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우대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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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인] 우대식
신작시: 탈출 / 시를 떠나다 / 성탄제
자선시: 거림골에 들다 / 탁(託), 제이월당기(第二月堂記)
[시인론] 유종인 “영원히 가을인 자의 노마드(nomad)”
신작시
탈출
후미진 시장 골목에서 새장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그 안에 가짜 집과 놀이터도 있는,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물통이라고 생각했다. 밥은 한 끼 안 먹어도 되지만 물을 마실 수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당신은 사주팔자에 물이 없어. 그러니 물 가까운 곳에 살든가 물 수(水) 자가 들어간 곳에 살도록 해. 오래전 이 말을 듣고 스님이 할 일이 없나 보다 생각하고 “예”하고 대답했다. 그날부터 그 말은 점점 나를 옥죄었다. 물이라는 문자의 감옥에 살게 되었다. 집사람의 팔자에는 물이 들어 있나. 수원(水原) 정도면 살아도 될까. 새장에 물통을 서너 군데나 달아주었다. 며칠 후 새장의 살이 하나 부러지고 새의 부리와 목이 고개를 꺄우뚱하며 허공에 머리를 내놓았다가 이내 새장 안으로 머리를 거두었다. 새는 물통을 오래 들여다보다 몇 모금 들이키고 새장에 앉아 있다. 그날부터 새가 날아가기를 기다렸다.
시를 떠나다
육십이 넘으면서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약과 처방을 받았지만 약간의 돈만 썼을 뿐이다
방 안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자를 초대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몇 권 남은 시집의 해설을 찢는다
머리를 번쩍 들어 눈 쌓인 항아리 위에 올려놓는다
항아리 뚜껑이 된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이 지경이 시가 될 수 있나
부처가 될 수 있나 설산 눈표범의 허기가 될 수 있나
어디 영원한 것이 있나요
방 안의 상자를 다시 배치한다
조금 다른가요
별이라는 사물이 있다는 거짓말 때문에
눈먼 한생을 살았다
더듬거리며 당신의 젖가슴을 만진다
부처인가요
나는 아프다 그렇게 진술해야 한다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상자 안에서 못된 개들이 짖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성탄제
일력(日曆)을 찢어 넘기다가 만난
대설(大雪)
그 밤,
나는 지치지 않고 싸웠던 것이다
남자와 싸우고
여자와 싸우고
윤리와 싸우다가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썼다
최초의 싸움
나를 만나는,
밤새 헛손질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희고 둥그런 날들을 기억하는가
절간 방문을 치던 눈발에
모든 하얀,
새벽녘 오르던 고원
대설행(大雪行)은
당신과 나의 마지막 꿈이었다
자선시
거림골에 들다
거림에 들어 아침을 먹었다
먼 데서 온 손님들은 바짓단을 양말에 말아 넣고 길을 나섰다
된장에 무친 머위와 간장을 얹은 꼬막 그리고 졸인 청계알과 감자 몇 알
흰쌀밥을 찬 계곡물에 말아 먹으면
찬란했던 봄날의 꽃잎들이 밥그릇에 떴다
어리석은 사람이 나무 의자에 앉아 젓가락질을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했다 빌며 밥을 먹는다
물통을 지고 산을 오르는 산꾼들은 손을 위 아래로 저으며
어여 많이 먹으라 한다
세석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에 낯을 씻고 오래 들여보면
물속에서 안개와 연기가 피어올라
사람들의 흔적이 희미해진다
고맙다
오던 모든 길이 끊어지고
온통 돌과 물인 세상에서 의지가지 없는 한 사람
모다 큰 것들이 내려다보며
불쌍하다고 다독일 때
매일매일 밥만 짓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느리고 찬찬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린 낯바닥을 물로 씻어주던 거친 할머니의 손처럼
아무 새로울 것도 없지만 늘 있었던
안동의 누진 사투리로
“어떤노 니 요즘 어떤노”
안부를 물을 때 거림의 모든 꽃들이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
탁(託), 제이월당기(第二月堂記)
4월은 온통 바람, 당신에게 바람의 편지를 보냅니다. 옛사람들은 방을 들이거나 움막을 지어도 기(記)를 썼습니다. 글 잘하는 벗에게 비를 맞고 총총히 달려가 집의 내력을 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기(記)를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즈음, 저는 제이월당(第二月堂)이라는 한 칸 반짜리 누각을 제 마음의 물가에 드리울 것입니다. 이월(二月)에서 삼월(三月)로 가는 길은 있는지, 동지(冬至)에서 이월(二月)은 얼마나 먼 길인지, 사월(四月)의 황홀함에 대해서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 완강함과 대책 없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길도 알고 싶습니다. 온통 길이라 쓰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갑니다. 목이 움츠러드니 석양 아래 서는 일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길, 누추한 누각마저 부수어야 하는지 간절히 배움을 청합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우대식 l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 등, 저서 『죽은 시인들의 사회』 『시에 죽고 시에 살다』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선생님과 함께 읽는 백석』 『시를 만나다』 『해방기 북한 시문학사』등이 있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강사.
시인론 / 유종인
영원히 가을인 자의 노마드(nomad)
우대식은 기묘하게 유쾌하고 고유하게 쓸쓸하다. 아니 기묘하게 쓸쓸하고 고유하게 유쾌하다. 그에겐 가을이 많다. 물량적으로 많은 게 아니라 총량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오롯한 가을의 오마주(hommage)가 있다. 그는 그런 태생을 가졌거나 후천적인 영향의 선망과 물들임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물론을 들추고 있거나 인상론을 꺼내 들고 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그가 갖은 시운(詩韻)의 내력을 멀리서 고대하고 스쳐본 자의 눈어림에 불과하다. 그의 가을은 여느 소멸과 애상의 일반적인 분위기에 한정할 수 없는 존재의 넋이 현존재의 일상을 지긋이 관찰하는 현실감각과 동시에 탈일상(脫日常)으로 떨쳐 나가는 행려(行旅)의 높낮이와 거리가 있다. 그런 그의 거리는 그의 시 호흡이고 눈길이고 지극한 가슴의 내음이며 쉽게 가닿을 수 없는 것들과 회동(會同)하고자 하는 일종의 호활한 열림 같은 것이다.
시인의 가을은 겨울보다 삭막하고 쓸쓸하지만 때로 봄날보다 안온하고 낙락하다. 큰물이 그친 여름날의 세찬 여울보다 가열찬 전망이 비애마저 휩쓸어 버릴 때도 있어 보인다. 그런 시인에게 가을은 겨울을 앞둔 여름과 겨울의 행간이 아니다. 그것은 좁은 가운데 크게 열리는 가능성의 시공간이며 마음의 궁색(窮塞)이 오히려 돌연하게 트이는 우대식만의 소슬한 뒷배이다. 그런 자에게 아무도 그늘을 주목하지 않는 햇빛 속에 그늘을 가지는 자의 매력은 연민과 슬쓸함의 정조로 여울지듯 흘러왔다. 연민은 인간을 향한 것이라면 쓸쓸함은 인간을 에두르듯 감싸고 있는 모종의 세상 전경을 향한 마음 거울의 기척이다. 거울이 기척을 내려니 본령이 흔들릴 때마다 시인은 그 거울의 떨림을 떼내어 흉곽에 숨기는 존재들이다.
…… 물이라는 문자의 감옥에 살게 되었다. 집사람의 팔자에는 물이 들어 있나. 수원(水原) 정도면 살아도 될까. 새장에 물통을 서너 군데나 달아주었다.
- 「탈출」 부분
어언 시인의 그간의 행려를 헤아리듯 엿보면 왠지 그가 나의 수십 갑절 아니 수백 갑절은 더 떠돌았을 것만 같다. 이 떠돎은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이 한데 어울렸을 것만 같다. 사람의 인위(人爲)와 자연의 흐름을 견주는 것은 그래서 “물이라는 문자의 감옥에 살”면서도 그 물이라는 물성(物性)의 흐름을 떠안듯이 본받는 계절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갖가지 풍치(風致)와 오롯한 풍물들은 문자의 강박을 풀어헤치는 시인의 심안(心眼)이 마련한 것이지 싶다.
시인에게 “물”은 어떤 계기로 때론 얽매임의 “감옥”이자 행운유수(行雲流水)와도 같은 풍류적 존재의 표상이기도 하다. 존재의 현실은 이 둘을 언어적으로 매개하거나 의식적으로 풀어헤쳐 나가는 방편을 궁구하는 양가적인 것의 화해와도 같다. 가두어 애완(愛玩)하는 것과 풀어서 해방하는 것 사이에 “물”은 “물통”에 담길 수도 있고 벌물처럼 넘쳐 흐르는 자유의 행각에 스며들 수도 있다. 시인은 이 둘을 매개 하는 자이자 관조하는 자의 고독에 종사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희고 둥그런 날들을 기억하는가
절간 방문을 치던 눈발에
모든 하얀,
새벽녘 오르던 고원
대설행(大雪行)은
당신과 나의 마지막 꿈이었다
-「성탄제」 부분
보통의 꿈은 현실과 격리된 몽상의 계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시인의 꿈은 고립무원에 가까운 궁벽한 지점, “절간 방문을 치던 눈발”의 소리처럼 손만 내밀면 그 손등이 눈발을 맞을 만한 지척의 꿈, 오히려 이루어지기 위한 간원의 맞선 같은 꿈이다. 그리하여 설산을 헤매는 눈표범의 외로움처럼 본능을 뚫고 존재의 심연을 움직이는 늠연(凜然)하나 서늘한 마음의 결기처럼 도사린다. 다시 한번 우대식의 꿈은 꿈자리의 몽상이 아니라 삶의 도시와 저잣거리에 발걸음을 내는 내면의 실질적인 기척이다. 그러니 그는 모든 곳을 잃고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향해 에두르며 톺아가는 자는 나름의 고고한 쓸쓸함의 행색이다. 그리고 무한에 가깝게 열리는 찰나의 연애는 늘 지연되면서 유구한 “마지막 꿈”으로 오롯해진다.
비트가 살아 있는 거리
온갖 음식 냄새와 향신료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야시장
개 한 마리가 걸어간다
사람과 트럭과 음악 사이에서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천천히 걷다가 나무의자 옆에
두 발을 모으고 앉아 본다
세상은 풍요롭고 나는 헐벗었도다
탁발 나온 스님처럼 왼쪽 어깨에 가사를 풀고
공손히 앉아 시주를 기다린다
턱 아래로 닭고기 한 점이 툭 떨어졌을 때
파라다이스를 향한 비트는 점점 거세진다
기름진 음식을 극구 사양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먼 데
산을 보니 여전히 푸르다
야시장 한켠에 놓인 거울을 본다
푸른 연기 속을 걸어가는
늙은 개 한 마리가 있다
붉은 석양이 강마을에 찾아들 무렵이다
- 우대식, 「자화상」
우대식의 거의 모든 시는 일상과 탈일상을 아우르는 관조와 궁행의 언어적 로드무비에 비견된다. 이 로드무비는 단순한 여행기적 인상의 외피를 그려내는 탈일상의 해소가 아니라 영원의 궁극 같은 것을 조망하는 찰나의 비애를 받자하는 눈길에 의해 빚어지고 태어난다. 그에게는 그래서 비릿하지만 안온하고 쓸쓸하지만 거연한 곁을 함께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무언가는 정형화되지 않은 채 우대식을 따르고 스스로 품어내는 “파라다이스를 향한 비트”처럼 이내 쓸쓸하고 유쾌하게 번져내기에 이른다. 구체화된 시적 에네르기의 물상(物像)은 이내 오래 가지고 다니기 어렵다. 시인의 여정은 물상이 아닌 에네르기의 물류(物流)를 좀 더 가까이 곁에 스치는데 오히려 수월하다. 그래서 “개 한 마리가 걸어간다”라고 했을 때 이 개 한 마리는 너나들이가 일어나는 만유(萬有)의 전초쯤으로 여겨도 좋으리라. 그렇듯 시인의 발길은 시인이 아닌 것들을 향한, 혹은 시인을 예전에 살아냈던 것들을 향한 미답(未踏)의 복기 같은 기운이 자자하다. 일찍이 철학자 들뢰즈( Gilles Louis René Deleuze)가 말했던 노마드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이라는 개념적 확장을 이뤘다. 시인의 거의 모든 언명이 그렇거니와 전방위적인 ‘쓸쓸함’을 시적 기조로 세월을 톺아가는 자에게 있어 삶이란 양떼를 놓치거나 잃은 유목(遊牧)과도 같다. 그렇기에 “세상은 풍요롭고 나는 헐벗었도다”라는 듬쑥한 한탄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계제다.
4월은 온통 바람, 당신에게 바람의 편지를 보냅니다. 옛사람들은 방을 들이거나 움막을 지어도 기(記)를 썼습니다. 글 잘하는 벗에게 비를 맞고 총총히 달려가 집의 내력을 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기(記)를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즈음, 저는 제이월당(第二月堂)이라는 한 칸 반짜리 누각을 제 마음의 물가에 드리울 것입니다. 이월(二月)에서 삼월(三月)로 가는 길은 있는지, 동지(冬至)에서 이월(二月)은 얼마나 먼 길인지, 사월(四月)의 황홀함에 대해서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이 완강함과 대책 없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길도 알고 싶습니다. 온통 길이라 쓰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갑니다. 목이 움츠러드니 석양 아래 서는 일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길, 누추한 누각마저 부수어야 하는지 간절히 배움을 청합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 「탁(託), 제이월당기(第二月堂記)」 전문
그러나 그는 때로 정신의 유목이 어쩌면 정주(停住)를 위한 하나의 소명을 그려내기도 한다. 소요(逍遙)를 위한 혹은 소요를 늘려왔던 시간을 위한 멈춤과 머뭇거림, 그리고 조망과 관조를 위한 휴식은 그에게 공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킨다. 떠돎이 존재의 한 방편인 사람은 머묾이 하나의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비린 슬픔을 구수하니 맘에 구워내며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 합당한 머묾의 기초를 누군가 불러줄 노래를 그리워한다. 때로 나는 생물학적인 그의 나이가 지긋해졌음을 조금은 반겨하는 마음이 든다. 그의 나이듦이 그의 속종 어느 바람 냄새 나는 구석을 눅여 예전에 없던 낙락한 낯빛을 우려낼 것을 바랄 때이다. 그가 겸양으로 청하는 바의 저 “누추한 누각”에 대한 당부는 그만큼의 방황이 더 온전한 방향으로 또아리 틀기를 바라는 “석양 아래 서는 일이 고질”인 시인의 여전한 자성(自省)에 가깝다. 아무 덧없음을 곁에 두고 놀자는 겨를이 그에게는 정월을 물리고 이월의 찬바람에 당기(堂記)를 구하는 시절이 됐으니 내가 아니라도 그에겐 덧없는 지인들이 이제 숙성하듯 갈마들리라.
그가 앉으나 걸으나 떠돌던 계절이 이제 그의 머묾 곁을 수소문해 에돌며 적적하지 말라고 괜히 살가운 지청구를 할 것만 같은 것도 이 시편이 전하는 소슬함과 은성함이다. 이 또한 그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누각과 짝패를 이루는 아우라를 짓는다.
꿈의 냉담자로 살아왔다 그러니 빛과 그림자가 있을 수 없다 가을날의 억새를 볼 때마다 꿈도 이렇다 생각해왔다 꿈은 시린 물갈퀴, 꿈은 늘 차가운 것 불의 사주로 살아온 심장에 서늘한 칼을 찔러 넣는다
꿈은 늘 차가운 것
꺼지지 않는 불을 비웃으며 온몸에 갑옷 같은 비늘을 새긴다 꿈과의 거리, 비닐 한 장에 싸인 주검처럼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만남, 꿈과 한 몸인 육체를 혐오하다가 다시 육체에 도달하면 울음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을이 오면 차가운 육체가 온다
꿈의 노예가 되어 들판을 떠돌 때 어느 먼 고대 도시의 성곽에 머리를 기댄 한 노인네를 만난다 그때도 죽음이었고 지금도 죽음인 서늘한 꿈을 만난다
- 우대식, 「꿈의 냉담자」
그의 꿈은 전인적인 구경(究境)의 현실을 탐색하는 “거리”의 조준경 같은 것이다. 시인의 꿈은 현실과 비현실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선 지점의 존재의 오랜 비원과 동행한다. 그래서 “불의 사주로 살아온 심장에 서늘한 칼을 찔러넣는” 자멸과 재생의 동시적 비행이자 선행(旋行)처럼 세상을 떠도는 노래와도 같다. 비록 “울음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영혼을 스치고 베이더라도 시인은 그 시공간을 또한 꿈이자 꿈 바깥으로 한데 엮는 안돈한 비가(悲歌)를 또 벼려낸다. 우대식이 엮은 시집의 면면이랄 수 있는 그 제목만 놓고 보더라도 나는 그가 떠남과 머묾을 숙명처럼 살아가는 그의 야성(野性)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늙은 의자에 앉아 바라를 바라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은 한마디로 “가을이 오면 차가운 육체가” 오는 그 비애의 낭만성에 빙의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우주적 가을의 떠돌이 색채가 만연하다. 당연 기후로서의 사계절의 징후가 끼치고 사라지지만 또 한켠엔 시인의 따뜻한 갈색의 정서에 섭렵되고 번지는 무상(無常)의 너울이자 처연한 바람이며 찬연한 물빛 같은 흐름이 도사린다.
아이러니하게 시인의 이런 “성곽에 머리를 기댄 한 노인네”의 형형하나 고요한 눈빛에서 보이듯 숱한 만남의 파장들은 실상 꿈의 있고 없음을 하나로 통합해 나가는 진성(眞性)에 귀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허무주의의 허방에 빠지는 겨를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편들은 허무에 빠져 넋두리의 돌림노래가 아니라 숱한 꿈이 겹쳐오고 흩어지는 가운데 알아가는 존재와 세상의 비의(秘意)를 마중물로 불러내는 시인의 쓸쓸한 깨우침의 부상으로 오롯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몇 권 남은 시집의 해설을 찢는다
머리를 번쩍 들어 눈 쌓인 항아리 위에 올려놓는다
항아리 뚜껑이 된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이 지경이 시가 될 수 있나
부처가 될 수 있나 설산 눈표범의 허기가 될 수 있나
어디 영원한 것이 있나요
방 안의 상자를 다시 배치한다
조금 다른가요
별이라는 사물이 있다는 거짓말 때문에
눈먼 한생을 살았다
더듬거리며 당신의 젖가슴을 만진다
부처인가요
나는 아프다 그렇게 진술해야 한다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상자 안에서 못된 개들이 짖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 「시를 떠나다」 부분
그래서 모든 시인들이 다 그렇거나 그렇지 않을 각자의 방편들이 있겠으나 적어도 우대식에게 있어서의 시적 도상(道上/圖像)은 끝없이 알아가는 모름의 형식을 똥기는 것이다. 혹은 광활한 시공간에 대한 무지를 새삼스럽게 알아가는 인생의 내용으로서 겨울 남천나무처럼 수수롭고 결연하다.
이는 마치 불가의 돈오점수(頓悟漸修)와도 같다. 흔히 돈오는 갑작스러운 번개이고 점수는 만연한 구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대식에게 있어서 빈 술병을 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허튼소리이다. 돈오와 점수는 서로 짝패이고 그래서 그걸 매개하는 것은 끝없이 앉아서든 떠돌아서든 헤매이는 몸이 지닌 맘의 겨를이다. 서로 다른 방향을 하고 사는 듯하다가도 돈오와 점수는 그의 몸과 맘 안에서 한순간 오롯이 마주보게 된다. 느림과 빠름이 한 몸이고 깨우침과 무지가 한 맘으로 마주 볼 때, 우대식에게 있어 시가 술을 따른다. 스스로든 누구에게든 따를 수 있으니 그 오랜 행려 끝에 단숨에 깊이 마실 수 있으리라.
더불어 “나는 아프다 그렇게 진술해야 한다 /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라는 언술 속에 존재 내외부를 함께 아우르는 쓸쓸하나 영원히 가을인 시인의 습습한 행려를 보게 된다. 머묾 속에서도 떠남을 알고 떠남 속에서도 구순하게 머물 줄 아는 정리(情理)의 근처를 파릇한 물소리로 새삼 듣게 된다.

유종인 l
1996년 《문예중앙》시, 2002년 《농민신문》 ·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 미술평론 당선. 시조집 『답청』 등,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등, 미술책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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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호(VOL.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