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저자 | 이향란 | ||
|---|---|---|---|
동명이인
그녀가 나를 들락거린다.
말도 없이 빌려갔다가
슬그머니 제자리에 갖다놓는다.
아예 통째로 가져가기도 한다.
나도 그녀를 훔친다.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쉽게 납치한다.
입에 넣었다가 가슴에 넣고
눈 속에 넣었다가 뇌 깊숙이에 넣기도 한다.
그녀가 나를 입고, 업고, 뛸 때
나도 그녀를 안고, 메고, 달린다.
정체 모를 몸 안에서
하나의 이름과 두 개의 얼굴로 우리는 산다.
아름다운 겹으로 서로에게 밀착하다가도
갑자기 등을 돌려 밀어낸다.
동시다발적인 나와 그녀가
어느 날은 합선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타들어 가기도 한다.
내가 그녀 속에 깃들어 그녀를 닮아갈 때
그녀도 나를 열고 들어와
곁에 고요히 드러눕는다.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그때만
같은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 누가 진짜인지를
고운 눈길로 슬그머니 흘긴다.

이향란 ■
2002년 시집 『안개詩』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너라는 간극』, 전자시집 『이별 모르게 안녕』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