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지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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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시조 읽기와 시조 쓰기
● 박지현
1.
‘시조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누구든지 한두 마디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우리 겨레 나름의 전통문학. 둘째, ‘글자의 수에 힘입은 가락(자수율)’에 의한 ‘일정한 틀(고유한 형태)’. 셋째, 임금으로부터 기생에 이르기까지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신분과 지위에 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널리 읊었던 노래의 시. 즉 시조는 정해진 틀, 3·4조(또는 4·4조)의 가락을 바탕으로 3장 6구의 짜임새를 갖춘 시조는 우리 민족의 자연과 풍속과 생활 감정을 우리의 생리대로 표현한 것이다. 옛 부족 국가 시대의 민요에서부터 신라의 향가와 고려의 별곡을 거치면서 우리 가락으로 제자리를 굳힌, 우리 조상들의 얼과 슬기가 하나로 어우러져 빚어낸 문학의 틀, 우리 고유의 전통 문학으로서 정형시, 즉 가락의 시이며, 일종의 국민시(민족시)의 성격을 띤 것이다.
위의 내용은 시인이자 시조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인 박경용 선생의 『시조짓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초등학생들이 대상이어서 시조에 대한 이해와 설명도 간결하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시조에 대한 이론적 배경과 쓰기에 대한 실제가 병행되어 시조에 대한 이해와 읽기, 쓰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전통문학은 여전히 유효하여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수입된 서양 양식의 자유시(현대시)가 훨씬 큰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는 신체시(新體詩)라는 이름으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詩作)의 방법론적 다양성과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변모를 거듭하고 예술의 중심에서 현대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현대시는 외부로부터 수입되었으나 질곡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꺾이고 훼손되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수 없는 탈피를 거치며 엄청난 성장을 했다. 하지만 현대시조는 과연 어떠했나 묻지 않을 수 없다. 100년 전, 옛시조라는 이름을 벗고 현대시조의 옷을 갈아입으면서 얼마나 성장하고 변화했는가를 진정으로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먼저 현대시의 시작점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조와의 관계를 짚어본다.
새로운 문학 양식으로서의 현대시 초기의 시작방법은 당연하다시피 우리말의 결을 그대로 따르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김용직(『한국 현대시의 흐름』이하)의 지적처럼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의 육당 최남선을 기점으로 현대시(現代詩) 즉 새로운 형식의 시 ‘신체시’를 두고 순수한 시를 쓴 것이 아니고 개화 계몽 지향의 사회 개혁 운동가로 ‘교시성(敎示性)’이라는 목적성 시를 썼다는 데서 큰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문학의 순수성, 예술성이 대타적(對他的) 목적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주요한의 시이다.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 주요한, 「샘물이 혼자서」 전문
이 시는 자유시, 서정시의 갈래를 갖는다. 2음보 3행 3연의 형식이다. 흔히 자기정화의 소망을 반영한 시라고 평가된 낭만주의 시이다. 최남선이 주도한 사회계몽적 시에서 벗어나서 민요조의 서정시를 쓴 것이었는데 이것은 김억이 주장한 ‘바람직한 시를 얻기 위해서 운율과 형태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결과이다. 즉 김용직의 해설대로 운율과 형태는 한국어의 적절한 사용으로 확보가 가능한 것이어야 했다. “조선 사람으로는 어떠한 운율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있겠나요. 조선말로의 어떠한 시형(詩形)이 적당한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시형(詩形)과 운율과 호흡」)는 글에서 확인된다. 특히 민요에서 자주 쓰이는 지방어와 독특한 어미의 사용도 포함되었다.
아래 주요한의 글은 좀 더 구체적이고 확장적이다.
“자필의 의견으로는 조선의 신시 운동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민요를 기초 삼고 나가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떤 나라 문학사를 보더래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이외다. 문학 발생의 초창 시대에 있어서 그 새 문학의 출발점이 언제든지 민요에 있습니다.”
초기 현대시가 해외시의 모방에 급급하여 번역투의 생경한 말들을 써서 퇴폐적이고 세기말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새로운 시가 될 수 있다는 분명한 지적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주요한과 김억에 이르러 초기 현대시가 가진 문제점이 보완이 되기 위해 민요가 매우 중요한 대안이며 구심점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말이 갖는 운율과 2음절, 3음절의 특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첫째로 꼽는 김소월의 경우에도 ‘산유화’, ‘진달래꽃’,‘먼 후일’,‘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초혼’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이 3·3·4조나 7·5조가 쓰여졌다는 것은 우리말이 갖는 우리 정서, 우리의 서정을 노래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언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민요조의 서정시가 우리 정서에 잘 어우러진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는 셈이며 전통시조는 물론 현대시조의 숨통이 트이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현대시를 논하는 것 자체가 매우 복잡해졌다. 수많은 격변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현대시는 더욱 다양해졌고 광범위해졌다. 큰 줄기의 흐름이야 어느 정도 정리될 수 있다지만 파생된 갈래를 정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딱히 정의하기보다 파편화된 다양성의 혼재라고도 볼 수 있다. 내용과 형식 면에서도 그 변화와 다양함을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내용에 있어서는 더욱 가벼워졌거나 더욱 깊어졌다. 시대에 따라 형식적 측면에서도 새롭고 실험적인 시가 수시로 등장하고 있다. 글자를 뒤집는다든지 그림과 기호를 통한 소통의 시도는 오래되었다. 문명의 발달에 따른 의식과 가치관의 변화, 시대의 조류에 따른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이며 결과이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속성 또한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2.
그렇다면 시조의 경우는 어떠한가. 앞의 박경용 선생의 ‘초등교육의 시조’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시조에 대한 기초적 이해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다. 초등학생들이 초등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감상 그리고 쓰기를 통해 우리 전통문학의 이해는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에 성장을 거쳐 어른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몸에 배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정작 문제는 옛시조와 현대시조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물론 학자마다 시조인 마다 다양한 이론과 견해가 존재하나 이론에 의한 이론에 머물거나 현대시조의 적극적인 변화 요구에 크게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시조 쓰기는 시조 읽기를 선행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부지런히 읽기만 해도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시조에 대한 배려와 이러한 기초적 생각은 매우 타당하다. 이것은 비단 시조에 국한된 것은 아니겠지만 시조의 특질상 매우 자연스럽다. 그만큼 우리의 정서와 밀접하다는 뜻이다.
시조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우리의 정서에 부합된, 우리말이 갖는 자연스러운 리듬, 즉 운율과 매우 적합한 문학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2, 3음절의 어휘, 2음보의 연속적 호흡에도 잘 어울리는 장점은 그중 으뜸이다. 그에 비해 의도적으로 글자 수를 늘어뜨리거나 붙이거나 해서 호흡의 불일치, 가파름, 축약, 행과 연갈이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하면서 얻는 변형의 문학인 현대시는 각고의 노력과 애를 써야 목적한 바의 성과를 조금 얻을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운율과 형태의 배려’를 통한다면 좀 더 쉽게 명확하게 목적한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비슷한 시기에서 발전, 성장하고 있는 현대시에 비해 현대시조의 소극적 성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인가, 진정으로 옛시조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변화된 시대에 맞게 시조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읽고 쓸 수 있는지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본다.
(1)
고려 말 이래 조선시대 선비의 가악으로 중심에 섰던 시조는 그런 점에서 개인의 감성적 영역보다는 공동의 이념적 가치를 公的인 향유현장에서 구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가 인심을 감발하게 하여 인간의 성정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교화하며 나라를 화평하게 하여 마침내 治世에 이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었다. 즉, 시조를 단순한 풍류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심성을 수양하고 性情을 조화롭게 하여 덕을 펼쳐내는 것으로 향유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조를 향유하는 방식으로는 두 가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장고 같은 관현반주에 얹어 가곡이라는 고급의 전문적 음악으로 향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고급의 음악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노래 사설의 의미 내용을 음미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다. 그러기에 전자는 전문 가집이나 고악보에 악곡 표지와 함께 실려 그 음악적 향유가 가능케 했으며, 후자는 개인의 문집이나 가사집에 실려 관현반주 없이 그 사설을 읊조리는 것으로 의미의 전달이 가능토록 했던 것이다. (김학성, 「시조의 아버지 像과 그 현대적 변주」)
(2)
현대시조는 자유시에 대하여 공간적으로, 전통시조는 현대시조에 대하여 시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그 대립은 상반된 것이라기보다 상호보족적이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이 바로 현대시조를 가능케 한다. 현대시조는 전통시조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면서 즉 전통시조에 의해서 창작되었지만 전통시조 역시 현대시조의 인식체계를 거침으로써 하나의 문학텍스트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전통시조는 현대시조의 유전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조라는 명칭은 없어도 이미 있어온 그런 형태로 된 시가가 전통시조이게 한 것은 오직 현대시조를 통해서이다. 현대시조가 나오기 이전에는 단지 비인격적인 실체가 현대시조를 통해서 비로소 실체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통시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자신을 만들어낸 전통시조를 만들었다는 역설이 가능한 것이다. 이 점 자유시와 현대시조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양자는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갖는다. (…) 그동안 우리는 시조의 특성과 독특한 장르성을 놓치고 있었다. 시조논의(時調論議)는 말할 것 없고 시조시인조차 의식했건 아니건 시조의 정체성, 그 본질과 기증을 왜곡하거나 간과하여 왔다. 전통 혹은 민족이라는 동일화의 논리 속에 일방적으로 시조가 강조됨으로써 시조 자체가 갖는 시학적 특색을 무시하고 그 결과 현대시조에의 복귀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 오늘날 시조단이다. 시조를 특정한 시대의 역사적 장르로 다루거나 아니면 대부분 시조 작가들은 국민문학으로서 시조를 주창한 육당(六堂)이나 자산(自山)의 논리에 갇혀, 문학, 그 자체로서의 시조는 관심 밖이었다. (박철희, 「현대시조의 특성과 장르의 다양성」)
(1)에서는 시조가 개인보다는 공동의 이념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노래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거문고와 가야금 등의 악기를 통해 향유하고 또 하나는 사설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의미 전달에 힘을 쓴 것으로 보인다. (2)에서는 현대시조와 자유시에 대한 공간적 문제, 전통시조 즉 옛시조와 현대시조는 시간적으로 대립됨은 물론 동일화의 논리에 갇혀 시조의 특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현대시조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성립이 과연 현대시조와 옛시조의 이해를 명확하게 돕고, 시조 작법, 즉 현대시조 읽기와 쓰기에도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문제에는 이르지 못한다. 여러 학자에 의해 잘 정리된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실용성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현대시조는 옛시조의 그림자와 무게에 짓눌려서 발목이 짓눌려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시조에 대한 인식 또한 제각각이거나 불분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조 고유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을 보면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뻔할 것으로 인식된다. 시대의 변화와 문명의 발전, 다양한 개인의 사유체계와 정서를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 협소하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정해진 배행 외는 일탈로 보는 문제가 내용에까지 파급되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실험적이거나 풍부한 내용과 어휘의 다양성을 불편해하고 거부하는 분위기도 있다. 시조 본연에 너무 천착하여 구태의 반복적 어휘의 나열과 종결어미의 뻔한 어투의 ‘~하나니라, 그러느뇨’ 영탄조의 방식을 식상해 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시조의 본연임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 시조에 담기는 소재와 주제, 어휘는 거기서 거기가 되거나 뻔한 신변잡기나 주변의 근시안적 접근에 머물게 된다. 당연히 재미도, 긴장도, 새로울 것도 없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습관적 언어의 반복적 나열에 매몰된다.
특히 지역의 시조인들 중, 동인을 결성하였지만 타지역과 타 문인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서인지 자기들만의 고집스런 시조 읽기와 쓰기의 방식에 고루하게 갇혀 있는 경우도 많다. 전통 고수라는 명목 아래 흐르지 못하고 고인물과 다름없는 반복과 답습의 현실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시조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것이야말로 전통 고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옛 방식의 영탄조의 시조 읽기와 뻔한 고루한 쓰기가 딱 붙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현대시조가 과연,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일까.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어느 쪽이든 시작하는 것이 낫다
3.
“아직도 시조에 관한 한 명쾌한 학설이 서 있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적 있는 교육이니, 주체성의 확립이니 하는 이 마당에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문학인 시조에 관한 뚜렷한 이론 체계를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서글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시조의 율격에 대한 대목에 이르면 더욱 복잡해진다. 이른바 평시조의 율격이 초장 3·4·4(3)·4, 중장 3·4·4(3)·4, 종장 3·5·4·3이라는 음수율(音數律)에 의한 정형 규정은 맹랑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시조의 정형을 음수율이나 음보율로 헤아리는 것은 시조창작을 위한 기본 개념과 지침을 제공하려는 데 있다.(윤금초, 『현대시조 쓰기』)”는 글에서 시조의 형식은 지키되 좀 더 자유로운 내용과 형식의 변형은 조금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1910년 이후, 30년대 현대시의 발전에서 보인 것처럼, 즉 시조 율격을 지킨 자유시, 자유시가 갖는 다양한 어휘를 발전시킨 것처럼 시조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시조를 아무리 자유시처럼 쓴다고 해서 결코 자유시가 될 수는 없듯이 타 장르의 시행착오처럼 쓰면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과정의 시간 또한 필요하다. 시조가 갖는 가장 중요한 형식과 요소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시조에서도 허용과 변모를 꾀할 필요가 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시조에서도 읽기와 쓰기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사고의 유연성과 쓰기의 유연성, 다양하게 읽고 다양하게 쓰는 것에 대한 고민, 새로운 읽기의 방법과 쓰기의 방법에 대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옛것을 그대로 모방 답습한다는 것은 시조의 발전보다 퇴보, 시대를 역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현대시조의 쓰기 방식은 시조인 각자의 몫이며 문제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늘 고민해야 한다. 이제 시조는 노래가 아니다. 자유시처럼 눈으로도 읽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몸으로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노래로도 다시 불릴 수 있어야 할지 모른다. 다양한 시조 읽기와 다양한 쓰기뿐만 아니라, 폭넓은 문학 공부와 현실과의 부침을 통해 현대시조도 일정 부분 과감히 변모해야 한다. 예술은 변화된 세상에 따른 새로운 문제에 끊임없이 봉착해야 발전한다. 그래야만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예술이 된다. 특히 그 시대에 맞는 사회현상과 정서, 정신을 작품에 진솔하게 담아내어야 한다. 피상적 언어와 기억에 의존해서 쓸 때라도 현실을 바탕으로 작시(作詩)를 해야 한다.
특히 내용적인 면에서 지금보다 더욱 다양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형식의 문제도 고민해봐야 한다. 한 예로 시조단에서 큰 상을 받은 작품이 현대시조의 탁월한 전범으로 여겨 답습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도 돌아봐야 한다. 10년 전이나 20년 전 그리고 4, 50년 전이나 작품이 똑같을 순 없을 텐데 거의 변화하지 않는 작품이 큰 상을 받았기에 우수하다는 근시안적 안목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현대시조의 발전은 온전히 원래의 모습을 지키는 것에 있지 않다. 다양한 시도,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만나고 사물을 관통해야만 새로운 자아와 세계를 만날 것이고 거듭 발전한 현대시조의 단단한 골격을 건져낼 것이다. 천 년 전의 시조 역시 그러한 변모와 발전을 거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고 사람도 달라졌다. 그에 걸맞게 형식의 변모도 제대로 고민해봐야 한다. 현대시조의 신선함은 그릇은 그릇이되 새로운 그릇일 때 제대로 신선하다. 뻔한 그릇일지라도 그릇의 쓰임과 역할의 확장이 필요하다. 무엇을 담아내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제라도 폭넓은 고민이 있어야만 한다. 진정한 예술이란 정체(停滯)를 버려야 한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인간 활동, 그 산물을 통틀어 예술은 발전하는 것이라고 사전은 정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현대시조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어느 쪽이든 시작하는 것이 낫다.

박지현
1996년 《시와시학》 시, 1999년 《월간문학》 동시,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집 『못의 시학』 외 다수, 논문 「일제강점기 저항시의 ‘주체’연구」 「만해 한용운과 시적계보 탐색」 외, 시조평론집 『우리시대의 서정 우리시대의 시조』, 시평론집 『한국 서정시의 깊이와 지평』이 있음. 〈김상옥시조문학상〉 〈지용신인문학상〉〈이영도신인문학상〉 〈청마문학상신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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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공정한시인의사회 2018년 0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