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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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효숙 

 

 

 

 

 

#1. 시와 철학 : 사건의 시학

      

● 김효숙

 

 

 

   

   0. 

   

   이 글을 시작으로 이후 몇 편의 시학을 전개할 예정이다. 최근의 시로 읽는 현대시사 정도가 될 것이다. 시가 다 적지 못한 여분을 시학이라는 번듯함으로 위장한 잡학으로 대체하여 채워볼 요량이다. 관념에 파먹힌 정신의 속살은 복원하지 못할지언정 그 정체를 알고자 하는 시도만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삼는 일. 다양체로서 현대시는 지금도 은밀히 분열체를 만드는 중이므로 잡다한 담론도 부단히 생산해야 하는 일. 이 두 개 항의 분리 불가능성 앞에서도 새로운 시를 발견하리라는 기대만은 놓지 않으려는 작업이다.

     

   1. ‘다른 시’를 위하여 

  

  사유를 떠나기 어려운 조건은 시인과 철학자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시인은 철학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사유의 다름을 만들어내는 감각으로 ‘사유의 사유’에 붙들린 자아를 구출해 낸다. 시인의 사유가 관념에 머무느냐, 실존적인 난관들과 더불어 어떤 생산성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데서 철학과 시의 갈래짓기가 이뤄진다. 사유의 틀 안에서 논리의 뼈대를 갈고 닦고 세우는 철학과 달리 시에는 우리의 감정이나 감각·신경이 반응하게 하는 온도가 흐른다. 우리가 시인을 무언가 결핍된 것에 민감한 자라 여기는 이유 중 하나도 이 점에 연유한다. 여기에 생략된 지시어는 그에게 결핍된 모든 것들과 잠재적으로 연결된다. 시인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것을 말하고, 우리는 자기 안의 생각을 끌어내 주는 시인의 언어에 공감하는 마음을 포개 놓는다. 우리의 실존이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로 얽혀 있는 까닭이다.

  시는 사라짐의 순간이라는 토대에서 시인의 불안을 안고 태어난다. 시인은 생각 세우기와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이것을 금세 잃어버릴 수 있다는 허무를 내면화한다. 문자로 붙잡아 두려는 열망과 허무가 뒤섞인 채 시는 발생한다. 불변하는 신념이나 종교·철학에 배치되는 그 무엇이 시에는 있다. 하여 시인의 언어에 만족이나 행복이란 애초에 없다. 완전성에 대한 의심을 거치며 수시로 변하는 것에 이끌리므로 시는 본래 시인에게 없는 것에 대한 발언이다. 결핍된 것과 불만족의 세계는 침묵 속에 묻혀 있어서 시인은 거기에 언어의 날개를 달아 주고자 한다.

  보편화한 철학이든 개인화한 신념으로서 철학이든 이것이 예술과 맺는 관계를 무시하기 어렵다. 어느덧 신념이 되어 버린 숱한 관념들에 침윤된 단독자의 사유도 그렇고, 하나의 구조에 속박된 자도 그 체계에서 분배받은 속성이 지식이 되면서 이것을 지켜나가려는 의지를 굳히게 된다. 그래서 자기만의 종교가 된 믿음의 형태들이 불변하는 철학으로 자리 잡힌다면 시의 작용점은 생기기 어렵다. 보편성으로서 철학과 시적 사유가 만나는 지점도 분명 있을 것이나 이것이 곧장 시의 독립적 실존과 연계되기는 어렵다. 시와 철학은 ‘다름’으로써 가능한 사유의 방식이다. 사유 체계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맺지만, 쌍생아가 아닌 이종이다. 관념·추상이 시인의 의식 영역에서 시적인 작용을 하면서 변태하는 까닭이다.

  정리하면, 철학에서 분배받은 시의 의미 체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점을 짚어 보기 위하여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사유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 )의 담론 쪽으로 디딤돌을 놓아 보겠다. 그는 『비미학(inesthétique)』1)에서 시와 철학이 어느 한쪽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부정한다. 철학은 시 다음에 오는 것, 시적 사유로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사유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펼친다. 그렇지만 그의 담론이 종단에는 철학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언술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표면으로는 예술 작품의 독립적 실존을 말하면서도 암암리에 반어적 효과를 노린 글쓰기 전략인 것이다. 그는 미학적 사변을 ‘철학’이라 명명하고, 철학 내적인 효과를 예술 작품의 독립적인 실존과 연계하여 비미학(시학)이라 부른다.

     

   2. 미학(철학)적 사유인가, 비미학(시학)적 생산인가 

 

   당연하지만, 시만을 위한 철학도, 철학만을 위한 시도 있을 수 없다. 바디우의 사유가 의미있는 건 그것이 비미학을 위한 미학인 점에서다. 그는 결국 미학에 독립적인 실존을 부여하는 사유 과정을 펼쳐 놓는다. 상호 침투하는 영역을 열어나가면서 비미학을 근간으로 자신만의 미학을 세우는 과정을 진술한다. 그의 논리는, 일자(一者)의 진리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다자성을 그러모아 설득해야 가능한지를 역설하는 데서 발견된다. 그의 사유 과정에서 핵심어는 ‘진리’다.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시냐 철학이냐는 질문은 어지러운 회로를 만들며 ‘시’라는 답을 향하여 간다. 그는 철학이 진리 사유의 방편일 뿐 생산에 기여하지는 못한다고 적는다. 사유/생산의 항에서 어느 쪽이 관념이고, 어느 쪽은 활동성이 필연인 실존과 연계되는지에 관해서는 주석이 불필요할 정도다. 진리를 생산하는 시의 실존을 용인하는 그에게는 이것이 결코 관념일 수 없는 실재를 일컫는다.

   그러나 현대시에서 진리는 역설적이게도 이전의 진리를 무효화하면서 생긴다. 하나로 통합된 세계의 어떤 국면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소란스러움을 가중시킨다. 누구든 무엇이나 말할 수 있다는 감각으로 독립적인 언어의 장을 만들어 간다. 그 소리는 제각기 다른 파장을 지녔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 배제할 수 없는 작용점을 지닌다. 일자의 진리만으로는 외기둥으로 설 수밖에 없는 세계를 대신 떠받치는 것이 수다한 기둥들이다. 진리라는 하나의 지붕을 머리에 인 채 난립하는 제각각의 버팀목들이다. 현대시는 진리의 외기둥에 동요하며 자기 고유의 언어 기둥을 세운다. 그런 뒤에도 부단히 변형을 가하는 건축술로 진리라는 지붕을 지탱케 하는 낱낱의 힘으로 존재한다.

   예술과 진리의 문제를 사유한 이가 바디우만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가는 종교적 헌신에 가까운 낮은 자세로 시언어를 창안하였다. 자신이 몸담은 세계의 절망을 뚫고 나갈 열림의 장이 절실했으므로 숨은 자세로 예술 형식을 수호했다. 반면에 플라톤주의는 국가 운영을 찬양하는 노래를 제외한 시가를 금지하는 가운데 국가를 등에 업고 권력의 위세를 앞세웠다. 그들은 이데아(철학)에 의지하지 않고 상상적 창조를 진리라 여기는 예술 창작의 주체를 추방했다. 시는 거대 정치나 권력에서 배제된 자, 시민에서 누락된 자, 은둔자의 목소리에 실려 나왔다. 이후 낭만주의자들이 복권한 시의 지위도 플라톤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진리라고 규정된 것 바깥에서 사이비일 수밖에 없는 예술지상주의자의 목소리에서는 철학이 예술로 환원하고, 예술은 진리를 담지하게 된다. 이와 다르게 고전주의자들은 예술 곁에 철학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예술과 철학의 대립을 중재한다. 예술과 철학의 주종 관계를 철회하고, 예술을 진리의 구속에서 해방시키며, 히스테리로부터도 벗어나게 한다. (바디우, 11~14쪽)

  모든 언어 현상 중 시를 가장 우위에 둔 하이데거의 사유, 예술을 모든 상상적인 것의 생산으로 보는 예술 일반론에 대한 부정을 거쳐, 진리 생산자를 예술로 본 바디우에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떤 계기로,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가. 그는 앞선 도식들과 다르게 예술을 진리의 영역으로 초대한다. 국가와 역사의 품 안에서 시민에게 예술에 봉사하도록 강제한 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이 인간 존재 그 자체로부터 일어난다는 하이데거 식의 생기적 세계관, 신과 우주의 섭리에 역사 진보의 원리를 대입한 낭만주의 경향, 자기의식이 포화상태에 이른 심리주의 등을 넘어 예술의 내재성과 독특성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예술은 어떤 효과를 꾀하기보다 오직 예술 자체의 실존이라는 진리를 지닌다고 본다. 우리가 궁금한 것이 바로 이 실존과 관련한다.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예술적‧과학적‧정치적‧사랑에 관한 것일 뿐 철학적이지는 않다는 그의 말에서 철학은 분과적 성격에서 빠져나온 사유의 한 형태임을 이른다. 그러면서 그는 유일한 진리와 유일한 주체가 아닌 다수의 존재론을 기입한다. 이는 전통적인 존재론에 반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다수성과 비일관성을 뒷받침하는 논지다. 이때의 강조점은 예술 장르에서 불거지는 사건들과 관련한다. 만약 예술이 진리라면 거기서 어떤 사건이 시작되어 예술적 절차를 밟게 된다면서, 예술에 사건이 없다면 천재의 전유물이라는 관념론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적는다. (바디우, 20~29쪽)

  이로 미루어 사건은 불시에 터져 나오는 것, 일자의 질서에서는 비정상적이고 나쁜 것이다. 이는 오로지 개체의 생명성이나 존재론에 밀착한다. 단단한 구조 내에서도 사건은 터져 나오는데 이때 그 구조를 벗어나는 순간의 파열음을 동반하는 하나의 강렬한 생명 활동이 시작된다. 구조 내에서 지켜내려는 보편적 도덕이나 통용되는 상식을 깨고 나오기 때문에 이전의 언어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도 없다. 이것은 하나의 체계를 벗어나 개별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그럼으로써 이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잠재성을 지닌다. 그 현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는 바로 그 사건을 대면한다. 불경하다는 감정을 촉발하고,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할지라도 거기에 어떤 이의 진실이 진리로 개시되는 지점이 있다. 지금부터 읽을 시들에서 그 진리 사건이 벌어진다.

    

   3. 욕망의 존재론 

  

   시는 어떤 구조에서 추방된 것의 귀환을 알린다. 소외되었거나 누락되었던 타자성이 어느 순간 시인의 초대를 받는다. 시인은 정상성을 기준으로 이 세계를 관조하지 않으며 거기에서 배제된 것, 구조에서 비정상이라 말하는 것, 구조에서 탈락되었기에 헤아려 셈할 수 없게 된 것, 무가치하다며 방출된 것,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가 단지 문자를 배열하는 일일 뿐이라면,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앙 안에서의 아포리즘 정도가 되지 않을까. 먼저 만나 볼 시인은 아타세벤 파덴2)이다. 시인의 이름도 시도 생소하지만 하나의 사건 속으로 속수무책 끌려 들어가게 만든다. 우선은 흥미롭다는 이유로, 다음으로는 이전에 보지 못한 존재론적 탐색이라는 이유에서다. 시의 화자는 자신이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퍼붓는 사람들을 대면하고, 자신의 입을 다물게 하는 “너무 많은” 상처에 직면해 있다.

 

   그걸 봤어 엄마가 구석진 곳만 찾아서 비스듬히 알을 까는 거야 그것도 수십 번이나 까고 도망가고 또 다른 구석을 찾는 거지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배가 항상 볼록 튀어나와 있어 난 그 배에다가 사포질하고 싶었어 어쩌면 모서리는 구석과 더 잘 맞을 테니까

 

   사람들이 자꾸 물어봐

   동생은 몇이야

   동생이 너무 많아

 

   엄마가 자른 수박에서 늘 양파 냄새 나 엄마가 준 과일은 항상 어디 상처 나 있거나 상한 면이 있어 그리고 밤이 되면 죽은 아빠들이 집을 자주 들락거리는 거야 그럴수록 엄마는 더 밉게 동그래져 언제나도 더럽게

 

   그래도 날지 못할 뿐 날개는 있어

 

  누가 그러더라 사마귀든 메뚜기든 다 비슷비슷하대 그 말은 집에 구석진 곳이 없다는 말과 같기도 해 벌레 조각만 먹고 살아도 내게는 아직 음침한 면이 남아 있어 글썽이는 눈이 둥근 것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탓이랄까

 

   몇 번을 탈피해야 나비가 되고

   얼마나 노력해야 새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건 없어 애초에

   날개를 타고났다는 것만이

   내 유일한 자랑이기에

―아타세벤 파덴, 「사마귀의 둥근 구석」(《릿터》, 2025년 6~7월호)

 

   악마(Demon) 근성과 저주받은 자의 유전자를 지녔던 서구 상징주의 시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우선은 엄마의 다산성과 “죽은 아빠”들과의 관련을 “사마귀”의 습성으로 이해하게 된다. 교미 후 수컷을 먹어치우지만 수백 개의 알을 낳는 다산성의 상징인 사마귀가 하나의 주체로 부각되는 때는 복수(複數)의 아빠들이 밤마다 엄마를 찾아오는 유령적 상황부터다. 날마다 살아 돌아오는 아빠가 날마다 갱신되는 엄마-욕망의 다른 이름으로 읽히면서 시적 진실은 급선회한다. 모성을 단지 다산성에만 붙박아 둘 수 없게 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이 사건으로부터 뿜어 나온다. 욕망의 환유인 생명력은 나쁘지도 불결하지도 않으며, 단지 출구를 찾는 것처럼 부산해 보인다.

   아이 낳는 성을 배당받은 엄마는 이렇게 다른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 전면에 부상한다. 보편적 인식에 구멍을 내며 출현한 엄마에게 그 누구도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 못한다. 낯뜨겁게도 화자는 “동생이 너무 많”아서 “동생은 몇이”냐는 질문을 자주 듣지만 대답할 명분도 마땅한 답도 갖고 있지 않다. 이 일은 그 누구도 이유를 모르는 데서 일어났고, 지식을 동원하여 누누이 설명할 수도 없다. 가치의 혼란만이 필연이다. 하나의 사건은 구조 내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그것을 깨고 나온 자가 주도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합체에 구멍을 낸 욕망 주체의 출현을 계기로 도덕 체계와 인식 체계에 균열이 생긴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의식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의 연쇄 속에서 시적 화자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 누구도 이유를 모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영역을 시인은 질문의 형식으로 꾸려낸다. 구조에서 누락된 자, 부재를 통해서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아빠의 유령적 부활을 엄마 욕망의 메타포로 등치한다. “배가 항상 볼록 튀어나”온 엄마가 있는 그 자리에서 욕망 주체가 발생한다. 이때의 이기성이 번번이 사건을 만들면서 엄마는 다산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무모하기까지 한 엄마를 구제하는 건 엄마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반성에 무지한 욕망이 형식을 입자 엄마는 다산성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그녀의 왕성한 생명력의 출처는 “나비”나 “새”에게는 없을 법한 실존적 욕망이다. “사마귀든 메뚜기든 다 비슷비슷”한 습성을 지녔기에, 욕망 대상을 잡아먹어 포식하는 생명력이 그녀를 저토록 가벼운 영혼의 은유인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실존의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이 시는 초월자의 메타포인 새나 나비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질문을 함유한다. 순수 감성의 세계에서라면 오염되고 부도덕한 자, 배제되고 누락되어 풍문으로나 떠돌 법한 자가 시인의 초대를 받는다. 엄마의 생애 구간 중 생명 창조가 왕성하게 이뤄진 어느 지점에서 포착해 낸 인간 존재론의 이면에는 죽은 아빠도 살아 돌아오게 할 만큼 무서운 생명력의 주체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날개를 타고났다는” 점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아는 또 한 마리의 사마귀인 화자 역시도 엄마 사마귀의 이기적 유전자가 분배한 생명력을 지닌 자로서, 견고한 구조 바깥으로 날아오르는 엄마의 욕망을 복기 중이다. 매번 아빠라는 욕망 대상을 영접하는 엄마가 밉상스러운데다 불결하다면서도 유전자에 새겨진 이기적 욕망을 앞서는 건 달리 없다. 진리의 유일성이라는 지표에서 소외된, 오염되고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에게 달린 날개의 은유를 세습한 자. 화자의 목소리는, 무한한 창조 과정에 연루된 그의 생애에도 갖가지 사건이 관통하리라는 예감을 자아올린다. 이 존재자들에게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욕망의 포식자’ 정도가 될 듯하다.

   이제 고명재 시인의 시를 읽는다. 인간은 타자에게 이름을 붙여 고유성을 부여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죽음 같은 절망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어느 날 다른 이름으로 변장한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존재의 유일성을 지명하는 고유명사를 바꾸어 갱생의 다짐을 새겨 넣고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리라는 시도 속에 이전과 달라질 삶에의 열망을 심어 놓는다. 아래 시는, 엄마의 욕망을 폭로한 앞의 시와 달리 엄마의 생애 구간 중 몇 개의 장면을 요약하는 형식으로 구성한다. 여기에 호명 사건이 개입한다. 엄마의 인생 유전에서 기어이 살아내고자 한 동력은 “애들”에 있다.

 

   양말아 스티로폼 날아간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는데 스티로폼이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다 노점에서 양말 파는 아주머니가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시장은 늘 이런 식이다 영일채소는 영일아 실한 알배추 있나? 하고 불리고 풍미당베이커리는 풍미당아― 풍미당아― 카스테라 남았냐 하고 부른다 우리 엄마는 시장에서 수미로 통한다 누가 밖에서 수미야 하고 부르면 엄마는 내 시집을 돈통에 꽂고 왜 부르노! 화통을 펄펄 삶아 먹는다 원래 엄마는 엷은 비단을 목에 감싸고 다녔다 (중략) 네가 아직 콧대가 덜 부러졌구나! 가게는 문지방이 낮아야 발이 오간다 혜영아 네 안에 수라상 산진해찬을 엎어라 클래식이고 미대 졸업장이고 몽땅 버리고 버려라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거 다 깡그리 버려야 애들이 산다 엄마는 그렇게 수미가 되었다 무말랭이를 무치고 전복죽을 쑤면서 가끔 내 낭독회 영상을 본다 그러다 누가 수미야― 하고 밖에서 부르면 엄마는 당신 엄마가 온 것 같단다 그럼 문을 활짝 열고 껴안는 거지 긴 터널 밖으로 나온 것처럼, 그래도 이거 엄마가 지어 준 내 이름이다? 나는 두 번 당신 딸로 거듭 살았어

―고명재, 「수미」 부분(《파란》, 2025년 가을호)

 

   이 같은 발상은 어떤 면 퇴보하는 상상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여기 누군가의 진리일 수 있는 가능성은 그보다 더 농후하다. 시인은 ‘엄마의 엄마’에서 엄마로 이어지는 모성의 윤리를 들춰보겠노라 마음먹은 것 같다. 앞서 본 엄마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여분에서 욕망이 발현하는 양상을 보았다면, 이 시는 부성 부재의 모계 혈통을 이야기한다. “두 번 당신 딸로 거듭 살았”다는 엄마의 고백에서 ‘당신’은 엄마의 엄마를 지칭한다. 반찬 가게를 열면서 여러 상호를 두고 고민할 때도, 지금은 ‘수미’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만 본명인 ‘혜영’을 버리게 된 것도 모계 혈통의 개입에 의한 결과였다. 본래 이름인 혜영을 포기하고 당신의 딸로 두 번째 삶을 살았노라는 고백에는 화자의 엄마로서 정체성인 ‘수미’가 본연의 혜영을 버린 뒤에 얻은 이름이고, 이것이 엄마의 엄마에 의한 인생 설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상한 가치를 함유한 혜영을 버린 대신 수미를 얻은 엄마의 삶에서 지켜낼 수 있었던 건 “클래식”도 “미대 졸업장”도 “아리아”도 “갤러리”도 “웨딩드레스샵”도 아니다. 혜영의 의미와 가치들이 폭망하는 역사를 만들어 그 이름을 복권하지 않았을 때에야 수미라는 이름을 반찬가게의 상호로 당당히 내걸 수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얻어 영위하는 삶에서 애들을 소거할 수 없으므로 엄마의 윤리는 언제나 이 애들에 기반한다. 지난한 삶의 국면을 돌파해야 할 때 수미여야만 열리는 세계가 있고, 혜영이었을 때 동반했던 고상한 가치들을 버려야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전신 갑주를 두른 투사로 생활전선에 나설 수 있다. 엄마의 무게감과 자리는 신비를 유발함이 없이 생활인의 역량을 재는 중에 저울질된다. 더불어 고통도 당연시된다. 엄마의 역량이 드러나는 방식이 엄마 자체를 위한 것이기보다 애들을 위한 것인 이유도 엄마가 이 어린것들로 하여 얻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내 시집을 돈통에 꽂”아 넣은 엄마에게서 읽히는 속내도, 누군가 “수미야― 하고 밖에서 부르면 엄마는 당신 엄마가 온 것 같”다며 달려나가 상대를 껴안는 행위도, 엄마의 정체성이 무력해지는 순간을 털고 일어서는 자세로 보인다. 엄마라는 이름에 온전히 복무했던 엄마의 엄마가 창조해낸 그 이름 수미는 돈 통에 시집을 대신 채워 넣고, 누군가 “수미야” 하고 부르면 “화통을 펄펄 삶아 먹”을 듯이 이에 응하는 화자의 엄마다.

   이렇게 혜영의 수미 되기가 하나의 사건일 수 있는 것은,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할 진리 속에서 거듭 태어난 주체일 때다.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엄마는 화자의 시집을 돈 통에 넣어 이로써 자신의 말을 대신한다. 돈이 될 수 없는 시집을 돈 통에 꽂아 넣고 펄펄 힘을 내는 엄마가 시를 짓는 화자의 실존을 지탱케 하는 힘인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엄마의 역량을 드러내는 계기는 애들로부터, 그 애들 중 하나인 화자의 역량이 드러나는 계기는 엄마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혜영의 영향력이 무력해지고 수미가 솟아오르는 세계에서 엄마는 새로 태어난 사람. 엄마라는 정체성에 근거한 수미로 활약하면서 애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 화자의 시작(詩作)과 “낭독회”를 지지하는 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하면서 엄마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때에도 엄마의 지지가 추동할 또 다른 힘은 사건으로부터 생긴다. 혜영이라는 명명으로 돌아가지 못할 엄마의 현재는 돈 통에 시집을 꽂아 넣고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환원한다. 반찬을 팔아 시집을 내게 했든, 시집으로 돈을 벌어들였든 이것은 사건이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사건이 되는 경우는, 돈이 되지 않음에도 시집을 발간하는 경우다. 비정상의 정상화, 정상의 비정상화가 사건을 만든다. 시집 판매로 재화 생산이 가능한 경우라면, 시집을 냈는데도 팔리지 않는 것이 사건이다. 시집 판매로 재화 생산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팔리지 않는데도 시집을 낸 것이 사건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시집은 뒤의 경우일 공산이 크다. 그래서 이 사건의 핵심은 돈 통에 든 시집이라는 표상에서 한층 도드라진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엄마의 엄마의 목소리가 현전하는 지금 여기서 각성되어 있는 주체는 바로 화자의 엄마다.

    

   4. 너 : 내 안의 타자 

 

   시인이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일은 이전에 현전하지 않았던 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의 출현을 언어에 맡기는 일이다. 오직 언어만이 무한하고, 언어가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 두는 것도 역시 언어뿐이라는 감각으로 시적인 순간을 마주한다. 백인경 시인은 「페이지 터너」에서 무엇보다 급선무인 것이 ‘그녀’부터 고용하는 일이라고 적는다. 시 쓰기에 초대된 “페이지 터너”인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책무는 페이지가 잘 넘어가도록 미적 장치를 하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화자의 주문 내용을 보면 그녀는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일과 크게 상관없는 주문을 감당 중이다. 화자의 창작에 전적으로 개입하다 보니 종국에는 누가 창작자인지 모를 만큼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화자가 그녀를 유령과 유사한 정체성으로 보고 있는 건, 창작이 전적으로 자신의 소산이 아님을 말하려는 의도다.

 

좋은 시를 쓰는 것보다

압도적인 시집을 출간하는 것보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낭독회를 여는 것보다

그녀를 우선적으로 고용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내가 쓰는 행간을 쫓으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

미래의 귀퉁이를 미리 접어두는 일

밤낮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

그리하여 내가 외우지 못할 진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는 일

 

(중략)

 

아직은 안 돼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손을 떨며 애원하자

그녀는 다정히 무릎을 어루만지며

충분히 불행해질 때까지 기다려주겠노라 했다

꼭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 백인경, 「페이지 터너」 부분(《자음과모음》, 2025년 가을호)

 

   사전의 정의에서 페이지 터너의 작업은 기악 연주자를 대신하여 악보를 넘기는 일이다. 시현실에서 페이지 터너는 집필 중인 화자를 돕기 위하여 겨우내 다녀가는 자기 안의 타자적 속성인 듯하다. 화자의 기획 의도에 따라 현실과의 적당한 거리 유지, 무의식의 층위 만들기, 미래의 가능성을 암시하기, 열린 사유와 열린 결말을 고안하기, 엄연한 진실을 주지시키기 등을 잘 감당해 주기를 바라지만 기대와 달리 “남은 페이지가 얇아질수록 그녀의 채도가 낮아”지기만 한다. 그녀의 역량이 소진되고 있거나, 결말로 갈수록 역할이 축소되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의 글쓰기에서 페이지 터너의 조력이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그녀와 “자리를 바꿔 앉게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거세지는 지금은 저자인 화자보다 그녀의 역할 비중이 우세해진 상황이다.

   이 시의 문제적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저자와의 자리바꿈으로 영향력의 전도가 가능한 그녀가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상황에 봉착한다. 그녀는 화자가 “충분히 불행해질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다짐하지만 이 불행은 아직 추상에 머문다. 분명한 것은 화자를 지원하는 마지막 힘이란 것이 불행의 능력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으로서 불행이 화자에게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이후 화자의 글쓰기는 불행과 함께하는 작업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화자와 분리하기 어려운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이며, 그녀의 다짐에 어른거리는 속내도 화자와의 동일시 감정에 의한 것이다.

   앞서 화자의 기획을 차질없이 수행한 것을 보건대 그녀는 화자 내면의 타자성이거나, 정신 심리 차원에서 무의식의 층위에 있는 자아의 삼인칭일 수가 있다. 시를 쓰는 내내 동일시와 타자성을 오가며 출현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화자의 분열체. 화자가 억제하지 못할 힘으로 닥쳐드는 사건이 돌출하는 순간과 불행의 감각이 만날 때 화자와 그녀의 만남도 다시 이뤄질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완성하게 하는 건 어떤 사건이 몰아오는 불행의 감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시 쓰기의 끝판왕이다. 끝으로 김현 시인의 시를 읽는다. 어제의 일은 침묵 속에 묻어 두고 오늘의 홀로 되기가 자기 안의 타자와 어떻게 연결점을 만드는지를 이야기한다.

 

   홀로라는 메아리 되기.

 

   홀로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는 것.

 

   지난밤에 나는 뛸 수 있었지만, 나는 헤엄칠 수 있었지만, 나는 건널 수 있었지만, 나는 변할 수 있었지만

 

   홀로 되면 더는 나를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땐 내 안의 나를 너라 부르고 너를 생각합니다. 안의 너. 아네가 이사 가자 합니다. 다 버리고 새살림을 차리자고 합니다. 아네의 헌 살림에는 너무 많은 구멍과 누수 자국, 그을음과 깨진 손톱, 눈물 부스러기 찍어 먹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마음에 벽지가 들뜨면 찢어 버리는 수밖에.

 

   찢겨야만 드러나는 금빛 해변과 흰 파도의 나날.

 

   홀로 노래하는 사람이 좋아요. 둘도 싫고 셋도 싫어요. 어쩔 땐 그래요. 눈이 와서 그래요. 눈 오는 날엔 우리 모두 홀로 내버려 둬요. 그러다 죽어 버려도 모르게. 남모르게 하는 생각 속에 사는 짐승을 홀로라 이르면 아네는 기어이 자기 뺨을 후려칩니다. 천천히 차오르는 분홍빛 물듦. 청아한 눈물. 울려 퍼지는 메아리.

 

   저는 지금 홀로입니다. 리얼 탄산 100% 청정 라거를 두 컵 마셨고 지난 밤과의 사투 끝에 기어이 이 시를 적었습니다.

 

   지나가겠지. 지나갈 리 없어.

   쓰고 싶었는데 쓸 자리를 찾지 못하여 이렇게나마 당신께 보냅니다. 홀로 되어 네 발 달린 완행에 몸을 싣고 넘실넘실 안의 너에게 당도하거든 얼얼하게 말해 주세요.

 

   “여기가 끝이야, 다시 시작할래?”

― 김현, 「바다Ⅲ」 부분( 《문장웹진》, 2025년 9월호)

 

  아내를 “아네”라 명명하면서도 화자는 지금 자신이 자처한 외로움을 앓고 있다. 평온한 일상을 깨는 어떤 파열음이 있었던 것일까. 그 시발점은 “아네가 이사 가자”는 말, 헌 살림을 모두 버리자는 말이다. 마음이 어제의 사건으로 자꾸 회귀하지만 그것을 오늘 쪽으로 붙들어 놓고 마음이 청정해지기를 바라며 그는 지금 한 알의 모래알갱이처럼 해변에 앉아 있다. 홀로 있는 자는 시종 홀로라는 자신의 메아리를 듣는 자, 자아에 함몰되어 타자를 망각한 자다. 더 한 것은 홀로일 때는 자기 성찰조차 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기반성에 부끄러움도 후회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홀로 있음과 아네와의 있음 사이에서 자신의 있음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문하는, 타자와의 윤리에 민감한 자다.

  “내 안의 나를 너라” 부르며 타자화할 때 비로소 자아가 마주 보인다. “안의 너”를 발견하게 된 계기가 자기를 타자화하면서 주어진다. 나아가 아네라는 명명도 안의 너라는 자신의 존재 사건에서부터 깊어져 아내를 지칭하기에 이른다. ‘내 안의 나’가 ‘너’의 자리로 물러날 때 자기 성찰이 이뤄진 것처럼, 아네의 자리도 ‘자기 안의 너’일 때 비로소 확인된다. 아내라는 이름만으로는 사라져 버릴 법한 ‘너’를 아네라는 명명으로 붙잡아 두고 타자인 아내를 자기 안의 너로 위치시킨다.

   어제의 사건은 아내가 헌것을 버리자는 데로 비등했으나, 그 헌것의 일속인 아내가 정작 화자에게는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할 새로운 상대라는 점에 이 시의 역설이 자리한다. 화자는 지난밤 “이 시를 적”는 일과 사투를 벌이면서야 자신이 “남모르게 하는 생각 속에 사는 짐승을 홀로라” 여기게 되었다. 그런 그가 “눈, / 눈, / 눈,”이 내려 쌓이는 날에 세상 끝까지 갔다가 다시 “안의 너에게 당도하”면서야 어제가 끝이었고 오늘은 새로운 시작점임을 알게 된다. ‘안의 너’(아네)는 변함없이 화자의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전언, 아내가 ‘안해’에 어원을 둔 발음이라는 점은 남성-언어가 보존해 온 이 말에 딴죽을 걸 수 없게 만든다. 아네를 ‘아! 네!’라는 긍정어로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미묘한 언어놀이는 화자가 다시 아내에게로 왔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끝과 시작이 한 점에서 마주치는 삶의 사건들 속에서 하루는 갱신되고, 그 사건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너와 나의 관계는 펼침면을 모두 내보일 수 없는 일부의 전개도로 각자 앞에 놓인다.

    

   5. 존재 : 끝없는 질문의 출처 

  

   왜 시를 읽는가? 그 이유 중 하나가 시적인 사유를 대체하는 다른 방식의 사유를 찾을 수 없어서다. 오직 시적인 것만이 시를 시이게 한다. 설령 철학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시적으로 변환하고 변형하는 시인의 능력 안에서 시적인 것이 생산된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시적인 것이란, 하나의 사건을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가 인식론보다 존재론 쪽으로 경사된 경우에 근거한다. 반성을 모르는 욕망과 모성의 연관에 관하여, 모계에 세습되는 열정적인 헌신에 관하여, 모든 것이 갖춰진 글쓰기라 할지라도 불행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미흡하고 결손인 시에 관하여, 그리고 아내를 자기 안의 타자와 동일시하는 일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형성이 가능한 경우들을 보았다.

   철학도 시도 사유의 회로를 도는 언어 작용이다. 다른 점이라면, 철학은 사유에 대한 사유의 논리를 구축하는 것. 시는 사유에 대한 사유를 벗어나 만유의 존재론 쪽으로 기울면서 얻은 언어다. 바디우가 철학을 시의 뒤에 오는 것이라 말했을 때 거기에는 시가 다 채우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유에 대한 사유를 펼치는 것이 철학이다. (바디우, 56쪽) 반면에 시는 철학의 인식론과 달리 존재론적인 출입구를 지닌다. 그 문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도 시는 철학과 차이가 난다. 현대시는 입구와 출구가 다른 문 사이에서 예측 불허의 상황을 만든다. 하나의 사건이 벌거벗은 채 우리 앞에 도래할 때 우선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는 명명이나 판단보다 상황의 진리에 각성되는 일이다.

   언어가 무한한 것처럼 사건도 불시에 출현하는 무한성이다. 언어도 사건도 사후적으로만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사유를 거칠 겨를도 없이 발현하는 욕망과 더불어 사건은 터져 나온다. 그 욕망으로 하여 어머니가 되어 가고, 아내가 되어 가고, ‘나’가 되어 가는 일이 일관되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삶을 만지듯 날마다 죽음을 만지기 때문에 고통에 침윤된 자. 그의 이름은 인간이다. 예외 없이 고통의 주체인 인간에게 타자의 것마저 받아들일 여지란 것은 없으므로 그것을 전가할 수도 없다. 고통의 형식이 실존재의 평화를 흔들 때 그것은 불행이 된다. 시인에게 오는 시도 불행의 경험이 새겨진 사유를 동반한다. 불행의 감각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과 금지된 것들에 들러붙어 살아간다. 시인은 어떤 사건이 몰아오는 고통의 감각으로 시를 쓴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 주며 탈출을 돕는 애잔한 마음으로 시인은 그렇게 한다.

 

 

                                             

   1) 알랭 바디우, 장태순 역, 『비미학』, 이학사, 2016(1판 3쇄).

   2) 터키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2022년 《시작》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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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시의성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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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호(VOL.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