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저자 | 박연 | ||
|---|---|---|---|
오솔길의 끝
바람을 쥐고 걸어
가끔은 내게 없는 유년을 불러오고 싶다
봄의 호수는 눈부시고
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유색 호수 위를 부드럽게 가로지르는 스케이트 날
버치*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약국과 마시멜로
죽은 돼지와 골무
마을의 유일한 도축업자는 세상을 떠났고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죽여야 한다
유리 가게 남자와 꽃 가게 남자가 함께 살기로 했으니
오늘은 축제야
저 호수는 사실 호수가 아니라
용의 둥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칠판 위 분필이 미끄러지는 소리
국어 선생님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배운 대로 잘 해내고 있다
살고 싶은 이유 따위 만들어내지 않아도
각자 겪어낼 수 있는 절망 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하는 자리겠지
언제쯤 날 붙잡으러
푸른 용이 날아올까
*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버치가 될 수 있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버치가 지금의 당신을 울게 한다.

박연 l
202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2026년 5월호(VOL.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