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정진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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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언제부턴가 내 속에 두더지 한 마리가 굴을 파고 산다
요 며칠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고 자꾸 땅만 파며
파묻혀 있다 그는 분주히 이 굴과 저 굴을 연결하고
다시 판다
이따금 머리에 흙이 묻은 채 나오기도 하지만
그는 금방 햇빛에 부신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숙인다
그는 자꾸 흙냄새를 맡으며 하늘 따윈 볼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럴 때는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날은 느닷없이 감자밭에 나타나 씩씩거리며
이빨로 위협을 하다가
땅속으로 들어가 굴을 파며 밭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한다
감자를 캐던 나는 놀라 잡으려 하지만
잽싸게 굴속으로 들어간 그를 잡기는 힘들다
그의 굴은 여름에는 얕고 겨울에는 깊어진다
곰곰 무언가를 궁리할 때 그의 굴은 더 깊다
그럴 때 그는 지렁이 한 마리를 발톱으로 쿡 눌러
죽지 않을 만큼 목숨을 남겨놓고 저장했다 먹는다
도대체 그는 언제 밖으로 나오려는가
누군가 몇 번 지렁이로 유인하여 억지로 그를 꺼내 햇빛을
보이려 했다면 그의 흙 세례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위협을 느낄 때 그는 뒷발로 흙을 파내 날리는 습관이 있으니까
생의 많은 사건들을 이어주는 굴을 파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한구석에 물건처럼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내 한 생의 지도를 만들어 놓는 것 같기도 하고
굴 한구석에 쓰레기처럼 쌓아 놓은 것들이 보인다
두더지가 버려야 할 저것들 속에
내가 저질러 놓은 뭔가가 숨겨져 있다
저기 어디쯤
저녁이 올 때 그는 내 안에서 죽을 것이다
두더지와 죽음은 왜 닮았을까
이 굴 저 굴을 들여다보며 들춰내려 하지만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두더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진혁 l
2008년 《내일을여는작가》 등단. 시집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드디어 혼자가 왔다』 가 있음.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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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호(VOL.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