서 「불굴의 피로」를 보자. “이웃집 꽃사과나무는/지난해와는 다른 꽃사과꽃을 듬뿍 보내”오지만 사는 데 지쳐 피로하기만 한 시적 주체에게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기력도 자연이 보내오는 기별들에 응대할 여력도 없다. 그렇게 뭘 하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돌아가는 피로한 일상에 치여 “일어나기 싫었습니다”(「스쿨버스」)라고 말하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노예의 삶이 아니면 무엇일까.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지식이 삶을 외면할 때 그것은 삶을 억압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박용하가 문제 삼는 것 역시 이 지점이다. 삶 자체가 끊임없이 배우고 혹독하게 훈련받아야 되는 것일진대, 사람들은 쓸데없는 공부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어버리고 있다.

 

  박용하가 자연의 노동을 인간의 그것과 대비시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자연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피로를 모른다. 자연은 그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소진시키면서도 결코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자연의 피로는 인간의 피로와 구분된다. 그 어떤 피로에도 지지 않는 피로, 열렬하게 피로해서 오히려 피로하지 않는 ‘불굴의 피로’인 것이다. 

 

 

가까스로 

밀리고 밀리다 떼밀리다 엎어지듯 도착한 해변에는

수평선을 조망하는 지친 발끝이 있다

무한 리듬과 입 맞추는 열혈 심장이 있다

유한을 깨무는 입술이 있다

 

파도야 

바다 이래

여일한 생활이겠지만

며칠 쉬기라도 할라치면 못 견디게 보고픈 피로마냥

피로는 피로를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로가 피로를 먹여 살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피로가 푸르다

피로가 열렬하다

사파리가 쉬는 날에도

비행기가 뜨지 않는 날에도

 

―「불굴의 피로」 부분

 

 

  박용하의 시에서는 곧잘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탄식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것이 자연의 무한함이다. 인간이 서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유한한 삶과 대비되는 자연의 찬란한 무한함을 끊임없이 마주하기 때문이다. 하나 이러한 대비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삶이란 평면적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박용하가 서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자연을 계속해서 불러내는 것은 그 서러움의 깊이를 통해 평면적인 일상을 구해내기 위해서다. 피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피로가 인간을 “죽은 시간에 묻어”버리는 데 비해, 자연은 “무한 리듬과 입 맞추는 열혈 심장”으로 피로를 피〔血〕로 전환시킨다. 여기서 피로는 피로를 밀고 나가는 동력이 되고, 자연의 일터는 곧 그의 처소가 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칫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시만큼이나 진부한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그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연으로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은 인간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행하고자 함은 아닐까. 인간의 노동이 삶을 노예적인 것으로 만드는 속박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참조항으로써 자연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회에 대한 풍자와 야유가 다만 유행으로 그치곤 하는 것이 근본적인 차원의 반성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 되새겨보게 된다. 역사는 다만 반복될 뿐이며, 삶에 내재해 있는 피로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기존의 틀에 박힌 문법에 갇혀서는 그 어떤 인식의 전환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소 느슨한 비유나 지나치게 비약적으로 읽히는 몇 대목이 걸리더라도, 그의 시가 밀어붙이고 있는 문제의식에는 지지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변주가 비가의 분위기를 띠고 전개되고 있는 것이 「처럼」이다. 이 시에서 ‘처럼’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는 소통될 수 없는 관계들을 지시한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이에 가정된 경계에 대한 인식은 은유적인 사유가 작동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들은 ‘처럼’이라는 간접적인 비유의 방식으로만 겨우 연결되며 그것마저도 어긋나기가 다반사다. 이와 같이 극복될 수 없는 간격에 대한 시인의 서러움과 비애가 ‘처럼’을 사용한 구절과 문장의 반복을 통해 점점 고조되어 드러난다. 객체와 주체 간의 경계가 명확해진 것이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간은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변증법적 역사의 주체로 자기 존재를 상정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소외시켜왔다. 허나 노동으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역사로부터도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등장과 함께 허무주의가 도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용하가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던 것은 이러한 생각이 인간 고유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착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인간들은 ‘처럼’이 만들어내는 간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쓰레기”, “악성종양”, “도로아미노예”로 전락해버린다. 그렇다면 “유한에 걸려 울부짖는 호랑이의 폐처럼/지뢰밭에 들어선 아무 생각 없는 발목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유신(身)론자”로서의 인간은 언젠가는 썩어 없어져버린 육체를 이끌고 다니며, 자조와 회의와 염세 속에 “매일 매일이 생존 기념일이고 전생인 하루”를 반복하는 시시포스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간극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처럼’이라는 수사가 반가울 리가 없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돌파할 수 없는 인간의 유약함에 대한 변명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용하는 어느 순간 비애의 소용돌이에서 슬쩍 빠져나와 진취적인 운명론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란 이런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말 한마디 때문에 혈관이 울고

말 한마디 때문에 창자가 웃는 사람처럼

나는 여럿이다, 감당이 안 되는 나와 나의 나와 겹겹의 나처럼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로 돌아온다 

돌아와 혼자서 혼자를 사랑하듯이 걸어다닌다

혼자는 내 젊은 날의 이명(異名)

혼자 아무런 목적 없이 그 도시의 

골목골목을 걷는 걸 끔찍이도 아꼈고 사랑했었다

그 도시의 골목길을 그 도시의 혈관을 타고 가듯이 걸어다녔다

그 거리에서 내 사랑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파괴되듯

한 줄 한 줄 글을 쓰고 싶었다

한 음절 속에 들어가 있는 

해와 달과 별과 물과 불과 땅과 강과 길과

숲과 눈과 비와 몸과 말과 삶과

두 음절 속에 들어가 있는

지구와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천둥과 석양과 적요와 노래와 

사랑과 미움과 눈물과 마음과 인간과 죽음처럼

 

―「처럼」 부분

 

 

  박용하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처럼’이 만들어내는 간극에 울다가 웃다가, 겹겹이 ‘나’가 되었다가 혼자로 돌아와 혼자를 사랑하는 ‘나’가 되었다가, 사랑도 하였다가 증오도 하는 것이 인간임을 그 자신이 납득하고 수긍할 때까지 극단에서 극단으로 옮겨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단호함에서 시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안다. 하여 단호함에서 비롯되는 고통 역시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고통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의 네 번째 시집 『견자』의 서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너는 고통하는 인간이다./네 가녀린 두뇌는 네 뜨겁고 장엄한 심장 위에서/해바라기처럼 한숨짓는다./네 한숨은 돌 매단 시체 자루처럼/지금쯤 강바닥에 닿았을 것인가.” 「처럼」에도 “고통을 고통하는 고통처럼”이라는 구절이 나오기도 하지만, 박용하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고통하다’라는 기이한 신조어는 그가 삶에 대하여 지니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하는 존재라고 하는 정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몸을 지닌 ‘혼자’로서의 존재론적 한계를 존재 조건으로 전환시키는 비약에 다름 아니다. 고통은 무목적의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게 만드는 충분조건이다. 동물은 죽음과 마주하지 않기에 자연과 합일되어 고통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들은 고독을 모르고 그리하여 어떠한 풍경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음을 모를 것이다. 그들은 축복받은 존재로서, 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피로에 피로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인간은 고통 속에서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돌 매단 시체 자루”같이 무겁기만 한 삶조차도 언젠가는 강바닥에 닿을 것임을 믿으면서 고통을 ‘고통한다’. 지나치게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이 파괴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읽어내려는 열망이 번진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자세는 시시포스의 그것과 겉보기에는 다름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박용하의 자세에는 기다림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간극을 어떻게든 다시 좁히려고 하다가, 자꾸만 굴러 떨어지는 돌처럼 그 간격이 다시 넓어지고 하는 것을 그는 절망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그의 시는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느슨하게 풀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읽어볼 시는 「무(無)의 저녁」이다.

 

 

네가 없는 이곳에는 이곳조차 없다

이곳이 없는 곳에서 너는 어쩌자고 자꾸 돌아오나

매일 다시 태어나 그날 삶을 끝내듯이 살고

이 비루한 거리로 저 석양과 함께 돌아오고 싶구나

돌아와 깔깔대며 소풍 가고 싶구나

네가 없는 나라에 내가 있다

이게 무슨 조화냐

이 저녁때 평범의 극치를 누리고 싶구나

일상의 사치 위에 드러눕고 싶구나 

네가 여기 없는 동안 너는 태어나고

너가 없는 곳에서 나는 죽어간다

 

―「무(無)의 저녁」 부분

 

 

  박용하의 허무주의가 위악적인 포즈에 머무르거나 부정을 위한 부정에 머무르는 변증법적 사유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무’야말로 생산성과 창조성을 일궈내는 밑바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는 그것이 부서져야만 다시 일렁일 수 있다. ‘없음’이 있어야 ‘있음’이 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이 삶을 활기 있게 만든다. 아이러니의 존재론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간 고유의 권한이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인간은 시적 아이러니를 통과시켜야만 비로소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이곳’의 삶이 아무리 시시하고 비루하고 너절한 것이라 해도 계속해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깔깔대며 소풍 가고 싶구나”라고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긍정의 자세 때문이리라. 박용하는 “평범의 극치” 가운데 “일상의 사치”를 발견하며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한 인간의 목숨을 “은하처럼 반짝”이는 “별의 씨앗”(「처럼」)으로 변용시킨다. 

 

  존재는 언제 다시 불이 들어오고 나갈지 모르는 신호등처럼 깜빡이며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하나의 불빛이 들어오면 다른 불빛은 사라지기도 한다. 이때 세계를 재구성해 내야 하는 존재로서 시인은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어서 하나의 글자,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첫줄을 읽고 싶어 첫줄을 쓰는 “호흡곤란”, “생사불명”의 상황을 견뎌야 한다. 하나 박용하는 “아닌 건 아닌 것이다”(「시 읽는 밤」)라고 말하면서 그 절박함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그것이 영영 오지 않더라도 어떤가.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을. 말들을 풀어놓았다가 당기며 박용하는 저녁의 피로함에 울고 또 웃는다. 그는 그것이 삶이라 한다. 또한 그것은 시가 된다.

 

 

글 · 안지영 |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학산문학』 편집위원.

 

 

웹진 월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