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저자 | 길상호 | ||
|---|---|---|---|
수잠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
낮에도 희뿌연 안개를 걷다 보면
작은 샛길이 나온다 했어요
길 끝에 딱 한 채,
물결 기와가 반짝이는 집
지도는 아무 소용 없으니
핸드폰 앱도 끄고 마음도 끄고
길 잃은 듯 오라 했어요
어린 내가 부르르, 등목을 하거나
늙은 내가 꾸벅꾸벅, 마루에서 졸거나
시간이 여러 겹으로 출렁여도
당황하지 말라 했어요
흰빛, 분홍빛, 붉은빛
담 밑의 봉숭아가 꽃즙을 짜내
모여든 귀신들 혈색을 되살려놓는 집
물 위에 얹어놓은 돌멩이가 가라앉기 전에
세계가 중력을 되찾기 전에
조금 서두르라 했어요
작은 바람 한 줄만 지나가도
집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 했어요

길상호 l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등, 에세이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등이 있음. 〈현대시동인상〉 〈김종삼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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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신작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