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미나 | ||
|---|---|---|---|
청년
또 시작이다. 삐—하고 직선이 그어지듯 이명이 들렸다. 이명은 불시에 찾아왔다. 오른쪽 귀에서 시작해서 왼쪽 귀로 빠져나오는 붉은 선. 모스 부호를 타전할 때처럼 띄엄띄엄 들릴 때도 있었다. 강 대표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원고에 코를 박고 교정 중인 소율의 뒤통수를 흘깃 보았다.
강의 출판사에서는 주로 자연과 생태, 친환경과 관련한 서적을 출간했다. 직원이 여섯 명뿐인 작은 규모의 출판사였다. 소율이 강의 출판사에 입사한 지도 벌써 삼 개월이 되었으니, 오늘부로 수습 기간을 마친 셈이다. 소율은 무난했다. 무단결근을 한 적도 없었고, 다른 직원들과 별다른 마찰도 없었다.
강은 어깨너머로 소율이 촘촘히 작성한 재교지를 보았다. 소율의 글씨는 가로세로 획의 굵기가 자로 잰 듯 일정했다. 그는 일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빠릿빠릿하게 굴면서 잔꾀를 쓰는 타입도 아니었다. 강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소율이 지나치게 싹싹하게 굴지 않고 우직해 보인다는 점.
강이 외투를 집어 들고 사장실에서 나오자, 소율이 엉거주춤 그를 따라나섰다. 엊그제 강은 점심을 같이하자고 소율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둘은 사무실에서 세 블록 떨어진 한정식 식당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소율이 숭늉을 따른 컵을 강 앞에 놓았다. 강은 제육비빔밥을, 소율은 돌솥비빔밥을 시켰다. 소율은 주문하면서 고기를 빼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강은 그저 대화의 공백을 메울 요량으로 물었다.
“자네, 주말엔 뭐 하고 보냈나?”
소율이 수저와 젓가락을 강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시청 가서 행진했습니다.”
“행진?”
소율은 휴대전화 속 사진을 강에게 보여주었다.
지난 주말, 소율은 기후정의 행진에 참여한 모양이었다. 사진 속에서 소율은 골판지에 〈Extinct Species due to Climate Crisis〉라고 유성 매직으로 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소율의 뒤로는 사람들이 단체로 누워 있었다.
“아니, 왜 다 도로에 누워 있어요?”
“다이인 퍼포먼스’인데요. 기후 위기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표현한 퍼포먼스입니다.”
강은 소율이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치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미쁘게 보였다. 야근 수당은 정확히 계산하면서, 무단결근이나 지각을 자주 하는 여느 직원들과 달리 보였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청년의 순수한 고투랄지, 소율에게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에 강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심취한 적 있었다. 소수의 엘리트 정치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만들어가는 세상을 꿈꿨다. 그는 정치 성향으로 따지자면 신좌파에 가까웠다. 한때 녹색당의 열혈 당원이었고, 지금까지도 매달 정기 후원금을 납부하지만, 탈당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녹색당 후원금은 계좌 이체로 등록하지 않고, 부러 지로 용지로 배송받았다. 강은 그런 식으로 직원들이 자신의 과거를 알아봐 주길 바랐다. 촌스럽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말고, 은근하게. 강은 자신의 인정 욕구가 천박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과시하고 싶었다. 이 청년이 신념의 동지나 되는 것처럼 묻어 가고 싶었다.
강은 청년 시절에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 그 간극을 견딜 수 없어서 괴로웠던 게 아니라, 생명과 자연, 비폭력의 힘을 지지하는 자신의 모습에 심취했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그는 순수한 이성의 힘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것을 아직 신념이라 불러도 좋다면. 이제 그에게 신념은 자신의 정신적 허영을 치장하는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강은 소율에게서 자신이 바랐던, (하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청년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 강은 톳을 한 젓가락 집어 들어 오도독 씹었다.
후식으로 메밀차가 나왔고, 강은 본격적으로 정규직 전환을 제안했다. 소율은 연봉을 5퍼센트 인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의외였다. 강은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이따 퇴근 전까지 결정해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강은 혀로 어금니에 낀 고사리를 빼내려고 애쓰며, 소율이 보기보다 만만치 않은 친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식당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찰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침 강의 휴대전화는 스피커 모드로 연결된 상태였다.
“얼른 가서 추출기 돌려라! 염소 태반 하나, 30포짜리 3박스……!”
부친이었다. 하마터면 강은 후진하다 뒤차 범퍼를 박을 뻔했다. 삐-하고 요란하게 경고음이 울렸다. 강은 재빨리 스피커 모드를 끄고 전화를 받았다. 부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휴대전화 밖으로 샐까 봐, 그는 볼륨 버튼을 눌러 소리를 죽였다. 옆 좌석에 앉은 소율이 통화 내용을 어디까지 짐작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강의 출판사는 늘 적자였다. 교수직에서 퇴임한 생태학자의 에세이가 스테디셀러로 이름을 올린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히트작이 없었다. 주 수입원은 부친이 운영하는 흑염소집이었다. 새끼 밴 염소를 찌면, 값은 두 배에 버금갔다. 불법이지만, 암 환자나 큰 수술을 마친 사람들이 보신용으로 알음알음 부친의 영업소를 찾곤 했다. 그게 꽤 짭짤했다.
“사무실에서 봅시다!” 강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소율에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소율은 차에서 내려 가볍게 목례하고는 횡단보도를 성큼성큼 건너갔다. 강은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그는 깜빡이는 신호등을 올려다보았다.
‘쯧, 타이밍하고는!’
신호는 이내 녹색으로 바뀌었다. 강은 거칠게 엑셀을 밟았다.

신미나 l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산문집 『다시 살아주세요』 등이 있음.
ㅡ
2025년 3월호(VOL.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