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오성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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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솔출판사 | 출간일 2021년 12월 15일
솔 시선 33.
2011년 《문학의봄》으로 등단한 오성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우리가 삶에서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과 풍경들을 오래 바라보고 조용한 목소리로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독자로 하여금 이것야말로 진정한 시의 거처임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이 걷는 세계의 자장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오성일 시인은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타인에게 활짝 열어 보이는” “산책자의 언어적 보폭”을 가졌으며, 대상에 다가가는 “염려하는 마음”을 특징적인 면모로 가졌다 하겠다. 산책자의 언어는 은근하고 고요한 ‘미풍’처럼 온다. 가볍고 부드러운 시인의 마음은 바람이 닿듯이 우리 옆에 머물고 스며드는데, 시인은 기척도 없이 옆에 와 가느다란 숨에 실린 이들의 말을 살피고 되읊는다.
오성일 시인은 어느 도시에서 “거리를 돌며 가등마다 불을 켜는” “늙은 점등원”처럼 우리 마음을 밝혀주는데(「정경」), 그 불빛은 시적 대상들뿐 아니라 시인 자신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세상을 염려하면서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밤에 쓴 말」) 거듭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염려하는 시인의 산책길 양쪽에는 타자를 향한 ‘염려’와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의 빛이 가등(街燈)처럼 비추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우리 마음을 외롭지 않음과 다행함 속으로 안내하는 빛이 되어준다.
두 개의 거울 속을 걷는 열린 산책자의 시학
오성일 시인이 세상에 건네는 목소리는, 언어로 대상을 전유하는 시의 세계에서 드물게 조용하고 담담하다. 시인은 말 이전에 먼저 침묵으로 지켜보고 기다리며, 버려지고 갇힌 것들, 혼자 앓는 것들 쪽으로 걸어간다. 시의 언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그 “안간힘 같은 풍경들”을 살피고 염려하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 시인이 향하는 곳은 문 닫힌 한낮의 단골 식당 “미풍해장국”이다. 그는 밝은 한낮의 거리에서 그늘에 잠긴 식당을 들여다본다. 가라앉아 있는 그 어둠에서 시인은 “비린내”를 맡고, “악다구니”를 듣는다. 방향을 잃은 듯 떠 있는 식당 안 기물들의 막막한 표정을 두고 시인은 돌아설 수가 없다. 며칠째 닫혀 있는 ‘미풍해장국’에 대한 섭섭함과 걱정, 막막함 앞에서 시인은 “하루 이틀 더 기다려보자고 생각”한다.
이렇듯 대상에 대한 염려와 자성의 공간이 오성일 시의 자리이다. 시인이 비워둔 이름들의 자리는, 이 대상에 대한 염려와 내성의 부끄러움이라는 역학 속에서 만들어진 긴장의 공간이다. 세상 속에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조용한 말들을 건네며 오성일 시인이 만들어가는 이 사랑의 연대는, 오래 들여다봐야 할 우리 시의 깊은 자리가 아닐 수 없다.
― 박남희(시인, 문학평론가)
“그러나, 나의 말은 어줍고
갈수록 희미하여”
ㅡ 「시인의 말」 中
염소 아빠
나는 요즘 꽤 멀리 풀을 뜯으러 다닌다 아침저녁 길을 멀리 오가니까 아내와 자식 생각도 많아진다 오늘은 육십 리쯤 가서 풀을 뜯고 왔다 몇 년 전 삼만 리나 날아가서 잉글랜드 초원의 풀을 뜯어본 생각도 가끔 난다 그립다 어린 것들도 이젠 제법 뿔이 굵어서 오 리나 십 리쯤 가서 저 혼자 풀을 뜯고 오기도 한다 대견하다 이웃집 노인네는 다 큰 자식 놈이 통 풀 뜯으러 나갈 생각도 안 하고 몇 해째 빈둥댄다고 나만 보면 걱정이 많다 나는 경기가 좀 나아지면 풀 뜯을 데 생기지 않겠느냐고 대꾸는 해주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게 그리 간단치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식구들은 집에 돌아오면 각자의 말뚝에 얌전히 목줄을 걸고 밤참으로 여물을 먹기도 하는데, 같이 먹자면 아내는 기겁을 한다 하긴 요즘 부쩍 살이 붙기는 했다 어제는 뭣 좀 생각할 게 있어 어두운 들판에 서 있다 늦게 들어갔더니 다들 순한 얼굴을 하고 잠이 들었는데 작은 놈은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지 눈곱이 졸졸 흐르는 게 안쓰러웠다 내일은 어디 가서 몸에 좋다는 풀을 좀 뜯어다 먹여야겠다
화장
몇은 커피를 마시고, 몇은 눈을 감고 있었다
등을 쓸어주며 마른 웃음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화장장은 크고 넓고, 여름 아침인데도 서늘했다
한 시간 반 뒤에 여섯이 들고 들어간 사람을 혼자 들고 나왔다*
하얀 보자기 속에 나무상자 속에 하얀 뼛가루
혼자 들려 나온 사람은 부드럽고 곱고 깨끗했다
나는 그것을 조금 섭섭히 여기면서도
사는 일 그리 뼈아플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 윤제림 시인의 시 「화장(火葬)」에서 빌려옴.
재환이 형
판자로 지은 재건중학교*가 있었다
읍내 가는 버스길로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 중간 쯤
배추밭 하나를 건너 산자락에 있었다
거기 다니던 재환이 형은 공을 잘 찼다
아주 군침이 돌게 킥을 잘했는데
뒤에 그 형은 풀 죽이는 약을 먹고 죽었다
남들 다니는 중학교 못 다니고
재건학교 나왔던 게 창피했던 것 같다
졸업하고 어디서 돈 벌러 다닌단 얘길 들었는데
보잘 것 없는 돈에도 풀이 죽었겠지만
그 숫기 없는 마음이 세상에 많이 채였던 것 같다
아니, 제가 제 마음을 차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축구나 시켰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걷어차는 일은 속상한 사람들이 잘 하니까…….
지금도 나한테는 축구 하면 메시보다 재환이 형이다
우리나라 축구가 힘을 못 쓸 때면 나는
재환이 형 같은 사람이 나와서
재건을 좀 해야 된다는 생각이 근질거린다
그 형 죽은 지 삼십 년이 넘었는데도
* 1960-70년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운영되던 학교
정경
어느 서양 나라에 지금도 저녁이면 늙은 점등원이 거리를 돌며 가등마다 불을 켜는 작은 도시가 있다 한다 길가에 가스등이 하나 둘 켜지고, 8월의 운하를 건너서 바람이 오면, 정교회 종탑 마당에 나온 노인들 처녀들이 허름하고 다정한 반말로 저녁의 인사를 주고받는다는데, 한가히 거기를 떠올리는 요 며칠 저녁들이 나는 혼자 기쁘고 충분했다

저자 소개 ㅣ 오성일
2011년 《문학의봄》 등단.
시집 『외로워서 미안하다』 『문득, 아픈고요』 『사이와 간격』이 있음.
현재 한국방송공사(KBS) 근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