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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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용건 없는 사람
점점 용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용건만 있으면 뭐라도 할 텐데
없다. 너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는 것
그것이 없다. 용건을 말하라.
간단히 말하고 간단히 돌아와서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곱씹어보는 것
그것이 없다. 용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있었으면 이제라도 없었던 것 같다.
용건 없이 만나는 사람. 너는 친구인가?
용건 없이 만나는 친구는 용건이 부족해서
만나다가 만다. 용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들다.
부부 사이에도 간단한 용무가 있고 용건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보다 더 지독히 있어야 살 수 있는 사이인데
용건이 없어지면서 들어왔는지 나갔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내다. 남편이다. 무심하게 용건을 말한다.
내일부터 여행 가. 어제는 친구 집에서 잤어.
당신을 재워줄 수 있는 친구는 무슨 용건으로
당신을 재워줬는가? 당신이 타고 갈 비행기는
또 무슨 용건이 있어 당신을 태우고 가는가?
용건이 없어서 간다. 용건이 없어서 아무 거라도 타고 가는
당신은 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는가?
없어서 왔다고 했다. 알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용건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시 찾아오라고 용건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내게 없는 용건을 꺼내어
얌전히 지갑 속에 넣었다.
제육이 돌아가는 밤
제육덮밥이 생각났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오징어덮밥도 아니고
낙지덮밥도 아니고
제육덮밥이 생각나서
식당들을 기웃거렸다.
제육이 쓰인 글자를 찾아서
이 식당에도 가보고
저 식당에도 가보다가
벽면에 가까스로
제육덮밥이 붙은 식당
한 곳에 눈길이 머물고
들어갔다.
제육덮밥 냄새가 난다.
나는 것 같다.
아니어도 상관없는 냄새가 난다.
일단은 시키고 보자.
제육덮밥 하나.
제육덮밥은 곧 나온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눈앞에 스마트폰을 켜두고
한 숟갈씩 두 숟갈씩
제육덮밥을 퍼 넣는다.
제육과 덮밥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저녁이다.
한꺼번에 삼키고 있는 저녁이다.
나의 살과 피가 되기 위하여
들어오는 제육덮밥.
나의 살과 피가 되는 줄도 모르는
제육덮밥.
한 그릇 제육덮밥이 다 비워졌다.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계산을 치르고 나왔다.
트림이 나올 것 같다.
제육덮밥이 들어간 냄새다.
제육이 들어간 입에서
덮밥과 함께 나오는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제육 냄새와 함께 들어서는
나만 있을 것이다.
덮밥 냄새와 함께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만 있을 것이다.
생각나면 이런 문장이나
덧붙이는 내가 있을 것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7:1)
물론 나는 화목하다.
조금 살이 쪘을 뿐
고기라고는 나뿐인 집에서.
삶
고생을 많이 했지만 시는 아니다.
웃음을 많이 줬지만 희극은 아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사업도 아니다. 이게 무얼까?
갑자기 주어지는 이 난관에 대해
내 손은 바닥이 될 정도로 빌고 있다.
비굴하지만 진 것은 아니다.
늠름하지만 확고한 것도 아니다.
떳떳하지만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의심하면서 칼은 칼집을 향해 간다.
칼집에는 칼이 들어 있고
쑥 들어가 있고
거기서도 개는 땅을 파고 있다.
자선시
그늘
풀밭에는 그늘이 졌고
딱 한 사람만큼 그늘이 졌고
한 사람의 생긴 모양대로 그늘이 졌고
아니다, 아니다 그늘은 그늘이 생긴 대로 생겨서 졌고
지는 대로 어른거리는 그늘은
풀밭에 있고 그늘진 곳에 있고
그늘진 곳에는 짙음과 어둠을 더해가는 푸름이 있고
푸름은 푸름 혼자서 전부가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꽃 한 송이에도 꽃밭으로 돌변하는
풀밭이 있고 풀이 있고 밭이 있고
또 무엇이 있어서 그늘이 졌고
바람은 알 수 없고
바람대로 알 수 없는 길을
한 사람이 서 있다가 가는 쪽에도
그늘이 지고 그늘이 지다가 잠깐 멈추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사람의 눈도 잠깐 멈추었다.
풀밭이 어른어른하다.
풀도 꽃도 밭도 모두 아닌 것처럼 졌다 .
ㅡ 《미네르바》 2021년 여름호
컵 하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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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컵 하나의 슬픔이 보인다. 보이다가 안 보이는 슬픔도 보인다. 슬픔은 담겨 있다. 컵 하나가 있으면 컵을 둘러싸고 맺히는 물방울도 슬픔의 모양으로 둥글고 슬픔의 자세로 흘러내리고 슬픔의 말로가 되어 말라가는데 말라붙는데 컵 하나는 덩그러니 컵 하나는 엉뚱하게 컵 하나는 재질과 상관없이 컵 하나의 모양과 자세와 성정까지 다 담아서 슬픔의 기둥으로 슬픔의 웅덩이로 슬픔의 틀린 말로 슬픔의 그릇된 호명으로 계속해서 네 네 대답하는 슬픔의 자동 응답기처럼 컵이 있다. 하나가 있고 둘이 있고 셋이 있어도 컵은 컵이고 슬픔은 안 보인다.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싶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슬픔을 한 잔 따르고 두 잔 따르고 세 잔째는 이미 폭탄처럼 이것저것 다 들어가서 어지러움을 동반하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컵 하나의 용도는 계속 슬픈 것. 계속 슬프라고 서 있는 것. 아니면 진작에 쓰러졌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서 있겠는가. 비우자고 서 있다. 계속 따르라고 컵이 있다.
ㅡ 《현대문학》 2021년 3월호 |
김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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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시와사상》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시론집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가 있음. 〈미당문학상〉 〈박인환문학상〉 등 수상. |

존재론적 위기의식과 자기풍자 혹은 알레고리
ㅡ 김언 론
김언은 삶의 위기의식을 자기풍자 혹은 알레고리로 특화하고 있다. 자기풍자는 자아를 희화화한 자기희생에서 비롯되는데, 자기풍자가 우울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자기희생으로 시대의 수난사를 풍자하여 독자의 성찰을 자극하는 현대의 알레고리는 멜랑콜리와 친화적이다. 멜랑콜리를 옹호한 귄터 그라스가 “텅 빈 달팽이의 집에 앉아보고 유토피아의 그늘 속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진보를 가늠할 수 있다.”라고 했듯이 시대의 반향으로서 문학을 지향했던 귄터 그라스처럼 김언의 시적 자리도 거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희망의 그늘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 김언만의 목소리가 특화된다.
김언 시는 ‘용건이 없는, 제육 덩어리로, 슬픔의 웅덩이로, 땅을 파는 개’와 같은 부정태의 횡단선이 좌우한다. 그것들은 정해진 목적없이 부유하는 파편들로, 본질 혹은 예정된 목적지에 가 닿는 법이 없이, 시간의 흐름 중에 결합하고 방황하여 자본주의적 물질주의가 팽배한 현대를 알레고리하는 코드들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생성된 파편들의 결합으로서 알레고리는 영원히 덧없는 것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는데, 파편들의 명상에서 알레고리가 탄생되며 소외된 자의 권태가 멜랑콜리가 거하는 처소이다. 권태를 멜랑콜리로 변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적 물질주의가 야기한 자기소외이며 이때의 멜랑콜리는 알레고리의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자기소외는 자기풍자를 낳고 자기풍자는 시대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시대풍자로 확장되듯 시대의 수난사를 은유하는 파편들의 명상에서 탄생한 알레고리도 시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구현해야 할 본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현대의 부스러진 삶을 김언 시는 부정의 얼굴이자 부정의 정신으로 우울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풍자가 만개한 시대는 불행한 시대를 은유하듯 목적 없고 중심 없는 현대가 불행이 만개한 시대임을 김언 시는 병리적으로 반영한다. 상실과 우울의 시대인 현대에서 그 파편들이 야기한 폐허의 이미지로 시대와 삶과 존재성을 성찰하여 독자의 성찰을 유도하며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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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용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용건만 있으면 뭐라도 할 텐데
없다. 너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는 것 그것이 없다. 용건을 말하라.
간단히 말하고 간단히 돌아와서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곱씹어보는 것
그것이 없다. 용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있었으면 이제라도 없었던 것 같다.
용건 없이 만나는 사람. 너는 친구인가? 용건 없이 만나는 친구는 용건이 부족해서
만나다가 만다. 용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들다. 부부 사이에도 간단한 용무가 있고 용건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보다 더 지독히 있어야 살 수 있는 사이인데 용건이 없어지면서 들어왔는지 나갔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내다. 남편이다. 무심하게 용건을 말한다. 내일부터 여행 가. 어제는 친구 집에서 잤어.
당신을 재워줄 수 있는 친구는 무슨 용건으로 당신을 재워줬는가? 당신이 타고 갈 비행기는
또 무슨 용건이 있어 당신을 태우고 가는가? 용건이 없어서 간다. 용건이 없어서 아무 거라도 타고 가는
당신은 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는가? 없어서 왔다고 했다. 알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용건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시 찾아오라고 용건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내게 없는 용건을 꺼내어 얌전히 지갑 속에 넣었다.
― 「용건 없는 사람」 전문 |
‘용건 없는 사람’이란 목적 없는 혹은 중심 없는 삶에 대한 우울한 알레고리다. “그것이 없다. 용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 같다. 있었으면 이제라도 없었던 것 같다.”를 ‘목적은 혹은 지향해야 할 본질은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있었으면 이제라도 없었던 것 같다’라고 변환하면, 결론의 중심에 ‘없다’가 있다. 그것은 또 ‘있어야 할 것이 없다’와 동궤이다. 물론 있어야 할 것도 처음부터 없었다. 있어야 할 것도 없었으므로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파편이 되어 부유하는 조각들의 삶이므로 있어야 할 것에 대한 욕망도 부재한다. 덧없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해 우울한 코드로써 시대의 위기의식을 특화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은 중의적이다. 지향해야 할 본질을 향한, 곧 본질과의 합일을 향하는 그것으로서 욕망과 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중의성이다. 용건이 자본주의적 욕망을 은유할 때, ‘용건 없이 만나는 친구는 용건이 부족해서 만나다가 만다. 용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까닭이다. 용건이 없으므로 욕망 또한 부재하여 지향태조차도 부재한 시대임을 부정태로 성찰하는데, 우울한 시대를 파편적 명상으로 부정하는 성찰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되어 가는 추세는 ‘점점 용건 없는 사람’이므로, 역설적으로 ‘용건만 있으면 뭐라도 할 텐데’라는 일견 덧없어 보이는 희망이 발생하기도 한다. 용건 없는 혹은 지향태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절망 속에서도 ‘뭐라도 하고자 하는 용건이 혹은 욕망’이 새싹처럼 싹이 트는 것은 희망적이라는 아니러니를 만난다. ‘그는 돌아가면서 내게 없는 용건을 꺼내어 얌전히 지갑 속에 넣었다’는 자조적 명시와, ‘그가 지닌 용건이 내가 만들어 준 용건’이란 점에서 자조적인 자아가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은 역설이다. 깊은 절망과 허약한 희망 사이에 걸려있는 위기의식 속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변증법적 희망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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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을 많이 했지만 시는 아니다. 웃음을 많이 줬지만 희극은 아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사업도 아니다. 이게 무얼까? 갑자기 주어지는 이 난관에 대해 내 손은 바닥이 될 정도로 빌고 있다. 비굴하지만 진 것은 아니다. 늠름하지만 확고한 것도 아니다. 떳떳하지만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의심하면서 칼은 칼집을 향해 간다. 칼집에는 칼이 들어 있고 쑥 들어가 있고 거기서도 개는 땅을 파고 있다.
― 「삶」 전문 |
삶이란 ‘비굴하지만 진 것은 아니고, 늠름하지만 확고한 것도 아니’라는 중의적 줄타기가 부유하는 멜랑콜리를 은유적으로 풍자한다. 더하여 ‘의심하면서 칼은 칼집을 향해 가고, 칼집에는 칼이 쑥 들어가 있다.’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꾸려지는 중의적 삶에 대한 은유적 풍자다. 그럼에도 의심한다면 칼은 칼집에서 나올까 말까 고민하거나, 오히려 칼집에서 칼끝이 세상으로 향하고 있어야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칼은 칼집에 쑥 들어가 있다’는 자기비하에 우울한 알레고리가 동반된다. 권태가 낳은 알레고리의 처소가 칼집인 까닭이다. 칼집에 들어가 있는 칼이란 부재중인 욕망 혹은 용건에 대한 은유로 보아 위기의식 뒤의 그늘인 희망의식으로 짐작하자. “거기서도 개는 땅을 파고 있다”는 은유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칼은 칼집에서 잠자지만은 않는다고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욕망을 확인하는 까닭에 그러하다. 변증법적 줄타기로 우울한 시대를 방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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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컵 하나의 슬픔이 보인다. 보이다가 안 보이는 슬픔도 보인다. 슬픔은 담겨 있다. 컵 하나가 있으면 컵을 둘러싸고 맺히는 물방울도 슬픔의 모양으로 둥글고 슬픔의 자세로 흘러내리고 슬픔의 말로가 되어 말라가는데 말라붙는데 컵 하나는 덩그러니 컵 하나는 엉뚱하게 컵 하나는 재질과 상관없이 컵 하나의 모양과 자세와 성정까지 다 담아서 슬픔의 기둥으로 슬픔의 웅덩이로 슬픔의 틀린 말로 슬픔의 그릇된 호명으로 계속해서 네 네 대답하는 슬픔의 자동 응답기처럼 컵이 있다. 하나가 있고 둘이 있고 셋이 있어도 컵은 컵이고 슬픔은 안 보인다.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싶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슬픔을 한 잔 따르고 두 잔 따르고 세 잔째는 이미 폭탄처럼 이것저것 다 들어가서 어지러움을 동반하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컵 하나의 용도는 계속 슬픈 것. 계속 슬프라고 서 있는 것. 아니면 진작에 쓰러졌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서 있겠는가. 비우자고 서 있다. 계속 따르라고 컵이 있다.
― 「컵 하나의 슬픔」 전문 |
부재하는 용건이 혹은 부재하는 욕망이 그리고 슬픔의 웅덩이가 김언의 삶을 지배하는 혹은 그의 시를 좌우하는 횡단선이듯, 때문에 용도에 있어서 물컵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전부일 수 있는 컵조차도 우울한 명상의 대상이 된다. ‘컵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컵 하나의 슬픔’이 보이는 데 이르는 것은 이미 결정된 종착지나 다름없다. 컵에서 오직 슬픔만을 보기 때문에 ‘보이다가 안 보이는 슬픔조차도 보인다.’ ‘컵을 둘러싸고 맺히는 물방울도 슬픔의 모양이고 슬픔의 자세로 흘러내린다.’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는 컵은 슬퍼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컵은 곧 세상에 대한 은유이다. 파편적으로 부유하는 세상에 대한 성찰인 것이다.
슬픔이 있어서 김언 시가 있듯 ‘계속 슬프라고 서 있는 것’이라면 삶은 계속 슬플 것이고, 궁극에는 계속 슬프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는 멜랑콜리에 함몰할 수밖에 없다. 슬픔 아니었던들 ‘컵 하나의 삶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라는 역설적 자조는 타당하다. 곧 ‘슬픔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쓰러졌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서 있겠는가’라고 자조하는 데 이르게 된다. 컵은 ‘비우자고 서 있고, 계속 따르라고 있듯이’ 삶은 슬픔이 가득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서서 가득 차기를 기다리면서 우울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러므로 ‘컵 하나의 슬픔’은 ‘컵 하나에 가득찬 슬픈 삶’의 알레고리다.
‘제육이 돌아가는 밤’도 ‘슬픔이 지배하는 삶’에 대한 알레고리다. 아무도 없는 집에, 제육 냄새와 함께 들어서는 나만 있는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명상하는, 더욱이 그 명상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 / 화목하는 것이 /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제육이 돌아가는 밤」 일부)는 잠언으로 세속적 존재성이 부상되면서 자기비하에 이른다. “나는 화목하다. / 조금 살이 쪘을 뿐 / 고기라고는 나뿐인 집에서.”라고 생각이 뻗어나가는 지점은 세속적 주체로서의 자기비하가 정점에 이르는 지점이다. 역설적이게도 우울한 알레고리가 완성되는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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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에는 그늘이 졌고 딱 한 사람만큼 그늘이 졌고 한 사람의 생긴 모양대로 그늘이 졌고 아니다, 아니다 그늘은 그늘이 생긴 대로 생겨서 졌고 지는 대로 어른거리는 그늘은 풀밭에 있고 그늘진 곳에 있고 그늘진 곳에는 짙음과 어둠을 더해가는 푸름이 있고 푸름은 푸름 혼자서 전부가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꽃 한 송이에도 꽃밭으로 돌변하는 풀밭이 있고 풀이 있고 밭이 있고 또 무엇이 있어서 그늘이 졌고 바람은 알 수 없고 바람대로 알 수 없는 길을 한 사람이 서 있다가 가는 쪽에도 그늘이 지고 그늘이 지다가 잠깐 멈추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사람의 눈도 잠깐 멈추었다. 풀밭이 어른어른하다. 풀도 꽃도 밭도 모두 아닌 것처럼 졌다.
― 「그늘」 전문 |
‘그늘’은 중의적 은유이다. 그늘이 무엇의 그늘이냐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빚어진 그늘이냐에 따라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한다. 가령 무더운 여름날의 나무 그늘은 생명수와 같다. 반면 추운 겨울날의 그늘은, 나무 그늘이든 마천루의 빌딩 그늘이든 그 그늘은 죽음조차 몰고 오는 혹한과 같다. 때문에 ‘지다’도 중의적이다. 일차적으로 ‘해가 지다’처럼 빛이 사라져버린 상태를 지시하면서도 ‘나무 그늘이 지다’에서는 생명수와 같다. 절망과 희망의 이중성을 은유하는 그늘인 것이다. 그늘은 곧 져야만이 그늘이 될 수 있는 까닭에 ‘그늘’과 ‘지다’는 분리될 수가 없다. 절망과 희망의 관계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그늘진 곳에는 짙음과 어둠을 더해가는 푸름이 있고 / 푸름은 푸름 혼자서 전부가 아니고”처럼 그늘진 곳이 푸름으로 치환되므로, 더욱이 그 푸름이 짙음과 어둠을 더해가는 푸름이므로 부정의 이면에서 긍정의 빛을 끌어내는 성찰이 김언이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늘은 김언의 개인적 그늘을 포함하여 현대인이 상실한 유토피아의 보편적 그늘을 아우를 것이다. 위기의식은 상실에서 비롯됐으므로 극복은 상실한 것을 복원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그늘의 희망으로 시대를 반향하므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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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애 ■ 문학평론가 1994년 《문학사상》 평론 등단. 저서 『전쟁과 인문학』 『글쓰기와 자기발견의 근대』가 있음. |
이달의시인 2021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