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영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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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도서출판 서정시학 | 출간일 2021년 9월 30일
서정시학 시인선 184.
2005년 《서정시학》으로 등단한 신영조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신영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반복되는 장면으로 영역을 확보하는 삶과 죽음의 국경선”으로 파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천 번의 눈물이 다녀간 발자국”(「물 위의 바느질」)이 편재해 있다. 그것은 대상을 경유해서 자아에 머물고 있는, “더듬더듬 말하지 못하는 눈물이 달 속에 머무는 밤”(「바람은 사투리로 말을 한다」)의 세계로 치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계로부터 자기에로의 귀환으로서 그의 시편들은 “아픔조차 환하게 눈에 들어오는 밤”에 대한 응시이며, 고통받는 대상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통해 우리는 신영조 시인이 천형처럼 눈물로 써 내려간, 거역할 수 없는 ‘신서정의 계시’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시어의 심장과 신서정의 계시를 기다리며
등단한 지 16년 만에 첫 시집을 내는 일은 비교컨대 완미(婉媚)한 덕목을 보이는 삶의 예에 속한다. 섣부른 초벌구이보다 오래 익혀 치렁치렁한 언어다발을 독자에게 선물하는 일은 그러기에 흔하지 않은 언어 제련의 수확이라 하겠다. 나는 신영조 시인의 학창과 시의 입문과 시의 정련과 시의 완숙기를 낱낱이 기억하고 음미하면서 시인이 길러낸 언어의 채광창 아래를 유심히 배회하기도 했다. 그러는 시간 동안 나는 그의 슬픔의 맛깔과 기쁨의 색깔까지를 인지하고 그가 치는 언어의 소금과 향료를 저울질하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영조 시인이 돌탑을 쌓듯 쌓아온 시의 편편에는 그리하여 잃어버린 옛이야기가 사투리로 부활하여 모여 사는 일가가 있고 슬픔 위에 새긴 풀잎의 미소가 결코 자랑할 것 없는 우리네 필부필부인 어머니의 얼굴처럼 새겨져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 혼자 크는 상추 이파리조차 푸른 정신의 양식이 되는 삶의 길을 찾아낸 것은 그만이 향유할 수 있는 생의 양식이라 하겠다. 이제 작고 가려진 삶의 세목들을 찾아 나서는 시의 길을 걸으면서 시인은 ‘참나물보다 가녀린 울음의 이슬’에게 값진 인간의 목청을 둘러주고야 말리라 믿는다.
― 이기철(시인)
서정성에 입각한 그의 시편들은 대상의 감정을 자기 진술로 구현하는 데 있다. 이것은 서정의 주체로서 동일화된 대상의 내면에 대한 발언이며 대리 진술이다. 대상이 가진 눈물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파고드는 것이며 정서를 담보로 한 서정성을 현시하는 것이다. 바로 대상과 시적 자아의 내적 인격화는 일체성을 가지는 동일화의 원칙이 그의 시에서 작동하는 것. 이로써 자아를 제거하고 세계를 자아에 편입시키는 것에 있다. 이른바 신영조의 시는 동화의 방법으로 대상에서 세계의 자아화로 나아간다. 또한 세계의 자아화는 그의 시편에서 대상을 지배하기보다는 대상을 변화시킨다. 이는 시인이 외부로부터 획득한 대상에서 시작해서 의식화 과정을 통해 자아―안과 대상―밖이 구획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계절과 상관없이 돋아 나오는 나의 싹이여!”
ㅡ 「시인의 말」 中
초록의 유언
내 관 속에는 아무것도 채우지 말라. 물빛도 대답도 안경도 발자국도. 그저 당신들을 한 잎 한 잎 초록으로 채색하던 붓자루의 휴식으로 남게 해 달라. 초록의 어머니인 풀잎의 미소 한 뿌리 채워 달라. 내 삶은 조약돌보다 따스하지 못하였으니 초록으로 물들던 강가의 조약돌 하나 손에 쥐어 달라. 안개 속에서 어제를 흑흑 울다 고개를 드는 초록휘파람고요새가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온몸을 푸르게 흔들며 적선하는 상추의 의상을 온전히 입혀 달라. 그리하여 그 가득한 초록의 힘으로 저 우주로 날아가게 해 달라. 가서 유영하며 초록의 바다가 출렁이는 별, 지구를 바라보게 해 달라. 내 깃털의 무게가 지상에 남겨진 무게와 어떻게 어깨동무하며 날아오르는지. 날아서 어느 우주의 숲에 누워 심해(深海)보다 깊은 향기를 품은 초록으로 잠드는지, 어느 우주의 숲에 앉아 아침보다 고요한 향기를 지닌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는지 묻지 말아 달라.
속삭이네
버리지 못하는 오래된 가구처럼 쓸쓸한 밤이네
늘상 뒷모습만 보여주는 자정이
잠 속으로 들지 못하던 나에게
늦가을을 친구로 삼았다고 속삭이네
자주자주 가을을 훔치며 얼굴을 내려 깔던 낙엽이
겨울로 숨어드는 쓸쓸한 얼굴을 보이기 싫어
여자 옆에서 물러나 있다고 속삭이네
봄을 꿈꾸기 위하여
여름을 채색하기 위하여
붓은 여전히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고 고백하며 속삭이네
저만치 전신주에 스치는 바람보다 슬프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가을 밤바람이
붉디붉은 그리운 철새를 안고 사는 노을을
품에 안고 사라진다고 속삭이네
내 속에 잠들지 못하는
지어지지 않는 집 한 채가 시리다고 속삭이네
빈 젓가락의 울림만큼 허전한 식사가 차려진
어느 하루의 저녁도 차마,
넘어가지 못하는 양식이었다고 속삭이네
물 위의 바느질
저수지는 천 번의 눈물이 다녀간 발자국
은빛 연어가 환생한 각시풀 해종일 손 적시는 곳
물 위에 뜬 잎 상처로 남아 길 내는 주남 저수지*
오리바늘이 몸 흔들며 물의 상처를 깁고 있다
물의 몸을 잠그고 여는 저 새의 바느질
물속에 집이 있어 문을 두드리고
물속 마당을 발로 쓸고 있는 저 오리
물에 젖은 사랑을 쓸어 모을 적마다
물소리에 베이는 저 물의 밀어(密語)
젖을 때마다 한 번씩 보고 싶은 노을아
해가 누워 숨 고르는 저녁
너희는 타오르는 물속에 퍼질러 앉아
한 폭 깃으로 흠뻑 젖은 치마 둘러
물속 깊이깊이 벗어 놓아라
물속 멀리멀리 달아나거라
*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월잠리에 있음.
비를 심다
비 내리는 오늘은 텃밭에서
당신을 나의 밭에 심었습니다
빗줄기 소리는 시원했습니다
당신을 심는 내 마음에 내내 뻐꾸기가 울곤 했습니다
내 속에 심은 당신이 행여 가뭄 들까
내 속에서 크는 당신이 행여 홍수 질까
나의 둑에 갇힌 당신을 어제는 잠시 허물기도 했습니다
뙤약볕이 우리가 걸어간 밭을 쪼개어도
긴긴 장마가 우리가 지나온 길을 없애도
먹먹한 개구리의 기막힌 소식과 함께하면
밭둑에 혼자 서 있는 날도 바람 불지 않았습니다
돌아다봅니다
젖어 있던 밭둑도 내일 아침이면 짱짱
장화의 뒤축에 눌린 젖은 날도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가죽나무 사이에 걸린 가죽 같은 건조한 날도
당신과 함께하는 밭둑에서 비를 한번 심는다면
잠시 메말랐던 퇴근길은
막걸리 잔 속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낼 것입니다

저자 소개 ㅣ 신영조
2005년 《현대시학》 등단.
대구문협 2016년 〈올해의작품상〉 수상.
현재 효성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
■ E-mail : sinsi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