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강정숙
신작시: 한밤의 황사 / 나의 아나키스트 / 그해 여름
자선시: 거룩한 도구 / 다랑논
[시인론] 김재홍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경영”
신작시
한밤의 황사
나미브 모래언덕은 바람의 무덤이다
안으로 곡을 쟁여 여울 치는 빗살무늬
자발적 고립에 갇힌 순결한 저 입자들
형태며 질감 모두 빠져나간 손끝에서
모래가 울고 있어요. 모래가 뛰고 있어요.
당신은 아이가 되어 잠 속에서 소리친다
모래도 살아 있어 칭얼대다 잠드는가
사람의 마을을 찾아 보자기를 씌우는
한밤의 불청객들이 소리 없이 몰려온다
나의 아나키스트
눈썹 말간 얼굴로, 벽을 쥔 안간힘으로
내 타성과 나태와 지리멸렬을 비웃으며
삐딱한 바닥의 자세를 나무라는 저것은
오래전 베어버려 사진첩에나 있다가
다시금 숨을 얻어 낭창하게 뻗어 올라
큼큼한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저것은
어쩌면 다시 한번 잘라줘야 할까 보다
더 큰 가지로 자라 중심을 흩트리고
무시로 들입다 받을 외뿔 같은 저것을,
그해 여름
폐가의 쪽마루에
오래 묵힌 땟국 닮은
구름과
햇살 사이로
하늘이 자주 울고
그 여름
장마 끝에는
꽃들이
뚝뚝 졌다
자선시
거룩한 도구
검푸르게 변색된 옛 수저를 닦는다
두툼했던 살집은 시나브로 얇아졌다
닳아진 그 시간만큼 손잡이도 굽었다
문지르면 지워질까 검정 때 묻은 날들
쓸쓸했던 사연은 벼리면 빛이 날까
먹먹한 시간을 건너 다시 피는 문양들
신접살림 1호 보물이 퇴물이 되기까지
모래 밥 소금 찬(饌)도 마다 않고 퍼 올렸던
나란히 또 어긋난 채, 달그락대는 수저 두 벌
다랑논
가난이며 척박의 맨 처음 어원 같은
물지게에 깊게 팬 등골의 지문 같은
당신의 손바닥 닮은 그 언덕 다랭이논
접질린 허리마다 부목을 덧대고서
한 바가지 빗물로 마른 목을 축인다
층층이 등을 맞대어 한 마지기 논이 된다
삶에도 층이 있어 높거나 낮아져도
계절은 쉬 바뀌고 달빛은 고루 퍼져
비탈진 한 뼘 땅에도 씨뿌리는 사람 있다
강정숙 l
2002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등단.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 시조집 『천 개의 귀』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시인론 / 김재홍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경영
— 강정숙의 시편이 구현해낸 ‘자유’의 의미
현생 인류는 언어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언어 이전에 인간이 먼저 있고, 나중에 획득된 게 아니라는 것이 진화생물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들숨과 날숨의 규칙적인 반복 운동이 기도와 폐와 뇌(브로카 영역)의 정교한 협업에 따라 이루어지듯, 그 과정에서 성대와 혀와 구강구조의 미세한 울림이 언어의 탄생을 가능케 한 생물학적 조건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숨쉬기의 규칙성이 언어에 일정한 리듬을 선사했고, 그것을 따라 의미보다 음악성이 본질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언어는 무엇보다 율격과 리듬을 따라 성숙해졌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언어는 음악과 함께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대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기도와 폐의 용량과 호흡 중추의 조절 기능이 미세한 차이를 가지므로 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를 구별할 수 있고, 어머니와 어머니의 이웃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호의와 적의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생물학적 기초는 인간의 생존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언어의 음악적 성격은 최초의 시가 우선 율격과 리듬의 정형적 속성을 따라 출발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15만 년 전 갓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들은 시와 음악을 구별하지 않았고, 정형시와 자유시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음송하는 시의 가락을 향유했고,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자신들의 신산고초를 위무한다는 데 호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시인은 사냥꾼인 동시에 음악가였고, 심마니인 동시에 연주자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활력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호메로스나 핀다로스의 시는 물론이고 굴원의 「어부사」나 이백과 두보의 절구들이 보여주는 음악성은 그것이 왜 불후의 반열에 올라선 것인지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가요나 조선조 가사와 시조의 강렬한 음악성은 현대 자유시의 ‘자유’가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 발전의 귀결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합니다. 가령 “홍진(紅塵)에 묻힌 벗내 이내 생애 어떠한고? / 옛 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라는 「상춘곡」(정극인)의 도입부나 “이 몸이 생겨날 때 임을 좇아 생겨나니, 한평생 인연임을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라는 「사미인곡」(정철)의 구절은 오늘의 시인들에게 ‘자유’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유시가 완벽한 자유의 구현이 아니듯 정형시가 완전한 구속이 아님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여기 있습니다. 언어의 본성인 음악성과 시적 의미론의 엮음새를 오롯이 발현하고 있는 강정숙의 작품들입니다. 그의 작품은 분과학문에 대한 예찬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듯, 시에 대한 분석적 이해가 더는 유효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국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경영을 통해 융합과 통섭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미브 모래언덕은 바람의 무덤이다
안으로 곡을 쟁여 여울 치는 빗살무늬
자발적 고립에 갇힌 순결한 저 입자들
형태며 질감 모두 빠져나간 손끝에서
모래가 울고 있어요. 모래가 뛰고 있어요.
당신은 아이가 되어 잠 속에서 소리친다
모래도 살아 있어 칭얼대다 잠드는가
사람의 마을을 찾아 보자기를 씌우는
한밤의 불청객들이 소리 없이 몰려온다
- 「한밤의 황사」 전문
특히 각 수의 종장 첫 구에는 엄격한 자수율이 적용되었습니다. 글자의 수는 호흡의 길이와 연결돼 있고, 그것이 띄어 읽기의 간격을 따라 일정한 가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언어)는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언어의 연속성 패러다임을 따릅니다. 그래서 이 작품도 자수에 따라 차례대로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히 시인의 호흡이 읽는 이의 숨쉬기로 옮아옵니다. 의미보다 먼저 리듬이 감각되고, 그 속에서 시인의 정갈한 내면이 형형색색의 언어적 의상으로 외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1수는 나미브사막의 ‘모래 언덕’이라는 시각적 이미지가 ‘바람의 무덤’이라는 의미론적 역전을 표현한 시구로 시작되었습니다. 모래 언덕의 형상이 바람이라는 운동체의 동작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인과론적 이해가 ‘무덤’이라는 인생론적 통찰로 심화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람의 형상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마주한 상대의 모양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 장의 시어 ‘무덤’의 연속성에 따라 중장의 “안으로 곡을 쟁여 여울 치는 빗살무늬”가 납득할 수 있는 시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집니다.
작품은 종장을 통해 한 단계 더 깊이 파고듭니다. “자발적 고립에 갇힌 순결한 저 입자들”은 우선 나미브사막의 모래 언덕이 보여주는 외적 양상이지만, ‘무덤’과 ‘곡’(哭)을 따라 생의 가장 처연한 국면인 ‘자발적 고립’이라는 내적 성찰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 제1수는 시편 전체의 시공간을 획정하면서 시상(詩想)을 바깥에서 안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수는 정지된 ‘무덤’을 입체화하고 있습니다. 중장 “모래가 울고 있어요. 모래가 뛰고 있어요”는 ‘자발적 고립’ 속에도 강렬한 내적 운동이 있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그것은 마치 잠자는 아이들이 꿈속에서 온 동네를 활보하는 것과 같은 역동적인 이미지입니다. 정지란 ‘가장 느린 운동’이라고 통찰한 라이프니츠의 그것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대상의 운동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운동이 품고 있는 내면성입니다. 어디까지나 시인의 내면에 투사된 ‘자발적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수는 앞선 두 수의 시적 논리를 종합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따라 모양을 갖추는 모래 언덕을 살아 있는 주체로 인식하고, 그것이 아이처럼 칭얼대는 소리로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미브사막은 ‘사람의 마을’인 것입니다. 허허벌판 모래사막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강정숙의 「한밤의 황사」에서 정제된 율격과 리듬을 따라 ‘무덤’과 ‘고립’의 의미를 묻고 되묻는 한 서정적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눈썹 말간 얼굴로, 벽을 쥔 안간힘으로
내 타성과 나태와 지리멸렬을 비웃으며
삐딱한 바닥의 자세를 나무라는 저것은
오래전 베어버려 사진첩에나 있다가
다시금 숨을 얻어 낭창하게 뻗어 올라
큼큼한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저것은
어쩌면 다시 한번 잘라줘야 할까 보다
더 큰 가지로 자라 중심을 흩트리고
무시로 들입다 받을 외뿔 같은 저것을,
- 「나의 아나키스트」 전문
강정숙의 경계 넘나들기는 이 작품에서도 여일합니다. 기계적인 넘나들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시적 경영에 가깝습니다. 율격과 리듬은 경직성을 벗어나 분방한 일상어의 품새를 보여주고, 의미론적 조형은 자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나키스트’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체가 되어 연속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키스트는 ‘가지’이며 ‘나’입니다. 이를 융합과 통섭의 동일화라고 할 수도 있을 터입니다.
제1수는 “내 타성과 나태”의 대척점에 ‘나뭇가지’를 두어 예각적인 긴장을 부여하였고, 제수는은 바깥의 ‘가지’가 나의 ‘내부’로 진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에서 둘은 하나로 묶여져 ‘타성과 나태’를 “무시로 들입다 받”는 ‘외뿔’로 상승시켰습니다. 각 연이 빈틈없는 시적 논리를 구축함으로써 ‘나’를 향한 반성적 성찰의 요구라는 주제를 둔중한 무게로 갈무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강정숙의 시편이 보여주는 강렬한 시적 윤리라고 하겠습니다.
폐가의 쪽마루에
오래 묵힌 땟국 닮은
구름과
햇살 사이로
하늘이 자주 울고
그 여름
장마 끝에는
꽃들이
뚝뚝 졌다
- 「그해 여름」 전문
보다시피 ‘폐가’도 ‘폐가’가 아닌 것은 시인의 기억과 함께 정서적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도 구름과 햇살 사이로 하늘이 내려 울어주고, 그러한 자연의 운동 속에서 시인은 ‘그해 여름’의 일을 떠올립니다. 특정할 수 없는 ‘그 여름’ 장마 끝에 떨어진 ‘꽃들’이 매우 인간적인 체취를 품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떠났지만, 그들이 사는 동안 있었던 일들은 기억으로 남아 ‘그 여름’을 잊히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꽃들’은 져서 어디로 갔을까요. 하늘도 자주 와서 울어 주는 집이므로 그들의 삶은 빛나거나 우뚝 했다기보다 시난고난 어둡고 낮았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궁벽한 살림에도 ‘꽃들’은 다투거나 할퀴었기보다 서로 품고 위무하는 ‘꽃밭’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은유한 것은 다름 아닌 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생을 살다 가는 우리는 모두 ‘꽃들’이라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검푸르게 변색된 옛 수저를 닦는다
두툼했던 살집은 시나브로 얇아졌다
닳아진 그 시간만큼 손잡이도 굽었다
문지르면 지워질까 검정 때 묻은 날들
쓸쓸했던 사연은 벼리면 빛이 날까
먹먹한 시간을 건너 다시 피는 문양들
신접살림 1호 보물이 퇴물이 되기까지
모래 밥 소금 찬(饌)도 마다 않고 퍼 올렸던
나란히 또 어긋난 채, 달그락대는 수저 두 벌
- 「거룩한 도구」 전문
역시 그렇습니다. ‘거룩한 것’은 높고 빛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저 낡고 탈색된 ‘옛 수저’에 깃들 뿐입니다. “모래 밥 소금 찬(饌)도 마다 않고 퍼 올렸던” 신접살림 1호 보물은 이제 닳고 닳아 얇아지고 굽어졌습니다. 그렇게 퇴물이 되어가는 동안 수저가 먹여 살린 식솔들은 이제 중년이 되거나 청년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을 터입니다. 나를 비워 너를 채우듯 ‘옛 수저’는 그토록 ‘거룩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거룩한 도구」는 일상적 가치론을 역전시키는 시적 윤리를 보여줌으로써 세간의 습속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난이며 척박의 맨 처음 어원 같은
물지게에 깊게 팬 등골의 지문 같은
당신의 손바닥 닮은 그 언덕 다랭이논
접질린 허리마다 부목을 덧대고서
한 바가지 빗물로 마른 목을 축인다
층층이 등을 맞대어 한 마지기 논이 된다
삶에도 층이 있어 높거나 낮아져도
계절은 쉬 바뀌고 달빛은 고루 퍼져
비탈진 한 뼘 땅에도 씨뿌리는 사람 있다
- 「다랑논」 전문
「다랑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가난’과 ‘척박’의 어원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겠습니까. 물지게로 팬 등골의 지문 같은 논, 갈라지고 터진 손바닥 같은 논입니다. “층층이 등을 맞대어 한 마지기 논”이 되듯 허리마다 부목을 덧대고서 물을 길어 올린 끝에 몇 가마 나락을 수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독한 노동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비탈진 한 뼘 땅에도 씨뿌리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니 거룩하지 않습니까. 이만 하면 생명을 살리고 이은 고귀한 논이 아니겠습니까.
「거룩한 도구」와 「다랑논」은 강정숙의 시선이 ‘높고 빛나는 곳’을 향하는 게 아니라 ‘낮고 어두운 곳’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시적 윤리이자, 모든 좋은 시인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시적 보편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강정숙은 언어의 본성인 음악성과 시적 의미론의 엮음새를 오롯이 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시와 정형시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일련의 시편들을 통해 참다운 ‘자유’의 의미를 시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강정숙은 저 15만 년 전 어느 남루한 움막에 깃들어 살던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에 닿아 있습니다. 노래로 시를 짓고, 시로써 삶을 이어간 그들처럼 시인은 ‘최초의 시’가 보여준 율격과 가락을 통해 ‘최후의 시’가 어떠한 모습일지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김재홍 l
2003년 《중앙일보》 시, 2022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메히아』 『다큐멘터리의 눈』 『주름, 펼치는』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기린으로 떠난 사람』, 평론집 『분열자의 산책』 『구도자의 산책 — 가톨리시즘과 구상의 시 세계』, 연구서 『현대시의 비대칭성과 상징성』, 산문집 『너를 생각하고 사랑하고』가 있음. 〈박두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작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작품상〉 수상.
—
2026년 4월호(VOL.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