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병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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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집을 가지고부터 이사는 부적처럼 부자연스러워졌다
한 번의 결정이 평생을 좌우해선 안되지만
많은 것이 좌우되었다
빛이 들지 않는 집에 주인이 된다는 것은
전 주인이 붙여두고 간 부적처럼
생략된 말에 익숙해지는 것
빛이 드는 집으로 이사를 가자
이사는 남향을 하나씩 수집하는 유쾌한 이동
집을 갖고부터 집을 지키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멍멍멍 꼬리만 길어졌다
집이 나를 가져버렸다
나는 언제 주인이 되어 주인에서 해방되나
이사를 하자
빛이 드는 집으로 옮겨 다니며
빛을 모으자
부풀어 오르는 빛 속에서 뒹굴며
이사를 하자
계약된 삶은 나쁘지 않다
기간이 풀리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
빛을 향해 앉다 보면 빛을 향해 앉는다
뒷집이라 믿었던 것이 앞집이 되어도
나는 내 집에서 남처럼 살았다
저녁에 한 알 아침에 한 알
1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말
괜찮아질 거라는 말하지 마
괜찮아지면 세상은 큰일 나잖아
지구의 알약같이 작은 나는 괜찮지가 않아
산을 넘으면 언덕이 있고
언덕을 넘으면 산이 있어
괜찮아 괜찮아 할 때마다 무언가가 하나씩 주저앉아
*
오후에 널은 빨래가 마르지 않은 채 밤이 왔다
마르지 않은 옷들이 담이 결려 굳어버린 내 오른쪽 승모근 같다
*
책상 위에는 읽은 책과 읽을 책과 읽지 않아도 될 책이 뒹군다
2
말다가 터져버린 또르띠아를 내 돈으로 사야 할 때
주인은 유통기한 지난 천 원짜리 빵 하나를 넣어주었다
또르띠아는 오천 원이고 나의 알바는 파지가 나올 때마다
일당에서 샌드위치 값이 깎여 나갔다
그들의 입장과 내 입장은 같을 수 없고
그때마다 나는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게 잘못이다
*
커피 잔과 무를 우려낸 유리잔이 책상 위에서 식어가고 있다
*
레몬를 씻고 레몬을 썰고 레몬을 짜고 썬 레몬을 병에 담고 뜨거운 물 찬물 반반 섞어 흔들어준다 레몬 워터를 마시고부터 몸 안에 보석이 가득하다 레몬이 알게 될 때까지 몸이 견뎌주었다
3
Ab Ovo를 듣는다 욥베빙의 피아노 선율은
마른 밀가루처럼 떠다닌다
생일인데 아무한테도 전화가 없다
이태석재단 승가원 월드비전 평화재단에서 오는 축하 문자
살아 있을 동안은 돈을 풀어야 하는군
몇 시간째 시골 빈집을 알아보는 이유다
*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다 반주를 넣는 뒷모습이 휴지기를 거치는 밀가루 반죽처럼 부푼다 삶이 떠다니지 않도록 지긋이 공기를 빼줄 것
4
2월에 태어난 아이가 이십팔 일을 살아도 3월에 태어난 아이가 삼십일 일을 살아도 한 달은 똑같이 산 것이다 2월에도 3월에도 월급은 똑같다 사라진 72시간을 메꾸기 위해 지구가 둥글게 도는 이유다
*
설거지를 하고 밀대를 밀고 김치를 썰어서 번 돈
그 돈으로
콜롬비아를 마신다 에티오피아를 마신다
커피콩을 따는 검은 손 물에 젖은 내 손
*
우루사를 처방받았다
한 알의 용량이 곰처럼 세지만 약사는 괜찮을 거라 했다
300mg을 하루에 한 알씩
서른 개를 먹고 나면 나는
곰이 되어 지구를 들어 올릴지도 몰라

박병란 l
2011년 《발견》 등단.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2020 아르코 상반기 우수문학도서)가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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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호 공시사의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