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손미
신작시: 그네 옆에서 기다리기 / 해파리 / 나는 실수로 다른 행렬을 따라왔다
자선시: 금 / 오비탈 리플렉터
[시인론] 남승원 “드문 사랑의 시”
신작시
그네 옆에서 기다리기
나는 사이에
왜 떠 있을까
이리 와 줘, 아니 가, 와 줘, 아니,
나는 문턱에서 누구를 데려가야 하나 고민한다
꿈에 나오는 사람은 끊어지지도 않고 귀환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달려가는 놀이터
기다려, 차례차례
한 아이가 그네를 타면 한 아이는 옆에서 기다린다
아이들이 쇠사슬처럼 길어진다
다음은 내 차례인데
줄이 끊긴다 그네의 줄이 끊겨서
나는 엉덩이에 힘을 주고 앉아 보았다
매달리는 마음을 식칼로 내리찍으면서
새벽 놀이터는
너무 조용해 이상하고
한 사람이 공책에 그네를 그린다
내 차례인데
그네를 절도할 것처럼
삐딱하게 앉아서 그네에 붙어 있는 사람
꿈속에 나오는 사람은 끊어지지도 않고 귀환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그네를 타면 세상 모든 그네가 흔들린다
그네를 타고 올라갈 때 나는 잠시 현실이 되기도 했다
내 발끝에 닿는 누군가의 발끝을 터치하면서
멀어지자 다짐하는 순간 더 가까워지는
이상한 마음을 쇠사슬처럼 쥐고
벼랑에서 망설이는 나를 밀어줘
그런 연대를 하자
여기로 와 줘,
아니 가,
아니 와 줘,
아니,
해파리
텅 빈 부케를 들고 입장했다
지금 나는 사라지는 걸까요
나타나는 걸까요
응급실에서 아이의 숨이 잠시 멈췄을 때
피가 다 빠져나가서
느려지는 몸을 흐물거리며
어떻게 나를 죽일까 생각했다
헬기는 비상착륙을 하려고 맴맴 돈다
우주로 보내는 구조요청
유골은 없고요
나는 여기 오래 있었어요
오래 있었는데요
서류 좀 보내주세요
증명
증명
증명
해봐요
카톡방에서 메시지들이 상승한다
보인다는 건 정말 무서워
그때 밖으로 나간 나의 유령은
더 투명해진다
내가 파먹은 나는
봉지를 들고 걸어가면서
찢어지는 것처럼
나는 이제 종이 앞에 가지 않는다
종이보다 얇아졌으므로
안 보이게 됐으므로
그래서 나는 끝나는 건가요 시작하는 건가요
증명할 수 없는
내가 계속 이어진다
아이가 안전가드를 넘어온다
피가 없는 밀랍인형을 들고 온다
조용히 떠다니는 영혼이 보인다는 듯
허공을 보면서 계속 손을 내민다
나는 실수로 다른 행렬을 따라왔다
블록을 쌓다가 무너져 버렸어 그건 나였지 산산이 조각난 블록들은 알록달록해 어제는 오른 뺨이 노랬는데 다시 만드는 뺨은 초록색으로 만들까
새벽마다 공사해서 잠을 설쳤다 한층 한층 쌓아 올리는 건 두려움? 교회?
날마다 죽었다가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왜 자꾸 부활하는 거지?
무인 발급기에서 지문을 인식한다. 오류, 없어요,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 살아났는데요
오류, 오류,
젠가 게임처럼 중간에서 뼈를 빼 보았지
그래도 안 죽고 일어난다
신발장에 서면 거울 속에 거울 속에 내가 나란히 쌓여 있다
층층이 쌓여 있는 계약들
카르마들
나는 파기한다
맨 아래 칸에 네모난 얼음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빌딩으로 돌진하는 비행기처럼
자선시
금
사주에 금이 세 개나 있어서 자꾸만 금을 긋는다 .
죽었으면서 산 척했다.
단톡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금을 긋고 나가는 나를 아무도 보지 않았다. 금속처럼 차가워진 휴대폰에는 잘못 온 우편물 찾아가세요 전 집주인의 문자가 찍힌다. ,
아래층 현관을 발로 차는 소리가 올라온다. 비눗방울 같다.
나는 매일 바닥에 수프를 흘렸다 천장에서 뭐가 새나 봐 아랫집에 누워있는 사람이 나를 볼 것 같아서. 나는 바닥에 귀를 대고 누웠다. 바닥에 부드럽게 번지는 원을 보았다. 금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가려는 입자를 보았다.
씨팔. 언젠가 파티션을 넘어오던 목소리처럼.
밤새도록 아이는 운다.
아이의 울음은 금을 넘어간다.
나는 등을 돌리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생각하면서
손을 뻗어 우는 아이의 등을 두드린다.
어디까지 나일까.
나는 이제 파티션이 없고
수프를 휘저으면서 금을 긋는다.
한 방울씩 수프를 떨어뜨리면서
하루를 보냈다.
다른 물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잠깐씩 입구처럼 금이 벌어진다
그리고는
곧 닫힌다.
오비탈 리플렉터(Orbital Reflector)*
외계에서 온 디엠
오늘도 너의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돌았어
사랑할지 미워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한여름 낮
네가 막 빌딩에서 뛰어내리려 할 때
내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잖아
그건 하지마
재미가 없어
너는 뒤로 젖힌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이글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봤지?
그럼 뭘 해?
그런 의미에서
그럼 다시 팔을 뒤로 젖혀
우주선을 발사하는 듯이
반짝이는 조각품 하나를 올려줄래?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전시될 거야
나는 내려다보고
너는 올려다보면서
감상하기로 해
천체는 왜 떠 있을까
우리는 왜 떠 있을까
안 본 것 말하기 대회
에 나가
나는 너에 대한 말만 했어
시리우스 별을 향해 선 거석들
고대의 제단
나는 그것이 뭔지 알고 있지
나는 못처럼 박혀서 옥상에 서 있어
너는 나를 알고 있지?
내가 누구지?
나는 누구야?
나는 왜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반짝반짝 사방에서 터지는 별사탕을 봐
자세히 보면 사라지는 그건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데
궤도를 돌고 있는 반짝이는 조각품
반짝반짝
구조를 요청하는 것처럼
혼자 시소에 앉았는데
내가 떠 오른다
안 보이는 저쪽에 앉아 있는 건
나의 주인일까
사랑할지
미워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자꾸만 온다
가깝게
반짝이면서
더 가깝게
못 박힌 여기에서
못 죽게 하면서
* 트레버 페글린이 우주로 쏘아 올린 조형물. 지구에서도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반짝이는 조형물이 궤도를 도는 예술품.
손미 l
2009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양파 공동체』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어』, 산문집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삼화맨션』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인론 / 남승원
드문 사랑의 시
2009년 등단 이후 손미 시인은 세 권의 시집을 출간하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우리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시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시인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장의 주인공인 우리들의 행위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작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문득 그의 시세계가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해집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보잘 것 없을 정도로 평범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개개인들에게는 비교대상이 불가능한 고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삶의 현장 가까이에 있는 손미의 시는 독자들 저마다에게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손미의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의 한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살아가는 일의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음에도 삶의 한 가운데에 내던져 있는 듯한 괴로움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나는 실수로 다른 행렬을 따라왔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실수나 하지 않을까 때로는 조바심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성취해가는 과정이라면 으레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겉으로만 보면 남들과 다를 것 없고, 그저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떤 날 아침 문득 “날마다 죽었다가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 듯한 기분을 틀림없이 경험해본 적 있겠지요.
무인 발급기에서 지문을 인식한다. 오류, 없어요,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 살아났는데요
오류, 오류
아마 그렇게 시작한 어떤 날, 증명서가 필요해서 “무인 발급기에서 지문을 인식”했는데 “없는 사람”이라는 문구라도 나온다면 마치 ‘나’라는 사람을 사회가 “오류”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비밀이라도 폭로된 듯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합니다. 단순한 기계의 오작동이라는 것을 뻔히 알지만, “오류, 오류”라고 외치는 기계음이 나의 존재를 정하는 선언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나’라는 존재는 이제 경제적 목적 등과 직접 결부된 “계약들” 사이에서만 명확한 실체를 갖게 됩니다. 더구나 그 계약의 “파기”가 곧 ‘나’의 고유성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어쩌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맺는 ‘계약’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손미의 신작시 「나는 실수로 다른 행렬을 따라왔다」에는 이처럼 때로 불안하고 그래서 조금은 위태롭게도 보이는 우리 삶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자면 손미의 시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의 순간들에서 탄생합니다. 이 같은 손미의 특징이 시적 표현의 주관적 양식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손미가 보여주는 이 같은 시선은 그의 미적 세계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손미 시인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공감과 그 아름다움을 알베르 마르께(Albert Marquet)의 그림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르께는 앙리 마티스와 함께 작품 활동을 했던 화가였기 때문에 흔히 ‘야수파(fauvism)’ 중의 하나로 분류되곤 합니다. ‘야수’라는 표현이 이들의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 한 미술 평론가의 감탄에서 나온 것처럼, 야수파의 특성은 아카데미 미술의 권위에 저항하는 강렬한 표현과 색채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께는 점차 해변이나 항구, 강변 등의 풍경을 자기 그림의 중요한 주제로 삼았습니다. 균형이 맞지 않은 것처럼도 보이는 바다(또는 강)와 뭍과의 대담한 이중 대비, 강렬한 색채 등을 야수파 운동에 참여했던 흔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른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과는 구별되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특히 마르께 그림 속의 인물 표현에 주목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자신의 풍경화에 거의 빠짐없이 인물을 포함시키고 있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지는 않습니다. 멀리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거나, 또는 가까이 있다고 해도 뒷모습을 포착할 뿐입니다. 그림의 구도상 화가의 바로 앞에 있는 인물임에도 모자를 쓰고 있거나 또는 웅크리고 흙놀이를 하고 있는 듯한 동작만 표현될 뿐 얼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얼굴이 드러나 있는 경우에도 거리감을 주면서 눈, 코, 입을 그리지 않아 전반적으로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은 식별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그림에서는 그늘에 앉아 있는 인물의 경우 아예 검은색으로만 칠해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르께의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얼굴 표정도 알 수 없고, 아주 작게만 그려져 있는 인물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일렁이는 물결이나 뭉게구름 등에 압도되는 것도 잠시, 그림 앞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면 이내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에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르께의 풍경화 앞으로 우리를 다시 이끄는 힘도 바로 그림 속 인물들과의 깊은 공감입니다.
얼굴 표정도, 구체적 정황도 드러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조금은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그러니까 저마다 개성적이면서도 또 누구나 다를 것 없이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만일 화가라면 자신이 포착한 그 삶의 모습을 거대한 풍경 속에 그려넣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얼굴은 흐릿해서 표정도 볼 수 없고, 심지어 등을 돌리고 있는 인물의 내면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그들의 삶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만일 시인이라고 한다면 어떤 대상을 통해서라도 거기에 축적된 사람들의 숨결을 읽어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손미가 그리는 세계에서 우리가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같은 그의 시선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제 기억에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아 있는 「회전 테이블」을 먼저 떠올려볼까 합니다. 두 번째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에 수록된 이 작품의 배경은 한 “중국 식당”, 더 구체적으로는 중국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전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러명이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한 이 곳에서 시인은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식사하는데
왜 테이블이 돌고 있나
허겁지겁 사랑은 끝났는데
왜 테이블이 다시 오나
저쪽에서 누가 울고 있다
젖은 테이블이 왜 이리로 오나
식은 밥이 빙글빙글 돌고 있나
왜 다시 오나
바로 그때 손미의 시선은 언젠가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그 자리에 앉았던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얽힌 사연을 되살려 냅니다. “빙글빙글 돌고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는 손미의 시선에는 “따뜻한 음식”을 서로에게 밀어주던 “사랑”이, 또 그것이 “허겁지겁” 끝나버린 뒤 “울고 있”는 누군가의 아픔이 생생하게 포착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안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손미의 눈을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일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신작시 「그네 옆에서 기다리기」는 그래서 인상적입니다. ‘그네’를 바라보는 손미의 시선은 두 지점을 향합니다. 먼저, “아이들이 하원하고 달려가는 놀이터”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듯이 그네를 타기 위해 아이들이 몰려든 상황입니다. 그네보다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진 이 순간 “아이들이 쇠사슬처럼 길어진다”는 표현에 직접 드러나 있는 것처럼 이때 그네에는 그것을 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욕망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따라가다 보면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새벽 놀이터”의 비어 있는 그네에서조차 자신의 “차례”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네의 궤적입니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네 타기를 떠올리는 손미에게 그네는 멈춰있을 때조차 그 다양한 움직임들을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운동성으로 포착됩니다. 따라서 만일 그네를 타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 한 사람의 움직임은 결국 그네에 앉았던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과 필연적으로 겹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네를 탄다는 것은 시인의 표현대로 “내 발끝에 닿는 누군가의 발끝을 터치”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벼랑에서 망설이는 나를 밀어줘
그런 연대를 하자
여기로 와 줘,
아니 가,
아니 와 줘,
아니,
「그네 옆에서 기다리기」는 결국 “누군가 그네를 타면 세상 모든 그네가 흔들”리는 경험의 공유가 가능해지는 순간에 대한 목격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미는 그네의 움직이 보여주는 특유의 역동성에 주목하고, 그것이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진 두 힘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역동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질문합니다.
「오비탈 리플렉터(Orbital Reflector)」에서 이는 다시 한 번 명확해집니다. 여기에서 손미는 우주 공간을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고자 노력하는 한 예술가의 작품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우주에 보내는 최초의 예술 작품인 ‘오비탈 리플렉터’는 이름 그대로 반사면을 가지고 있어 지구 곳곳에서 관찰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 기획입니다. 이 예술 작품이 손미에게 포착된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구상의 인류 전체를 소통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오비탈 리플렉터’의 목적은 곧 서로 달라 보이지만 또 같은 모습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 삶을 탐구하는 그의 시선과 그대로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손미는 우리 머리 위에서 빠르게 우주 궤도를 지나가고 있는 물체와 조우하는 한 사람 간의 거리에 시선을 둡니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저 높은 위치에서 서로를 “감상”하는 일에 불과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아름다움이 사실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임에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때도 있을 겁니다.
사랑할지
미워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자꾸만 온다
가깝게
반짝이면서
더 가깝게
못 박힌 여기에서
못 죽게 하면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인간관계란 이처럼 미처 “결정하지 못했는데”도 계속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유일한 계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손미의 시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해본 알베르 마르께는 사실 지독한 근시였다고 합니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실제 안경을 쓰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왼쪽 얼굴이 상대적으로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쪽의 안경테는 거의 보이지 않고, 왼쪽 눈은 마치 감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얼굴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그의 풍경화 속 인물들을 나타내는 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기도 합니다.
저는 근시에서 비롯되었을 인물 표현 방식이 어쩌면 마르께만의 미적 특징이 된 것으로 생각해봅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을 보다 명확히 그리기 위해 자신의 상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더 가까이 가고 주변의 사람들을 더 이해해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입니다. 손미의 시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타인의 처지와 감정을 섣불리 말하기보다 수많은 감정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우리 삶의 교차로에 서 있기를 선택합니다. 타인에게 특정한 방향을 일러주기보다 길을 잃고 걸어가는 자와 말없는 동행을 자처합니다. 가끔은 “드문드문 사랑을”(「사울, 나 여기 있어 ― 제부도」,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합니다.
©대산문화
남승원 l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질문들의 곁에서』 『경계선 지우기』가 있음. 〈젊은평론가상〉 〈경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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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호(VOL.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