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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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송희 

 

이달의시인_이송희.png

 

 

  [이달의 시인] 이송희

  신작시: 빈 컵의 온기 / 출석부 / 시그널

  자선시: 보수동 책방골목 / 흰 종이

  [시인론] 하린 “시조로 구현한 상처의 현상학”

 

 

 

 

 

 


 신작시 


 

 

 

 빈 컵의 온기

 

 

   

 

 

  조용히 컵을 든다

  혼잣말 삼키는 아침

 

  컵을 비울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

 

  입술이 닿은 자리에

  부푸는 말을 섞는다

 

  깊숙이 숨긴 속내 들키지 않기를

 

  그을린 벽의 울음을 말끔히 지우려

 

  넘치면 흘러내리고,

  닫힌 입 들썩인다

 

  지우려 해도 남아 있는 모호한 생의 지문

 

  별 지는 하늘 보며 작은 숨 흩어질 때

 

  우리는 침묵 속에서

  조금씩 식어간다

 

  무엇을 채운다는 건 비울 것을 아는 일

 

  컵을 놓고 일어선다,

  나를 훌훌 털어낸다

 

  바람이 홍시 같은 저녁을

  절반쯤 남겨둔다

 

 

 

 

 

 

 

 

 

 

 



 

 

 출석부

     

 

 

 

   

  이름을 부른다, 시든 나뭇가지처럼

 

  창가에서 두 번째,

  비어 있는 그 자리

 

  아무런 질문도 없이,

  첫 시간은 끝났다

 

  아이의 옆자리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빈 벽에 깊게 남아 있는,

  오래된 얼룩처럼

 

  그림자가 실금 사이로 스며든 흙벽 위에

 

  하루치 공백을 한 줄씩 긋는다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

  남겨진 한 줄을

 

  나는 다시 그 이름을 속으로 부른다

 

  아침 햇살에 미소 짓듯

  대답이 올 것처럼

 

  말없이 거기 앉아서

  손을 번쩍 들 것처럼

 

 

 

 

 

 

 

 

 

   

 



 

 

 시그널 

 

 

 

 

 

  창밖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신에게

  반쯤 식은 커피를 말 대신 내민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내고 싶어한다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하는 메시지에

 

  그날처럼 대꾸도 없이 닫거나 꺼버린 창

 

  손끝이 떨리는 듯했으나,

  그는 애써 감췄다

 

  탁자 위 나란히 핸드폰을 놓았지만

  진동은 한 번도 울리지 않는다

 

  호흡과 호흡 사이에 무언가 숨어 있다

 

  우리는 울음도 없이 조용히 흘러 다닌다

 

  바닥 긁는 소리가 잠든 시간을 깨울 무렵

 

  어긋난 순간 속에서,

  표정은 희미해졌다

 

  

 

 

 

 

 

 

 

 

 


 자선시 


 

 

 

 보수동 책방골목

 

 

 

 

 

  나는 다시 어두운 행간을 서성이네

  걷다가 놓쳐버린 지난 세기의 구절들

 

  불안을 뒤적이면서

  손끝으로 길을 읽네

 

  그 어떤 수식도 없이 간결했던 우리의 말

  날을 세운 문장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먼지 낀 갈피 속에는 숨 죽은 목소리

 

  골목 끝 마지막 장에 내간체로 살던 그가

  빛바랜 문단 사이로 비틀비틀 걸어오네

  그 시절 추운 언어를 부둥켜안고 우네

 

  깨진 창문 안에는 몰래 읽던 역사책들

  불온한 시대의 페이지를 접고 쓰네

 

  서로가 참고문헌이 되어

  길의 목록을 만드네

 

 

 

 

 

 

 

 

 

 

 


 

 

 

 흰 종이

  

     

      

 

 

  얼굴이 구겨진 뒤로 깊은 자국이 남았다

 

  전에 본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나요?

 

  진하게 떠오르는 글을

  나는 금세 읽었다

 

  몇 번째 같은 장소에 마주 앉은 당신과

  무엇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인사말

 

  우리는 입을 잠근 채

  눈길을 피했다

 

  대화창에 떠 있는, 다 식은 아메리카노

 

  돌이키고 싶지 않은 쓰디쓴 문장을

 

  눈처럼 덮어가다가

  남몰래 꺼내본다

 

  연이어 떨어져 나간 몬스테라 잎처럼

  더 이상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는 말들

 

  생각을 털어내면서

  다시 길을 접는다

 

 

 

 

 

 

 

 

 

 

이송희  l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저서 『​​​​​​​눈물로 읽는 사서함』 『​​​​​​​현대시와 인지시학』 등이 있음.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등 수상.

 

 

 

 

 

 

   


 시인론 / 하린  


  

 

 

 

 

 

시조로 구현한 상처의 현상학

― 이송희의 근작과 신작을 중심으로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송희 시인의 시력은 22년이 넘는다. 그동안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를 발간하고,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한 이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흔들림 없이 탄탄하게 중견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온 셈이다.

  이렇게 시조단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견 시인의 작품론을 쓰는 일은 시를 창작하고 시 창작 방법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조심스럽다. 장르가 다른 특성 때문에 미학적으로 시조를 분석하는 데 놓치는 부분이 있진 않을까 염려스러운데 다행히 이송희의 시조는 자유시처럼 매끄럽게, 막힘없이 읽힌다.

심장 깊숙이 음각된 상처는 죽는 순간까지 울음과 목소리를 지닌다. 그 울음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은 문학인의 숙명인데, 이송희는 그 숙명에 따라 상처의 힘으로 끊임없이 감각하고 발화하는 작법을 펼쳐 보인다. 상처는 시인의 창작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은 고유한 형상을 구축해 마침내 이송희만의 ‘아우라’를 탄생시켰다.

  이 글은 이송희의 신작과 근작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상처가 어떻게 형상화되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따른 의미를 도출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1. 상처의 발원  

 

상처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외상과 내상을 남기느냐에 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죽을 때까지 영향을 미치거나, 타인을 대하는 말과 행동 속에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송희가 포착한 상처는 인간뿐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입은 상처까지 아우르며, 개인적 상처를 넘어 사회적 상처에 이르기까지 포괄한다. “구겨진 뒤로 깊은 자국이 남”(「흰 종이」)은 흰 종이, “날을 세운 문장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 먼지 낀 갈피 속”에서 “숨 죽은 목소리”(「보수동 책방골목」)만 품고 있는 헌책들, “시든 나뭇가지처럼”, “빈 벽에 깊게 남아 있는, / 오래된 얼룩처럼”(「출석부」) 출석부에 남겨진 이름들, “뭉개진 얼굴 앞에 널브러진 교과서”(「진실 게임」, 《서정과현실》, 2024년 하반기호)들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송희가 감지한 상처는 유독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때문에 발생한 상처가 많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 언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상처와 관련해서 빈도 높게 모티브로 활용한 경우는 흔치 않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폭력적인 언어로 인해 실제로 깊은 상처를 입고, 그것이 갈등의 시작이자 끝이 되기도 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언어는 “서로 다른 표정으로 자리를 바꾸는”(「투명한 관계」, 《문학광장》 2024년 8월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때론 위로나 치유가 되기도 하지만 날카로운 흉기나 괴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 말에 대해 이송희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그 양상을 특별하게 감지하는 힘을 발휘한다.

 

   창밖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신에게

   반쯤 식은 커피를 말 대신 내민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내고 싶어한다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하는 메시지에

 

   그날처럼 대꾸도 없이 닫거나 꺼버린 창

 

   손끝이 떨리는 듯했으나,

   그는 애써 감췄다

 

   탁자 위 나란히 핸드폰을 놓았지만

   진동은 한 번도 울리지 않는다

 

   호흡과 호흡 사이에 무언가 숨어 있다

 

   우리는 울음도 없이 조용히 흘러 다닌다

 

   바닥 긁는 소리가 잠든 시간을 깨울 무렵

 

   어긋난 순간 속에서,

   표정은 희미해졌다

―「시그널」 전문

 

  「시그널」에 등장하는 화자와 ‘그’는 대화와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 처해 있다. ‘무엇인가를’ 서로에게 ‘보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쉽게 말로 표현하지 못한 채 “반쯤 식은 커피를 말 대신” 내미는 형태로 메시지를 겨우 전달한다. 그러나 근원이 되었던 “그날처럼” “대꾸도 없이” 닫혀버리는 상황, “손끝이 떨리는 듯했으나” 애써 포착한 것을 감춰버리는 심리는 무엇일까? 이송희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심리나 표면적인 관계의 양상을 넘어서, 미묘하고 복합적인 심리와 관계의 결을 포착한다. 헤어질 수도, 그렇다고 가까워질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를 지속시키며, 그 무미건조한 정서의 흐름을 담담히 그려낸다. “호흡과 호흡 사이에 무언가 숨어 있”지만, 그것은 “울음도 없이 조용히 흘러” 다닐 뿐이다. 이처럼 이송희는 화자와 ‘그’의 내면을 통해 현대인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의 불확실성과 단절감을 암시한다.

“어긋난 순간 속에서, / 표정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결국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상처의 근원인 암묵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더 깊은 상처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의 메시지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하면서도, 끝내 진실한 소통에 이르지 못해 생겨나는 상처. 이 작품은 그러한 상처의 본질을, 음성언어의 한 형태인 ‘암묵’을 통해 정교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2. 상처의 문양  

 

상처 중에서도 내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대부분 외부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상처의 경우 “입을 잠근 채/ 눈길을 피”(「흰 종이」)할 수밖에 없기에, 겉으로는 참고 견디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주로 상징이나 암시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는 “눈을 가리고 / 입을 틀어막는”(「길 위의 지문」, 《문예연구》, 2024년 겨울호) 안개와 마주한 상황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매일 밤 꿈속에서” “소금기 하나 없이 찢어진 울음소리”(「미리보기」, 《정형시학》, 2024년 겨울호)를 내거나, “그날을 기억”하는 “입술 잃은 붉은 혀”(「과거의 오늘」, 《월간 에세이》, 2025년 1~2월호)를 품는 식으로 표출된다.

  이송희는 상처와 투명하게 조응하기에, 그것을을 쉽게 언어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를 품고(안고) 오랫동안 함께 아파하며, 상처의 목소리에 귀 귀울여 그것을 받아 적는다. 그렇기에 이송희의 시어는 진정성을 띠며, 감응적 차원의 암시적 표현으로 상처를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이름을 부른다, 시든 나뭇가지처럼

 

   창가에서 두 번째,

   비어 있는 그 자리

 

   아무런 질문도 없이,

   첫 시간은 끝났다

 

   아이의 옆자리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빈 벽에 깊게 남아 있는,

   오래된 얼룩처럼

 

   그림자가 실금 사이로 스며든 흙벽 위에

 

   하루치 공백을 한 줄씩 긋는다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

   남겨진 한 줄을

 

   나는 다시 그 이름을 속으로 부른다

 

   아침 햇살에 미소 짓듯

   대답이 올 것처럼

 

   말없이 거기 앉아서

   손을 번쩍 들 것처럼

―「출석부」 전문

 

  「출석부」는 상처를 품은 아이의 부재를, 남겨진 자 중 한 사람인 화자의 시선을 통해 내밀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 시조에서 이송희는 상징과 암시뿐만 아니라 비유 기법을 집중적으로 활용하여 상처가 남긴 정서적 흔적과 그 양상을 섬세하게 제시한다.

  “시든 나뭇가지처럼” 부르는 이름, “빈 벽에 깊게 남아 있는, / 오래된 얼룩처럼” 가슴에 맺힌 아이들의 슬픔에 대한 침묵, “아침 햇살에 미소 짓듯 / 대답이 올 것처럼” “말없이 거기 앉아서 / 손을 번쩍 들 것처럼” 속으로만 품게 되는 희망을, 이송희는 직유법을 활용하여 생생하게 헌시한다. 직접적인 진술 대신 비유적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받치는 슬픔을 더욱 진하게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송희는 인용한 작품처럼 성장통에 접어든 존재의 상처와 트라우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작에 임해 왔다. 특히 학교 상황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 (「진실 게임」, 《서정과현실》, 2024년 하반기호)에서는,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강압적 분위기를 진중하게 형상화한다. “어떤 것도 어떤 말도 /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해야 하는 교실에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건 “버려진 말을 모아서 / 말풍선을 띄”우는 일 뿐이다.

  이 작품에선 말풍선이 상징적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말풍선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소리로 발화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말풍선을, 거대한 폭력이나 강압 앞에서 지혜롭게 연대하는 학생들의 의식으로 치환해도 무방할 것이다. 앞으로 학생들은 더 이상 무기력한 존재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침묵은 질문이면서 적당히 답이”(「온도 차이」, 《문학광장》 2024년 8월호) 되기도 하고, “말이 되고 발이 되어 가”(「어떤 임종」, 제20회 오늘의시조문학상 수상작)기에, 말풍선은 언젠가 터져 나오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상처의 민낯과 저항의 의지로 뿌리내릴 것이다.

    

  3. 상처에 대응하는 이송희만의 방식  

 

  상처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다. 분노, 서러움, 불안, 공포 같은 감정이 밀착해 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작가라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송희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정신을 밀착하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시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상처의 원인과 양상을 내밀하게 그려낸 후 변증법적인 사유를 통해 상처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요소로 전환하거나 상생적 방향으로 활용한다. 이는 상처를 외면한 단순한 회피나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다. 상처를 기꺼이 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조금씩 식어간다

 

   무엇을 채운다는 건 비울 것을 아는 일

 

   컵을 놓고 일어선다,

   나를 훌훌 털어낸다

 

   바람이 홍시 같은 저녁을

   절반쯤 남겨둔다

―「빈 컵의 온기」 부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쓰디쓴 문장을

 

   눈처럼 덮어가다가

   남몰래 꺼내본다

―「흰 종이」 부분

 

  「빈 컵의 온기」에 등장하는 화자는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컵을 비울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심리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깊숙이 숨긴”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혼잣말’을 “삼키는 아침”을 반복한다. 그런 침묵의 날들이 반복되면서 서로에 대한 향한 ‘관심 지수’는 점점 낮아지고, 다정다감에 온도 역시 “조금씩 식어” 간다.

  이럴 때 화자의 선택은 두 가지다. “지우려 해도 남아 있는 모호한 생의 지문” 같은 감정을 안고 계속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것인지……. “무엇을 채운다는 건 비울 것을 아는 일”이기에 작품 속 화자가 택한 방법은 후자다. 그는 과감히 온기가 식은 “컵을 놓고 일어선다, / 나를 훌훌 털어낸다”. 그런데 이것은 극단적인 이별 선언이 아니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단순히 새로운 것을 채우려는 사유도 아니다. “바람이 홍시 같은 저녁을 / 절반쯤 남겨둔다”라는 문구를 통해, 타자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태도를 암시한다. 이는 상처를 수용하면서도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태도로, “서로가 참고문헌이 되어 / 길의 목록을 만드”(「보수동 책방 골목」)는 변증법적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이송희의 작품에서 ‘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품는다. 이는 상처의 원인과 양상, 그리고 극복 방식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흰 종이」의 후반부에서는 이한 ‘길’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쓰디쓴 문장을 // 눈처럼 덮어가다가 / 남몰래 꺼내” 보는 행위가 그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겉으로는 덮으려 하면서도 동시에 몰래 꺼내보는 태도는 상처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솔직하게 응시하고 보듬어 치유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엄마의 길」(《문학광장》 2024년 8월호)의 “당신을 속에 품은 난, / 누군가의 길이 돼요”라는 구절돠도 맞닿아 있다. 상처받은 과거를 품은 화자가 누군가의 길이 되려는 태도는 “지문이 사라진 길에 / 스르르 떠오르는 빛”(「슬픈 부조」, 《시조정신》, 2025년 상반기호)을 마주하려는 이송희만의 깊고 넓은 상처 치유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송희 시인은 앞으로도 상처의 현상학적 측면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의 작품을 창작할 것이다. 상처의 근원과 본질성을 탐구하려는 시 정신을 바탕으로 상처를 껴안은 채 다양한 양상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여기서 ‘길’은 고정된 ‘길’이 아니라, 시조의 정형성 및 함축성과 더불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다층적인 경로를 의미한다. 때로는 상처 속에 낭만성, 사실성, 환상성, 미래성, 실험성, 영원성, 불변성 등의 요소가 어우러지며, 역설적 사유와 비유적 사유, 초월적 사유가 배경이자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 ‘길’은 이송희만의 독창적인 작품성을 규정하고 돋보이게 하는 개성적인 코드이자 감각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달의시인_시인론.png

하린  l 

1998년 《광주매일일보》 신춘문예 시,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 당선.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기분의 탄생』,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창작 이론서 『시클』, 저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시조를 쓸 수 있다』, 평론집 『담화 구조적 측면에서의 친일시 연구』가 있음. 〈청마문학상 신인상〉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한유성문학상〉 수상. 현재 시 전문 인터넷 신문사 《미디어 시in》 대표 ·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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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호(VOL.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