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025
Extra Form Output
저자 염창권 

 

 

 

 

 

시조와 나를 잇는 몇 개의 단서

   

 

 

 

   

   근래에 ‘나’라는 환(幻)을 늘 생각한다. 궁극이란 가능한 것일까? 그곳에 이르면 확정된 단어로 나를, 시조를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곳은 멀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인생 자체가 생의 편린(片鱗) 같은 것들이 과정적으로 모여서 떠돌며 흘러가는 환의 집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시조의 양식에 대응시켜 보면, 시조라고 명명하는 개념이나 형식에 관한 관념태 또한 환의 일종이 아니겠는가.

이 글에서는 필자가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 혹은 실패했던 미학적 입장들을 자기반성적 측면에서 점검해 보고자 한다.

 

 

Contemporary

 

 이 단어는 ‘그 당시의, 오늘의, neoteric, 혹은 현대의(modern)’ 등과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시조가 비로소 현대의 시 양식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의 시조부흥운동 이후라 하겠다. 그로부터 1세기라는 시대사적 자장 내에 관련 작품들이 현대시조라는 이름으로 포섭되었다. 출발 당시의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지금의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난 1세기 동안에 정치․경제적인 변혁과 더불어 생활, 예술, 정신사적인 패러다임 또한 급속도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보면 ‘현대시조’라는 용어보다, ‘오늘의 시조’라는 용어가 지금 우리의 동시대성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은 곧바로 어제라는 과거로 밀려나기에 오늘은 ‘거듭 갱신되는 오늘’이어야만 할 것이다.

 

*

 

 많은 시들 중에, 김삼규의 「마흔 살」과 황바울의 「옛 애인」을 소개하기로 한다. 유진수, 이현정 등도 눈에 띄었지만, 앞의 시를 선택한 이유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어법을 사용하는 게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 그 다름이 반드시 완성도의 기준이 되는 건 아니며, 오히려 실패의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 다름을 누군가는 눈여겨 보아주어야 하고, 그를 이해하려는 설명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창의적인 작품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두 편의 시조는, 시조 삼장 즉 초, 중, 종장의 의미 분할에 따른 연속된 적층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 수 안에서 각 장(章)이 독립, 나열, 강조되기도 하는데, 굳이 어느 장이 의미의 중심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는 듯하다.

 

   늙은 배관공이 매달아둔 장갑 속에

   연약한 먼지 한 톨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탄생이라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먼지는 굴뚝에서 검댕으로 자라나고

   세상의 모든 재를 삼키고 있었습니다

   청록빛 잎사귀에게 불길이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서른에게 한없는 자비만을

   한 번도 씻지 않은 얼굴로 돌아앉아

   가여운 도둑들처럼 죄를 묻고 있었습니다

 

   건실한 이야기만 끄적이고 싶었으나

   내가 스친 자리마다 탄가루만 쌓였습니다

   백지만 까맣게 물든 목탄화 속 병정들

- 김상규, 「마흔 살」 전문(『유심』 2025년 겨울호)

 

 제목이 “마흔 살”이니, 1984년생인 시인의 나이를 떠올려본다.

 전유(專有, appropriation)가 아닌, 시인의 경험에서 인화된 삶의 표징으로 여겨진다. 1~2연(첫째 수와 둘째 수)은 의문형 종결이다. 앞의 두 행(초·중장)은 현존의 조건이자 상황을 지시한다. 그리고 제3행(종장)에서는 강력한 설의적 질문을 터뜨린다. 즉 탄생과 성장에서의 제약적 조건, 검댕이 되어가는 무모한 불가피성과 같은 운명적 조건에 항의하는 것이다. ‘기원(紀元)으로서의 인생’이라 했을 때, 당신이 알곡의 씨앗으로 땅에 뿌려진 것은 당신의 선(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듯, 내가 검댕의 씨앗으로 굴뚝에 내려앉은 것도 나의 악(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상을 받아야 할 명분도 내가 비난받아야 할 잘못도 없다. 그와 같은 서른이 지나고, 나는 마흔이 되었다. “청록빛 잎사귀”는 무모한 불길 속에서 검댕이 되고 말았다.

 3연에서 “가여운 도둑들처럼 죄를 묻고 있었습니다”고 했을 때, 그 사연은 1~2연에 폭로된 바이다. 다시 ‘기원(紀元)으로서의 인생’이라 했을 때, 청춘을 무가치하게 방기한 것은 운명이, 신이 저지른 짓이다. 그 운명의 신이 저지른 죄를 뒤집어쓴 “가여운 도둑들”이 나의, 그리고 나와 동류인 타자의, “마흔 살”이다.

 시의 의미를 마무리하는 4연에서도 의도치 않은 결과만 되풀이하는 운명적 조건들과 나의 노력이 가져오는 무가치한 결과는 변경되지 않는다. “내가 스친 자리마다 탄가루만 쌓였습니다”에서 존재함 자체가 죄가 되는, 왜소해져만 가는 주체의 문제를 부각시킬 뿐 어떤 교훈적인 처방도 곁들이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현존에서 오는 비극성, 이에 대한 처방전 없음이 이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망을 찾을 수 없는 삶의 조건에서 오는 두려움, 공포감 등이 설의적 질문과 보고적 어투, 경어법 등을 통해서 현재화되고 있다.

 다음 시는 인물 간의 관계를 극화(劇化)하고 있다.

 

   애인은 투룸을 1.5룸처럼 사용했다

   옛 애인의 시가 있는 방을 봉해 버렸다고

 

   투룸은 방이 둘이고

   1.5룸은 방이 하나다

 

   셈에 약한 나는 시를 치워주기로 했다

   박수까지 쳐가면서 애인은 격려해줬다

 

   방으로 들어가보니 시가 고이 누워 있었다

 

   이름을 활용한 세 줄짜리 시였다

 

   흔한 이름의 옛 애인을

   반으로 접어버리고

 

   연필로 새 시를 썼다

   적의만큼 뭉툭했다

 

   변기에 버려달라고 애인은 부탁했다

 

   변명 없이 물을 내리자

   실감나지 않았다

 

   방주가 되기로 했다

   유실물을 잠시 품는

- 황바울, 「옛 애인」 전문(『유심』 2025년 가을호)

 

 이 시에서 등장인물은, 나와 애인, 옛 애인이다. 그리고 무대 장치로 1.5룸이자 투룸인 방과 변기가 있다. 이들을 매개하는 변수는 “시”라는 기표이다. 이와 같은 무대 공간 내에서 인물 간의 관계는 행동을 통해 지시된다.

 “애인”과 “옛 애인”은 적대적이다. 문제의 핵심은 “옛 애인”이거나 “애인”이다. “옛 애인”이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어, “옛 애인의 시가 있는 방을 봉해 버렸다고” 애인이 말한다. 방 한 칸을 문제 삼음으로써, 현재의 애인은 그 방을 자신이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내비친 셈이다. 사실상 “옛 애인”은 시이고, 그 시는 “이름을 활용한 세 줄짜리 시”와 같이 기호화되어 있다. 그 기호의 내용이 감정인지, 기억인지 분명치 않다. 시적화자이자 행동의 주체인 나는, 흔한 이름을 가진 이전의 시를 반으로 접어버리고, 연필로 적의가 담긴 새 시를 쓴다.

 이윽고, “변기에 버려달라고 애인은 부탁했다”고 했을 때, 그 시는 배설물과 같이 버려야 할 가치를 표기한다. 애인의 입장에서 “옛”은 변질되어서 냄새가 나는 어떤 상태가 된다. 애인이 요구했고 나는 실행했으나 “실감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아직 버려진 게 아닌 셈이다. 이로써 “유실물을 잠시 품는” 상태로 나의 내부에 머무른다. 이때 “유실물”이라는 표기가 추가됨으로써 나는 소유관계가 없음을 내비친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건, “옛”이 “시”라는 이름으로 기호화되어 있고, 또 그 시가 배설물처럼 하수구로 버려진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옛”과 “시”는 동격의 은유적 관계이며, 기억과 감정에 관한 ‘태도’를 나타낸다. 또한, 나와 “현(지금)”의 관계는 기호적인 역할 관계에 충실할 뿐 감정적 사태에 크게 연루되어 있지 않다.

 애인은 “옛”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기호적 대상이자, 은유적 의미로는 “시”이다. 시적 대상이 “옛 애인”인지 “시”인지 모호한 것은 기호적인 측면에서 “애인”이나 “시”가 비슷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굳이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의미를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사랑이나 시는 실존적 혹은 문화적 배설 행위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시라는, 기호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배설이 끝난 후에 곧 치워진다.

 이를 후기자본사회의 관계적 양상이라고 한다면, 이들에게 ‘천생연분’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관계적 가치를 지시할 뿐이다. 필자는 이를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나, 젊은 시인들의 시와 삶을 이해하고자 할 때 이와 같은 관점이나 태도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환(幻) 혹은 중첩 현실

 

 우리가 견지해 온 시에 대한 관념이 지나치게 경험적 현실을 참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흔히 시에서 ‘진정성’은 경험적 현실이 참조점이 되는데, 이로 인해 ‘현실적 개연성’, ‘그럴듯함’에 비중을 두게 된다. ‘시, 소설, 극’ 갈래 모두 허구적 문학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시에서는 일상적 경험 세계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시 갈래 또한 허구적 표현 양식이란 점을 염두에 둘 때, 표현 방법이나 내용 제시 면에서 환상성에 대한 인식과 활용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공상(환상) 혹은 판타지를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을 갖는 것으로, 상상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특징적인 산물이 공상 혹은 판타지이다. 즉, “공상(환상) 혹은 판타지는 우리가 현상적으로 느끼는 실재성과 대비되는 비실재성을 기반으로 하여 질서화된, 그 자체로서의 합리성을 지닌 상상적 세계(염창권)”라고 규정할 수 있다.

 디지털 세대인 젊은 시인들은 초현실주의적 합성 이미지에 망설임을 느끼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자연스런 경험적 현실로 받아들인다. 시적 경향이 나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실재적 현실의 시적 표현과 비실재적 현실의 현실화를 통한 시적 표현, 이 경계를 매개하지 않고는 서로를 이해하지도 소통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1930년대에 제기되었으니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난삽한 시들은, 많은 부분 분석심리학의 도움의 받아야 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망설임을 가져오는 환상의 형식적인 측면은 무의식적 담화의 형식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다음 시조에는, 시간적 중첩 효과에 의해서 반복된 오늘(어제)의 잔영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를 환(幻)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늘”이란 그 유령이 첩첩이 쌓여가면서 생의 바닥 혹은 배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없는 나는 창밖으로

   조금씩 휘어진다

 

   루이제 린저의 책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

   불투명 구름병마다 알약이 녹고 있다

 

   일요일 영화는 엄마에게 멈춰 있고

   오렌지를 까먹은 햇빛이 이동한다

   화단은 나팔꽃 따라 여름을 근무했다

 

   저 너머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나무 의자

 

   꿈은 왜 같은 말만 하고 슬픔은 벌어지려 할까

 

   오늘은

   까치를 만나요 늘 여기 있었는데

- 배경희, 「오늘」 전문(『유심』 2025년 겨울호)

 

 이 시에서는 실존적 정황을 묘사할 뿐, “오늘”을 개념화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엄마와 나이다. “오늘”이라는 현존의 한 장면을 담고 있지만, 정지된 상태의 적막한 오늘이다.

 오늘의 나는 있으면서도 “없는 나”이다. 이에 대한 실존적 단서는 “책”과 “알약”에서 찾아내진다. 여성적 삶의 서사에서 “성장”과 “자아 찾기”는 매우 중요한 가치 국면이다. 그런데, “없는 나”라고 한다. 이때 “자아”의 가치는 부정되고 무의미해진다. “불투명 구름병마다 알약이 녹고 있다”고 했을 때의 처방전은 화학 요법이다. 그러나 불투명한 무기력의 그늘인, 오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 “창밖으로/ 조금씩 휘어”질 뿐이다.

 둘째 수는 실존의 틈에 끼어든 별도의 서사이다. 그의 방에 액자처럼 걸려 있는 풍경이자 기억의 서사다. 이 움직임을 멈춘 풍경 혹은 자의식 속에 “엄마”라는 본향이 있다. “오렌지를 까먹은 햇빛”과 “화단”, 그리고 “나팔꽃”은 유년기의 크레파스화처럼 색채감이 강하다. 소녀적인 “동경”이라 불릴 만한 세계의 풍경이다.

 셋째 수에 이르러, “동경”에서 “꿈”으로 옮겨오면서 삶의 색채감이 사라지고 만다. “창밖”으로 휘어지는 나와 “저 너머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나무 의자”는 등가적인 은유 관계이다. 구멍 난 실존의 창밖으로 넘어다보는 오늘의 풍경은 공허이자 전망 없음이다. “저 너머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나무 의자”처럼 삭제된 실존의 오늘이다. 의자에 앉힌 것이 없는 오늘의 텅 빈 견딤이다. 종장에서는, “늘 여기 있었는데”와 같이 꿈의 덧없음과 허약함을 반추한다. “오늘은/ 까치를 만나요 늘 여기 있었는데” 에서의 논리적 모순은, “꿈”이 갖는 모순적인 정황과 등가적이다. 즉 역설을 통한 은유이다.

 이 시의 의미는 셋째 수 중장에 집약되어 있다. “꿈은 왜 같은 말만 하고 슬픔은 벌어지려 할까”,에서 나는 여전히 “꿈”을 꾸는 존재이다. 반복되는 꿈은 소비되어 쌓여간다. 다시 말하면 소비되는 일상적인 오늘의 쌓임이다. 여기서 시적화자인 나는 적막한 슬픔을 견디고 있다. 그러나 소리 없이 “벌어지”는 슬픔, 그 슬픔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 시를 통해 나의 현존을 비추어 볼 때, 나 또한 덧없는 꿈의 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내 슬픔의 입이 벌어진다.

 

 앞에서 인용한 세 편의 시조는 실존적 조건을 극화하거나 점묘화 한다. 나는 이들의 시가 기존의 어법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필요한 다름을 창조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 다름을 통해서 자유시에 방어벽을 세운 시조가 아니라, 시조로써 자유시를 내포하는 방식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좀 더 논의하기로 한다.

 

 

복합 양식(multi-modal)의

 

 표현 형태는,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가속화된 것으로 현대의 예술사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의 다매체 환경은 현대 예술이 전통과의 길항을 견디며 개척해야 할 도구적, 과정적 경계 영역에 있으며, 내부를 해체하고 외부로 확장해 나가는 통로 상의 좌표라 하겠다. 기존의 회화, 조각, 클래식 음악, 무용 등의 장르적 관념은 이미 해체되어 그 원형과 함께 현대적 해석이 공존하는 실정이다.

문학에 대한 지식도 축적되었으니, 1세기 전 조윤제에 의해 정리된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라는 시조의 정형률에 대한 선언적 개념화가, 동시대 혹은 그 직전의 고시조를 상당 부분 아우르지 못하는 헐거운 개념이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노력해 온 바로서의 1) 전통적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더라도, 이와 공존할 수 있는 2) 형식 개념의 확장이 요구됨을 부인할 수 없다.

먼저 시(자유시)와 시조 간의 갈래 형식을 예각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시조 쪽의 자기방어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시조에서 삼장 형식과 4음보 율격을 제외한 나머지가 열려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즉 시조는 형식인 면에서 1) 삼장의 의미 전개 2) 4음보 율격,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구속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의 노래였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시조로 볼 수도 있고, ‘어부사’라는 특정의 형태적 갈래로 볼 수도 있지만, 고시조에서 「어부사시사」를 빼놓으면 그 양적 풍부성이 빈약해지고 말 것이다.

 갈래 내에서 이루어지는 확장형 시조의 한 형태로, 일찍이 윤금초 시인은 ‘옴니버스 시조’라는 명칭으로 “평시조·사설시조·엇시조 등을 혼합하는 연시조의 형태”를 시도한 바 있다. 이는 서사학에서 말하는 옴니버스(omnibus)식, 피카레스크(picaresque)식 구성 중에서 하나의 명칭을 가져온 것이다. 한편으로, 평시조 형의 한계를 돌파하고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열린 시조(open sijo)’, ‘복합(multi-modal)시조’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열린(open)’이라는 단어는 개념적 범위가 불명확하고 개념 규정 그 자체를 거부한다. 이에 비하여 ‘복합 (양식) 시조’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시조의 다양한 표현 양식과 함께 다매체 환경에서의 시조 쓰기까지도 수용 범위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시조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현대 물리학 이론에서 “부분이 전체를 내포할 수 있다”는 말은, 부분계가 전체계의 모든 물리 정보를 완전히 담을 수 있다는 정보, 관계, 구조 중심의 실재관을 뜻한다. 이는 공간적 크기나 부피와 무관한 것으로, 그 경계면에 전체의 의미가 암호화되어 저장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홀로그래픽 원리(Holographic Principle)에서 2차원 필름 하나에 3차원 입체 영상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거나, 필름의 일부만 봐도 전체 이미지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시조가 자유시를 내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유시가 시조를 내포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서, 두 갈래가 상호 내포적으로 상응한다면 모두 가능하다고 본다. 시조의 열린 부분에 자유시의 확장형을 저장/기술할 수 있고, 자유시의 일부에 시조의 전체상을 저장/기술할 수 있다.

 다음의 「레드문-혼성」은 필자가 발표한(본인 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죄송한 일이나), 연작 시조「그믐 빛으로 널 부르면」에 포함된 12편 중의 하나이다.

 시조이므로 세 수로 볼 수 있고, 자유시로 읽었을 때 연 구분을 하면 3연이다. 전체 연작 12편 중에서 「레드문-혼성」은 1편으로 부분에 해당하고, 여기서 각 수는 부분 중의 부분이다. 각 수는 독립적인 개별 단위로서 전체 주제를 달빛 문양처럼 비추어낸다. 전체 스토리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그의 부음이 나에게 전해진 것은 2023년 1월 중순의 어느 날이다. 그는 여자의 삼일장을 치른 후에 하루 더 세상일을 했고, 그다음 날 여자를 따라갔다. 일주일 사이에 처음과 끝이 있었다.” 서술의 형식은, 죽은 여자와 이를 애통히 여겨 따라 죽은 남자와의 대화적 관계가 중심에 놓이고, 여기에 현실계의 내레이터가 끼어드는 구조이다.

 

   중세의 쇠창살을 내려보는 달빛에는

   계시하듯, 마음의 비수가 꽂혀 있다, 기울어진 각도로 쏘는 백랍의 빛 아래 엎드린 그의 등이 조금씩 물들어간다,

현존은 둥글고 차갑다, 달빛의 길이다

 

   점차 날 어두워져 그믐으로 들어서네

   ㅡ 어둑해진 낯빛으로 날 오라 부르네, 그 밤 깊숙한 곳 찾아서 따라가면 폐환으로 뭉쳐진 붉은 달이 떠오르네, 그 달빛 내가 만들어 끌고 가는 무릎이네

   한 사람 지나간 길에 안 보이는 사랑 있네,

 

   일생에 한 번뿐인 조우의 순간에

   폐환의 환부는 깊숙이 관통당했다,

   뒤에서 그를 읽다가 혼자 울컥 붉어진다.

- 염창권, 「레드문-혼성」 전문

 

 첫째 수는 중장이 길어진 사설시조이며 내레이터의 목소리이다. 둘째 수는 중장이 길어진 사설시조에서, 길어진 중장이 다시 독립적인 사설시조이며 남자의 목소리이다. 셋째 수는 평시조로 이 글을 평탄하게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의 목소리는 저승으로 자기를 따라오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목소리이다.

 서양의 소네트에서 분노나 격정적인 감정 분출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운이 없는 무운시(無韻詩)를 삽입하였다. 사람이 죽고 사는 긴박한 순간에 어떻게 평탄한 율조의 평시조형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시조에서도 정서적 평탄의 정도에 따라 4음보는 2+2의 동적 리듬이나 1+3 혹은 3+1과 같이 변주될 수 있다. 이때 1+3 의 음보 구성은, 불협화음과 같이 율격적 긴장이 수반되는 구성이다. 특히, “3음보는 한 호흡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대 음보 단위”(성기옥)로, 호흡의 확장에 따라 정서적 효과를 드러내는 음보로 활용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ㅡ 어둑해진 낯빛으로 날 오라 부르네,

   그 밤 깊숙한 곳 찾아서 따라가면 폐환으로 뭉쳐진 붉은 달이 떠오르네,

   그 달빛 내가 만들어 끌고 가는 무릎이네

- 염창권, 「레드문 b」 전문

 

 부분 중의 일부이지만, 그 자체로 전체성을 갖추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때의 부분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지만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전체의 다른 부분들과의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서로 공명을 이루는 실체로 작동한다. 이승과 저승, 그리고 우리 몸과 우주가 일체로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 속에, 나의 현존과 슬픔이 진동한다. 그리고 그 진동음은 이 글을 쓴 이후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 몸, 기억에 내재 된 상태로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시조의 외연 확장 

 

 알게 모르게 위와 같은 ‘복합(양식)시조’들은 청구영언 등의 가집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지만, 마땅한 해석적 논리를 껴입지 못한 결과로 시조의 흐름 중 하나로 흡수되지 못하였다. 즉 논리적 해석이 뒷받침되지 못하니 주류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협소해진 평시조 한 형태만으로 시조 창작의 세계를 한정 지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하이쿠의 대타적(對他的) 자리에 시조를 놓고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더욱 왜곡된다(1920년대에는 일본어 번역본으로 문학 이론을 공부했다). 가부키와 우리 연희가 다르고, 일본 전통 회화와 한국화가 다르며, 일본 스모와 한국 씨름이 다르듯이 하이쿠와 시조도 다르다. 또한 여기에 착근된 기질적 환경적 기반 또한 다르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그 다름이 바로 해당 문화의 원형적 자질이다. 하이쿠의 장점이나 한계를 알고 응용하기는 하되, 그 형식까지 모방할 까닭이나 가치는 없다고 본다. 일본 전통 회화는 유럽인들의 이국적 호사 취미와 디자인 등에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화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화가 일본식 채색화를 추종하고 본받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과 유사하다. 자기 것에 대한 평가 기준이 확고하지 않으면, 흔들리게 되고 문화적 열등감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오늘의 시대에 하이쿠 형식이 갖는 한계점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는 답을 생략하고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고마운 독자분들께 질문을 던진다.

 고시가에서는 신분제의 굴레 속에 절구나 율시와 같은 정형시의 창작이 우선이었고, 또 이를 통해 식자층이나 사대부 계층이 과거시험과 같은 문화 재생산, 신분 재생산의 기제로 사용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시조는 어느 정도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의 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허용치가 큰 표현의 형식이었다. 시조의 꽃이 기녀의 시조에서 만개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인데, 이들의 시 정신은 신분제를 넘어선 자유정신, 즉 자아의 각성에 따른 자유로운 감성을 박자 수에 맞추어 노래한 것으로, 엄격한 음절/글자 수와 같은 제한이 없었다. 그것은 시조가 갖는 허용치 자체가 한시(漢詩) 배경의 신분제 질서에 반하는 것임을 내포한다. 즉 시조의 형식 자체가 봉건적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근대 의식의 맹아가 기녀들의 시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살펴본,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는 현존의 한때보다는 죽음 이후의 사설이 대부분(80%)을 차지한다. 어떻게 보면 술 먹고 흥청망청(권주가라기보다는 그런 상태를 합리화)하는 현존, 그리고 그에 대비된 것으로 현존의 덧없음과 죽음 뒤의 소외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래이다. 이를 사설시조의 이름으로 수용하려면, 형식 규범이 따로 필요할 정도로 특수성을 갖는다. 『청구영언』에서 「장진주사」와 「맹상군가」의 두 편은 ‘만횡청류’ 앞부분에 별도의 장을 두어 소개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복합 (양식) 시조’의 형식은, 우리 시조의 역사적 전통에 내재하는 것으로 시조의 정형률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창작, 평가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창작의 실천을 통해, 자유시를 내포하는 시조 양식으로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늘을 성의껏 사는 일은 내일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저 너머를 모르니, 나를 둘러싼 한계 상황 내에서 몸부림하며 내일을 기약한다. 다시 시조로 돌아가면, ‘협회’와 ‘회의’의 메일에는 며칠이 멀다 하고 수상 소식이 들려온다. 연말이면 더 심해진다. 이러한 상황을 문학상 운영자와 수상 후보자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문학상 운영자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지자체의 예산 끌어내기, 후원자 모집, 회원 갹출, 사재 출연 등을 통하여 운영비와 수상자에게 전달할 상금을 마련한다. 이러한 수고가 실로 지난한 과정임은 불문가지이다. 이와 같은 문학상 운영이 시조단의 명맥 유지와 활력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필자는 별다른 단서를 허용치 않는다.

 다음으로 수상 후보자들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내포독자가 시조 창작자들에게 맞추어져 있으므로 이 부분이 핵심이다. 수상자에게는 그동안의 성과에 대한 인정과 함께 자신의 문학적 삶에 대한 가치 부여가 이루어지는 충만한 경험의 장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칭찬받는 사람보다 선에 들지 못하여 실망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흔히 문학상 시행 후에는 구설이 따른다. 한 명만 기쁘고 나머지는 좌절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작품의 가치 평가 면에서 자기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기 쉽다. 심사위원은 그 작가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고 평가하지 않는다. 짧은 시간에 상황 논리에 따르고 분위기에 편승하여 수상작을 고른다.

 시조 문학상이 넘치다 보니 아예 처음부터 상을 받으려 시조를 쓰는 것인지, 시조 예술을 목표로 시조를 쓰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우선 수상이 전적인 목표가 되는 경우, 전업 작가의 경우에는 생계에 보탬이 될 것이니 형편을 참작할 만한 일이 될 것이나, 단순히 남들보다 월등하다는 명예욕과 두둑해진 가욋돈을 생각한다면 그리 달갑지 못한 풍경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문학상의 표준화 논리에 대응하여 시조 예술을 어떻게 밀고 나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필자가 동원한 방식은 다음 두 가지다. 아예 문학상 자체에 관심을 꺼버린 채 정신승리법을 쓰거나, 아방가르드적인 형태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먼저 하나의 방법으로, 정신승리법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이성복 시인의 다음 언급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시는 상을 받는다고 더 좋아지지 않고, 상을 못 받는다고 덜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내 시는 내 시 그대로일 뿐이다. 시의 가치는 심사위원이나 제도의 판단이 아니라, 그 시가 담고 있는 고통, 진실, 삶의 깊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문학상은 외부가 부여하는 평가일 뿐, 시는 그보다 훨씬 더 내적인 체험, 실존, 감각, 윤리적 울림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이 조언에 따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다. 나의 시는 “고통, 진실, 삶의 깊이”에서 기원하는 “울림”을 가지고 있는가, 필자가 스스로에게 되물을 때, 뭔가 미진하고 뒤끝이 후련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남들이 내 시에 감동하지 않는다 해서 내가 기분 상할 수는 없는 일이며, 남들이 나보다 시를 더 잘 쓴다 해서 그들을 원망할 수 없는 일이다.(이성복)” 정신승리법을 쓰더라도 자기 성찰이 우선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필자)는 진정으로 시조 예술에 내 삶을 걸고 대면한 적이 없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독자의 반응이나 보상 심리 같은 것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나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었으며, 상을 받는 일에 욕심을 부릴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이건 필자의 진심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방법은, 현실의 저 너머를 탐구하는 것이다. 문학상은 분명 문단의 패러다임이나 분위기에 크게 좌우된다. 아무리 엄정한 심사라 할지라도 평가 기준은 동시대의 암묵적인 미학적 기준을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야 소통 대상자들로부터 쉽게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상을 좇는 사람들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테두리로서 한계가 보이고, 그 너머의 상상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일단 수상작에는 문학상의 권위가 덧씌워지면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이 장점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써야 좋은 시조인가?’ 하면서 은근히 그와 같은 분위기를 모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상작이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대표작으로 내심 기대했던 작품은 외면받았고, 비교적 평범한 작품이 선정되었다. 완벽한 예술 작품이 없는 것처럼, 수상작에도 빈 곳이 없을 수 없고, 또 많다. 이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작품으로써 성공하기 어렵다. 즉 비평적 안목이 작품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 그 너머를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상작에도 한계가 분명한데, 그 상상력의 한계 내에서 모색한다 한들 더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 동시대의 암묵적 평가 기준도 제약적일 수밖에 없고, 후대에서 부정될 것이 뻔하다.

 시조 예술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자기실현에 있지 않을까. 자기가 자신에게 주는 상이 크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대가나 대문호는 문학상 저 너머에서 글을 쓰다가, 또 칭찬받거나 언급되는 걸 원하지 않더라도, 그가 구축한 세계는 누군가의 눈에 띄게 마련이고 빛을 발할 날이 도래한다. 그런 다음에야 글쓰기의 열반에 이를 것이며, 그들 중에서도 만의 한둘 정도나 불멸에 이를 것이고, 나머지는(수상작을 포함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 후기: 지금까지 열두 번에 걸쳐서 시조 담론의 장에 참여하였다. 이들 글을 묶은 평론집을 계획하고 있는데, 예정된 제목은 『감응의 형식과 표현』이다. 시조라는 갈래의 글을 쓰고자 할 때, ‘시조’는 감응의 형식이 된다. 필자는 감응의 경계 형식을 확장하고, 또 민감도와 구체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미학적 관점과 방법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먼저, 문인수 시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전개한 ‘갈래의 경계 넘기’는 필자의 고유한 창안에 따른 것이다. 동시조에서 ‘목소리의 주체’를 살피는 일은 아동문학 작가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측면이다. 사설시조에서 익명적 주체와 개인적 주체를 구별하는 것은 삶의 양상과 밀접한 관련하에 파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슬픔의 표현과 관련하여 전유(專有, appropriation) 의 위험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인 면들을 검토하였다. 시조의 제재로서 ‘민속’의 수용과 관련해서는, 그 제약적인 측면과 가능성의 측면을 함께 살폈다. 여기까지는 필자가 학계에 제출한 논문의 내용을 밑그림으로 하여, 평론 형식으로 재구조화시킨 글들이다.

 10월부터 12월까지 진행한 세 차례의 평론은, 현장 비평의 글로 젊은 시조 시인들의 시를 이해하고,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시조의 미래를 애써 열어가고자 하는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글들이다.

 웹진 발표의 편의성에 기대어 글이 길어지거나 장황해진 점은 모두 필자가 미숙한 탓이다. 여기에 수록된 글의 내용은 모범 답안이 될 수 없다. 필자는 단지 개인적인 소견과 함께 이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ㅡ 그동안 “염창권의 [시위에 건 시조]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ㅡ

 

 

 

 

 

 

 

 


 

염창권.jpg

염창권  l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 등이 있음. 

 

 

 

—

2025년 12월호(VOL.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