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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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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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성동혁

  신작시: 화염 / 문맥 / 안뜰과 주치의

  자선시: 메아리 / 무화과 파운드

  [시인론] 김지윤 “타오르고 갉히고 부서지는, 안쪽의 꽃에 대하여”

 

 

 

 

 

 


 신작시 


 

 

 

 화염

 

 

 

 

 

 심장은 공범이다 오른 적도 없는 곳으로부터

 실족시키러 오고 있다 감출 것도 없는 곳에서

 들키고 있다 건조대 위 뒤집어진 바지처럼

 떨어지고 있다 흰 주머니가

 덜컹거리며 드러나고 있다

 부호가 될 수 있다면

 한 손에 쥐어지는 죽음을 사들일 텐데

 떨어진 눈썹을 깔고 앉아 시계 방향으로 타오른다

 중심으론 갈 수 없는 초침처럼

 멀고 분주하게 푸른 불꽃을 보며

 붉게

 타오르는 것

 

 

 

 

 

 

 

 

 

 

 



 

 

  문맥

 

 

 

 

 

 어부가 거둬둔 의자 위로 설치류가

 쏟아진다 바다를 갉는다

 빈 그물

 나무에 걸어 놓으면 구름

 그새 날개를 달고 빠져나간다

 과거를 노예로 팔아넘길 순 없다

 잘 빗은 얼굴로 충실해져야 살 수 있다

 모든 죄인이 독방에서 죽는 건 아니고

 죽으며 말한다고

 모든 말이 유언이 되는 건 아니다

 윤슬 사이로

 앞니가 돋는다

 끊으려 하면 두꺼워지는 그물 사이

 쥐도 새도 아니게

 해안을 따라 저무는 시인

 

 

 

 

 

 

 

 

 

   

 



 

 

 

  안뜰과 주치의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 1

  

 

 

 

 엘리베이터에서

 유모차에 탄 개를 만났다

 처음 만났지만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는구나

 

 산소발생기를 틀면

 작은 구슬이 올라간다

 

 낮엔 산소발생기를 점검하러 왔다

 다음부터는

 다른 직원이 온다 했다

 십 년 넘게 본 직원분인데

 몸 관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현관을 나갔다

 

 며칠 전엔

 아버지가 복숭아를 깎아 두고 가셨다

 

 복숭아가

 늙은 개처럼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희고 늙은 개와

 올라간다

 

 영원한

 피부양자

 

 짖을 힘도 없이

 반가워할 힘도 없이

 

  

 

 

 

 

 

 

 

 

 


 자선시 


 

 

 

 메아리

  

  

 

 

 

 우린 작은 선동가였다 사랑 사랑 사랑

 번질 수 있다고 믿으며 사랑 사랑 사랑

 해서 포도주를 나누어 따르고 사랑 사랑 사랑

 갑각류의 살을 발라 접시에 올려 주며

 프레골라를 골똘히 씹으며

 사랑 사랑 사랑 사 랑 사 랑 사랑

 물음을 갖지 않아 사랑 사랑 사랑

 하다가 물음이 생겨 떠난 사람의 의자를 빼놓고

 믿음 소망 사랑 사랑 사랑 선창하며

 후창하던 사람이 사라져도 사랑 사랑 사랑

 일월 이 일의 일출 같은 외로움으로

 빈 잔을 돌리며 사랑 사랑 사랑

 

 

 

 

 

 

 

 

 

 

 


 

 

 

 무화과 파운드

 

            

 

 

 1 

 

 정해진 걸 지킨다

 덜 다치고 싶어서

 

 덜 다치게 하고 싶어서

 

 새를 친 적 있다

 핸들을 쥔 손에 새의 살과 뼈가 느껴졌다

 

 빈 횡단보도를 가로지르지 않는 건

 길을 건너는 영혼의 옆구리를 치고 가는 것 같아서다

 

 멈춰 있는 것들을 지날 땐 조심해야 한다

 귀신은 여행을 하지 않으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부서진다 가까운 것들이 죽는 꿈을 꾼다

  

 2 

 

 귀마개를 끼고 무화과 파운드를 먹는다

 달게 들어와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내내

 사랑했던 사람이 그랬다 그가 사라지고

 돌이킬 수 없는 행성처럼

 온갖 것들과 부딪쳤다

 어금니 사이 무화과 씨처럼 무얼 먹어도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전속력으로 오는 중이었고

 나도 그를 향해 힘껏 날아오르려 했을 뿐이었다

 

 

 

 

 

 

 

 

 

 

성동혁  ■

2011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6』 『아네모네』, 산문집 『뉘앙스』가 있음.

 

 

 

 

 

 

   


 시인론 / 김지윤 


  

 

 

 

 

타오르고 갉히고 부서지는, 안쪽의 꽃에 대하여

—성동혁의 신작과 근작에 부쳐

 

 

 

 

1. 감출 것도 없이 들키는 심장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할 때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순간, 이름에 담기지 못한 것들은 조용히 지워진다.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그렇다. 꽃이 없는 열매. 그러나 무화과에도 꽃이 있다. 다만 바깥으로 피지 않고 열매처럼 보이는 둥근 주머니 안쪽, 우리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핀다.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화과는 ‘꽃이 없다’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무화과는 꽃을 숨긴 적이 없다. 그 안으로 기어드는 작은 말벌에게 무화과의 꽃은 한 번도 감추어진 적이 없었다. 말벌은 그 꽃들 사이에 알을 낳고, 새끼들은 그 안에서 자라 다시 다른 무화과를 찾아 날아간다. 어떤 존재들은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다른 존재의 삶에 깊이 참여한다. ‘숨겼다’는 말은 꽃이 마땅히 바깥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쪽의 말이다. 안쪽에 있는 것을 '비밀'이라 부르는 데에도 같은 생각이 깔려 있다. 바깥에 드러난 것을 정상으로 여기고, 보이지 않으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품는 것이다. 무화과를 ‘보이지 않는 데서도 꽃은 핀다'는 위로의 상징으로 읽는 것조차 무화과의 낯선 방식을 받아들이기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꽃이 ‘피었다’는 말을 ‘보았다’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써 왔다. 무화과라는 이름은 그 오래된 착각의 기록이다. 그러나 꽃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다. 개화는 한 존재의 내부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일이다. 그 변화를 누군가 보았는지, 그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였는지, 그 순간을 기억하는 이가 있는지는 꽃이 피었다는 사실보다 뒤에 오는 문제다.

무화과는 우리에게 자신의 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결핍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을 끝내 확인하고 싶어 한다. 무화과의 꽃을 직접 보려면 열매처럼 보이는 주머니를 갈라야 한다. 꽃이 정말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무화과는 훼손된다. 존재를 알기 위해 그 존재의 방식을 깨뜨려야 하고, 인정하기 위해 우리가 아는 형식으로 환원해야 한다면, 인식이란 어쩌면 존재가 지닌 어떤 부분을 필연적으로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닐까.

전작 『아네모네』(봄날의책, 2019)의 표제시 「아네모네」에서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지닌 플로리스트가 내미는 꽃을 원하지 않았다. 전지가위로 잘라 화병에 꽂는 순간 꽃은 우리가 아는 아름다움의 형식 안에 정돈된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꽃은 죽어 가기 시작한다. 「브로치」에서 시인이 “미래 / 희망 / 이런 말들은 누가 꽂아 놓은 꽃꽂이인가”라고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을 생각해 보자. 온갖 재앙이 빠져나간 뒤에도 희망만은 그 안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희망이 희망일 수 있었던 것은 끝내 꺼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희망을 꺼내어 그 모습을 확인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단 하나의 미래로 좁혀진다. 그리고 그 미래가 실현되지 않을 때, 희망은 때로 절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

이번에 만난 성동혁의 새로운 시들에서 ‘꽃’은 안쪽, 몸과 열매의 내부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고, 갉히고, 울리고, 부서진다. 이 시들은 바깥으로 피지 않는 꽃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식,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이 들리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화염」은 “심장은 공범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심장은 몸의 가장 안쪽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채 뛰는 기관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바로 그 가장 안쪽의 것이, 몸의 한가운데서 생을 지탱하는 기관이 나를 배반하는 편에 가담해 있다. 심장은 “오른 적도 없는 곳으로부터 / 실족시키러 오고” 있으며, 나는 “감출 것도 없는 곳에서 / 들키고 있다”.

‘들킨다’는 말은 본래 무언가를 감추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감출 것이 없는데도 들킨다면,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어떤 혐의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픈 몸은 그렇게 들킨다. 가쁜 숨소리로, 창백한 낯빛으로, 계단 앞에서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숨기려 한 적 없는 것이 매 순간 타인의 눈앞에 드러나고, 드러날 때마다 죄 없는 자백이 된다.

“오른 적도 없는 곳”에서의 실족도 그렇게 읽힌다. 오른 적 없는 높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기준의 높이에서 내가 측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높이에서 보면, 거기 이르지 못한 몸은 그곳에 올라 본 적도 없는데도 이미 추락한 몸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심장을 주범이 아니라 ‘공범’이라 부른다. 우리는 어떤 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으니, 몸이 저지르는 일의 주모자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몸으로 살고 숨 쉬는 한, 우리는 끝내 그 일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주범은 밝혀지지 않고 공범들만 남아 있는 사건. 어쩌면 그것이 몸을 가지고 산다는 일일 것이다.

시인은 그 모습을 “건조대 위 뒤집어진 바지”에 견준다. 뒤집힌 바지에서 드러나는 “흰 주머니”는 가장 안쪽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까뒤집혀 햇볕 아래 널린 형상이다. 무언가를 품기 위해 만들어진 주머니가 이제는 제 안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뒤집힌 주머니는 더 이상 무언가를 품지 못한다. 여기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호가 될 수 있다면 / 한 손에 쥐어지는 죽음을 사들일 텐데”라고.

‘부호’는 재산이 많은 부호(富豪)이면서 동시에 기호로서의 부호(符號)로도 읽힌다. 기호는 누구나 읽을 수 있다. 마침표가 문장의 끝을 뜻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분명히 읽히는 기호가 될 수 있다면, 나의 끝 역시 한 손에 쥐어지는 단정한 마침표가 되어 분명한 형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죽음을 살 수도, 자신의 끝을 하나의 기호로 확정할 수도 없다. “한 손에 쥐어지는 죽음”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끝내 제 손에 쥘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되고, 심장은 공범으로서 그 삶을 이어 간다.

시적 주체는 “중심으론 갈 수 없는 초침처럼” 원의 바깥을 돈다. 초침은 중심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중심에 이를 수 없다. 중심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곳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시계의 축은 제자리에 있고, 시간을 가리키며 움직이는 것은 바늘의 끝이다. 화자는 그렇게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중심에 닿지 못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시간을 견딘다.

불꽃의 가장 뜨거운 부분은 푸르고,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부분은 붉다. 화자는 “멀고 분주하게 푸른 불꽃을 보며 / 붉게 / 타오르는 것”이다. 여기서 푸른 불꽃은 화자가 도달해야 할 완전한 삶의 형상이 아니다. 붉은 불꽃 역시 푸른 불꽃이 되지 못한 실패가 아니다. 다만 두 불꽃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온도로 타오른다. 그런데도 화자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며 붉게 탄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타오르면서도 다른 불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 거리야말로 시가 끝내 지우지 않는 고통이다. 붉게 타오르는 것은 푸르게 타오르지 못한 결핍이 아니라, 다른 온도로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생이다.

    

2.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들 

 

「문맥」은 바닷가에서 시작한다. “어부가 거둬둔 의자 위로 설치류가 / 쏟아진다 바다를 갉는다 / 빈 그물 / 나무에 걸어 놓으면 구름 / 그새 날개를 달고 빠져나간다”. 그물은 무언가를 알아내고 붙잡으려는 일의 오래된 은유다. 그물은 제 그물코보다 큰 것만 붙잡고, 그보다 작거나 다른 모양을 한 것은 그대로 흘려보낸다.

이 시의 그물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다. 나무에 걸리자 구름이 되고, 그사이 무언가는 날개를 달고 빠져나간다. 바다를 갉던 설치류마저 날개를 달고 그물의 바깥으로 사라진다. 붙잡으려는 사이 붙잡으려던 것의 형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식의 그물은 세계를 다 담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을 붙잡을 수 있는지조차 미리 알지 못한다.

시의 한가운데에는 잠언 같은 문장들이 놓인다. “과거를 노예로 팔아넘길 순 없다 / 잘 빗은 얼굴로 충실해져야 살 수 있다 / 모든 죄인이 독방에서 죽는 건 아니고 / 죽으며 말한다고 / 모든 말이 유언이 되는 건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잘 빗은 얼굴”이 필요하다. 타인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정돈해야 한다. 죽어 가며 한 말이라고 모두 유언이 되지는 않는다. 그 말을 받아 적고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이 있어야만 말은 유언이 된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문맥 안에서 읽힐 때에야 비로소 인정받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거를 팔아넘겨 지울 수 없으며, 이미 지나온 문맥 속에서만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다. 잘 빗은 얼굴로 하루하루에 충실해지는 일은 그 문맥을 짊어진 채 살아 내는 방식이다.

“윤슬 사이로 / 앞니가 돋는다”. 수면 위에서 반짝이던 잔물결이 어느새 설치류의 앞니가 된다.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동시에 무언가를 갉아 들어가는 이빨이라는 것, 성동혁의 시에서 매혹과 두려움은 늘 이렇게 한 몸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끊으려 하면 두꺼워지는 그물 사이 / 쥐도 새도 아니게 / 해안을 따라 저무는 시인”.

‘쥐도 새도 모르게’라는 관용구가 비틀려 “쥐도 새도 아니게”가 되었다. 시인은 땅을 갉는 쥐도, 하늘로 빠져나가는 새도 아닌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 존재다. 그물이 붙잡을 수 없는 모양을 한 그 존재는 바다와 땅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해안선을 따라 저문다. 해는 저물며 수면 위에 가장 긴 윤슬을 남긴다. 그 해안선은 어쩌면 시인이 서 있는 유일한 문맥일 것이다. 끊으려 할수록 두꺼워지는 그물처럼 우리는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무는 것은 사라지는 것과 다르다. 존재가 아직 그곳에 있으면서도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쥐’도 ‘새’도 아닌 그에게는 이름이 없지만, 그래도 그는 존재한다. 끝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는 그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어두워진다. 이것은 끝내 다른 이름으로 바뀌지 않은 채 살아가는 한 존재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름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에게도 삶을 지속하기 위해 타인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은 찾아온다. 「안뜰과 주치의」는 이번 신작시들의 질문을 삶과 죽음이 맞닿는 자리로 가져간다. 이 시에는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 1”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는다. 대신 엘리베이터 안, 거실, 현관 같은 일상의 좁은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부제 끝의 숫자 ‘1’은 이것이 결론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연작, 계속해서 물어야 할 질문의 첫 번째 항목임을 알려 준다.

화자는 엘리베이터에서 “유모차에 탄 개”를 만난다. “가만히 있어도 / 숨이 차는구나”. 처음 보는 개지만 그는 단번에 알아본다. 유모차에 탄 개와 산소발생기에 기대어 사는 화자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자신의 몸만으로는 삶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집에는 산소발생기가 있고, 그것을 틀면 “작은 구슬이 올라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소의 흐름이 작은 구슬의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구슬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숨의 고단함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십 년 넘게 기계를 점검하러 오던 직원은 다음부터 다른 사람이 온다는 말과 함께 “몸 관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현관을 나선다. 십 년 동안 한 사람의 숨을 지탱하는 장치를 돌보던 이가 떠나면서 남긴 것은 지극히 평범한 안부다. 그 말에는 오랜 관계의 무게가 다 담기지 않는다.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복숭아다. 며칠 전 아버지가 깎아 두고 간 복숭아는 ”늙은 개처럼 변해 있었다”. 공기에 닿은 과육이 갈색으로 변해 가는 것은 산소가 하는 일이다. 생을 붙드는 산소가 동시에 모든 것을 늙게 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묘하게 우리를 두렵게 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우리를 시들게 한다니. 과일은 시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변해 가지만 시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러나 아직도”라고 쓴다.

화자는 “희고 늙은 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간다. 그 상승은 삶의 층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이동이면서 어딘가 더 높은 곳을 향한 예감처럼도 읽힌다. 그리고 시는 “영원한 / 피부양자”라는 말에 이른다. 피부양자는 건강보험 서류에나 등장하는 용어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피부양자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품에 전적으로 기대어 태어났고, 병들면 다시 기대며, 늙으면 또 기대게 된다. 혼자 서 있다고 믿는 시간조차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에 기대어 있다. 어쩌면 독립이란 의존과 의존 사이에 잠시 끼어 있는 짧은 막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기대어 산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가장 오래된 조건이 아닐까. “영원한 피부양자”라는 말은 자조처럼 들리지만, 인간에 대한 가장 정직한 정의이기도 하다.

「메아리」는 그물을 빠져나가 허공에서 되돌아오는 말에 대한 시다. 이 시는 한 단어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린 작은 선동가였다 사랑 사랑 사랑”. “포도주를 나누어 따르고”, “갑각류의 살을 발라 접시에 올려 주며”, “프레골라를 골똘히 씹”는 식탁 사이로 “사랑 사랑 사랑”이 후렴처럼 끼어든다. 시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익숙한 성구를 불러오고, “선창”과 “후창”이라는 전례의 형식을 빌려 온다. 선창과 후창은 같은 말을 같은 형식으로 되받는 일이다. 그 형식 안에서 사랑은 번져나가고, 공동체는 하나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는 “물음을 갖지 않아” 사랑을 외쳤고, 그러다 “물음이 생겨 떠난 사람”이 생긴다. 남은 이들은 그의 의자를 빼놓고 계속 선창한다. 공동체는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를 들을 수 있는 형식이 없어서 배제한다.

남은 이들의 “사랑 사랑 사랑”은 이제 아무도 받지 않는 선창, 제 목소리만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된다. “일월 이 일의 일출 같은 외로움으로 / 빈 잔을 돌리며 사랑 사랑 사랑”.

메아리는 대답이 아니다. 산에서 소리를 치면 돌아오는 것은 조금 늦게 도착한 내 목소리다. 그러니 메아리는 응답이 아니라, 응답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의 증거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산에 오르면 소리를 치고, 돌아오는 제 목소리에 위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말이 어딘가에 닿았다가 돌아왔고, 적어도 허공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 우리가 원한 것은 어쩌면 그 정도의 확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같은 낱말을 오래 되뇌다 보면 그 말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이 온다. 의미는 빠져나가고 혀끝에 소리의 모양만 남는다. 시 속에서 “사 랑 사 랑”으로 띄어 쓰인 글자들은 바로 그 순간, 너무 많이 불려서 음절로 부서지기 시작한 사랑의 형상이다.

모두가 환호하는 첫 일출이 지나고, 해는 어제와 똑같이 떠오르지만 아무도 그것을 축하하지 않는 이튿날. 빈 의자 앞에서 빈 잔을 돌리는 그 외로움 속에서야 비로소 의문이 스쳐지나간다. 우리가 부른 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형식이었는지. 응답을 보장받지 못한 채 건네지는 말을 우리는 때로 기도라고 부른다. 이 메아리는 이제 기도에 가깝다.

   

3. 부서지는 소리로만 아는 것 

 

「무화과 파운드」의 화자는 정해진 것을 지키는 사람이다. “덜 다치고 싶어서 // 덜 다치게 하고 싶어서”. 그는 아무도 없는 빈 횡단보도에서도 신호를 지킨다. 텅 빈 길을 가로지르는 일이 “길을 건너는 영혼의 옆구리를 치고 가는 것 같아서”다. 눈에 띄지 않는 “영혼의 옆구리”까지 헤아리는 사람이다. 그는 운전하다 새를 친 적이 있고, 그때 핸들을 쥔 손으로 새의 살과 뼈를 느꼈다. 무언가의 안쪽을, 그것도 그 무언가를 부서뜨리면서 알게 된 경험이 그를 조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무화과의 안쪽은 쪼개지고 씹히고 부서지는 소리로 알려진다. 귀를 막으면 바깥의 소리는 줄어들지만 몸 안의 소리는 오히려 커진다. “달게 들어”온 빵은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내내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진 뒤 화자는 “돌이킬 수 없는 행성처럼 / 온갖 것들과 부딪쳤”고 “어금니 사이 무화과 씨처럼 무얼 먹어도 /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화자는 귀마개를 끼고 무화과 파운드를 먹는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꽃이 사랑이 사라진 뒤에야 어금니 사이에서 부서지는 소리로 자신이 있었음을 알린다. 귀를 막을수록 더 크게 들리는, 안에서만 울리는 소리로.

어쩌면 사랑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얼마나 컸는지는 그가 사라진 뒤에야, 모든 것과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를 통해서야 비로소 확인된다. 어떤 진실은 파괴하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역설이 이 시에서는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시는 마지막 세 행에서 처음의 장면을 뒤집는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전속력으로 오는 중이었고

나도 그를 향해 힘껏 날아오르려 했을 뿐이었다

—「무화과 파운드」에서

 

이 시의 1부에서 새를 친 것은 화자였다. 그러나 이제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은 그이고, 그를 향해 힘껏 날아오르려 한 것은 나다. 화자는 어느새 새의 자리에 서 있다.

이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다. ‘불가피했다’는 말은 그런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익숙한 형식이다. 그 형식에 넣으면 사건은 이해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 환원을 거부하고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고 한다. 이해 가능한 형식으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일어난 일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한번 일어난 일은 일어난 채로 영원히 남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무화과의 씨처럼 오래도록 씹힌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정돈하는 순간 지워지는 것은 그 사건 속에서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다가가던 두 존재의 움직임이다. 그는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날아오르려 했다.

이 시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자꾸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상이나 익숙한 해명을 찾으려 한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동혁의 시는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쪼개어 안쪽을 보여 주지 않고, 증명하지 않으며, 우리가 아는 형식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서 자기 식대로 타오르고, 다르게 저물고, 자기 호흡으로 숨 쉴 뿐이다. 성동혁의 세 편의 신작들은 모두 타인의 삶을 온전히 알 수 없어도 그 삶에 관여하고, 때로는 그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네모네』에 대한 지난 서평에서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그냥 닫아 두자”고 썼다. 이번에는 무화과를 쪼개지 않고 손바닥 위에 올려 두는 일을 생각한다. 그 안에 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갈라 확인하지 않는 일. 내가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내게 보이는 모습만이 그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시를 읽는다는 것도,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끝내 그런 일인지 모른다.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 존재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곁에서 오래 머무는 것. 그렇게 손을 거두고 머물러 있다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무화과의 안쪽에서는 오래전부터 꽃이 피고 있었다. 꽃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우리가 꽃을 기다리던 방향이 틀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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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피로의 필요』, 공저 『한국 현대문학의 쟁점과 전망』 『요즘비평들』 등이 있음. 〈시와시학상〉 수상.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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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호(VOL.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