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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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선 

상투적인 해변에서 피란의 식탁을 차리겠다

 

 

 

 

오월의 식탁 위, 마른 식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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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수가 줄어들수록 어느 해변에서는 해당화가 이쁘게 피어날 것이다 숱한 이별이 귀소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었다 사는 것이 상투적이 되었다

 

가까운 곳에 맘껏 울 수 있는 해변이 있다 희부윰한 해무 속에서 고래 같은 딴두부리섬이 숨죽이고 있다 야무지게 입을 다문 해변은 소란스러움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파도는 아픔을 녹일 줄 아는 가슴만을 허용하겠다는 듯이 찰랑댄다 푸른빛을 등지고 이별을 노래하기에는 송구한 해변이다 그렇기에 무채색의 바다와 하늘이 하나 되어 안온한 방처럼 평온해지는 해변이다 사나운 것들이 제 성깔을 죽이고 부끄러이 발톱을 숨기며 낮게 낮게 낮아지는 해변이다 하냥 겸손해지는 해변이다 여기는 드무리 해변이다

 

망설인다 먼저 해변을 걸을지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실지 도무지 속을 내비치지 않는 바다와 무관심한 작은 섬들과 심통맞은 태양과 그리고 우리의 애인들, 도 그랬다 해무는 망토 자락을 거머쥔 채 움쩍 않는다 무언가에서 멀어지려는 것은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지 다가오는 것 또한 좋아서가 아니라는 걸 기대는 저만치 모퉁이에서 쉬이 무너지고 그렇게 해무가 깊어지려고 애써 해당화 향기를 외면했겠지 추억에 젖은 물건이 저절로 쓰레기가 되는 일은 다반사 관계를 잘 한다는 것은 잡동사니를 잘 건사한다는 것일 게다 밀려오는 파도에도 부서지지 않는 생각들 또한 잡동사니다 이곳에선 방갈로도 음악도 훼방꾼이다 해변은 좀 더 비밀스러울 필요가 있겠다, 상투적으로

 

아직은 막막하다 막막한 만큼 드무리가 깊어 간다 소라게가 깨금발로 귀가를 서두른다 대양을 항해하다 지친 배들이 고요히 몇 날이고 정박할 것만 같은 해변은 떠나간 애인을 그리워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나는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공들여 달걀을 낳았다 내가 낳은 불구의 달걀들은 이 의뭉스러운 저녁에 안녕하신지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해무의 노래는 봄날의 스러지는 핑계가 되기도 하니까 문득,

 

딴두부리섬의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몇몇의 발걸음과 상관없이 난 이곳에 피란의 식탁을 차리겠다 나·그녀·그리고 당신이 둘러앉은 상투적인 해변의 식탁,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붉은 딩가츠 여섯 잔과 무항생제 샤토브리앙과 유기농 올리브유를 살짝 뿌린 부라타치즈 샐러드와……과연 해변의 식탁은 애도하기에 만족스러운 식탁인가 둥근 바람이 이마를 쓰다듬으면 식탁에는 미처 호명 못한 안부들이 쏟아지고 난 하염없이 게을러져 와인잔이 쓰러지도록 먼 곳의 안부를 또 묻는 것이다 미처 도착하지 않은 절규를 불러 보는 것이다 피란이란 따스하게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것

 

구부러진 소나무 등걸에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이내 어둠은 엉덩이를 디밀며 어서 떠나라 재촉한다 바람이 식탁 위에 붉은 발바닥을 찍고 갈매기가 개와 늑대와의 시간을 천천히 물어다 해변에 누인다 오늘 우리는 피란의 식탁에 둘러앉아 무국적 랜드의 입성을 논하려고 한다 피란의 깃발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푸르게 펄럭이고 있다 생애 최고의 나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라지 나는 검보랏빛으로 물들고 있다 우리는 서로 스미지 못하고 젤리처럼 각자 쫄깃거리다 흩어지지 나는 배후를 모르는 사람

 

오월의 다정한 부고들이 가슴에 담아지지 않는 고약한 날들이다 그리워하는 마음 없이 여름이 달려오고 있다 이제 마주 앉은 채 따스한 해변의 식탁을 버릇처럼 물어뜯는 저녁은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뒤늦게 당도한 절규를 온전히 품으면 이후에 오는 것들은 모두 선물이다 그리하여 나는 절규와 함께 늙어 갈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렇게 상투적으로 되묻고 싶은 해변의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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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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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 ■

2006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포토시집 『마추픽추에서 띄우는 엽서』, 에세이집 『내 몸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