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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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여부 | 연재중 | ||
#5. 기억의 신체성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존재론
● 김효숙
시인의 기억은 시를 살아 있게 하는 유구한 마음작용이다. 풀려 나오는 언어가 이야기 형식이건 이미지 위주건 시인마다 다른 저장 장치가 기억의 출처다. 시인에게 기억이 없다면 과거는 의미 모를 덩어리일 뿐이고, 이전과 지금을 잇는 연결 고리도 알 수 없을 것이므로 매순간 과거로부터의 탈맥락화를 의식조차 하지 못할 테다. 속속 현재가 되는 시간의 파편화 위에서 조각 언어들로 무언가를 표현하겠지만 거기에 담긴 기억의 자취가 의미화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현재도 미래의 과거가 될 수 없으므로 시인의 과거-현재-미래는 백지처럼 납작해져 현재의 맹목에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축복은 아닐 것이 분명한 이런 상황에 대한 공포 어린 상상을 하는 시인은 영원이라는 초월성을 이상적으로 마음에 들이고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기억과 영원의 문제를 압축한 소설과 미디어 콘텐츠를 떠올려 본다.
「두 번째 해연」(조예은)에는 전송받은 감각 파일에 의해 기억으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등장한다. 이 아이는 첫 번째 해연의 기억을 내장한 물질이며, 그 주재자는 아버지다. 둘이서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이 이야기에는 기억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요건이다. 두 번째 해연은, 완전체인 ‘정통인간’들이 왜 평소에는 잘 떠올리지도 않는 추억에 집착하면서 비정통 인간을 만들어 그것을 보존하려 하는지 궁금해한다. 이 서사는 기억마저 물질의 생성물이라는 베르그송의 논리에 대한 문학적 실험이라는 감을 안긴다. 어느 독일 여성의 결코 무력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전하는 미디어 콘텐츠에서도 기억 문제가 도드라진다. 매일같이 역에 나와, 죽은 남편의 목소리가 담긴 지하철 안내방송을 들으며 남편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자. 안내방송이 디지털 시스템으로 차츰 교체되어 가자 이전처럼 남편의 육성이 담긴 아날로그 방송을 복원해 달라고 청원한다. 이 경우도 기억의 연장이냐 망각이냐는 간극에서 영원성에 대한 열망을 첨예화한다.
두 편의 이야기는 대상의 소멸에 대한 다른 방식의 영원성 추구, 그리고 기억이 어떤 형태로 보존되는지를 이야기한다.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영원성을 믿는 이들은 물리적 수명이 다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죽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필멸만이 가장 분명한 사건인 삶이라 할지라도 기억과 향수가 대상을 보존하려는 의지와 영원성을 조성할 것이라 믿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시에서 부쩍 늘어난 기억 표상들 또한 사라진 신체 대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이어서 이와 무관치 않은 기억의 현실화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시인들의 내면을 짐작해 보건대 이는 미디어 콘텐츠의 과잉 생산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인다. 그리움이 혼자 조용히 품어 둔 일인칭의 정서가 아니라 까발려지는 형태로 공개되고 공유되는 실재를 거역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회상도 없이 오히려 일상적이고 기계적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기록된 시간을 디지털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이 같은 콘텐츠들의 범람’1)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그리움을 겪지 않기 위해 과거를 영원화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은 누구나 떠나온 대상, 더 좁히면 장소나 사람에 대하여 아련한 향수나 그리움의 감정이 버무려진 추억을 갖게 마련인데, 그래프턴 태너는 영원과 지금이 동시적이라면 다음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적는다. 영원주의가 과거를 현재 속에 지속시킴으로써 노스탤지어를 막아 버린다는 것.2) 이 말을 풀어 보면, 과거는 과거여야만 노스탤지어를 유발하며, 기억을 현재화하면 그 즉시 영원이 되어 과거와 미래를 집어삼키기 때문에 향수를 소거한다는 의미다. 노스탤지어를 유약한 감정으로 폄하하면서 과거 추수형 낭만주의라 오해하는 상식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 기업의 영원주의 마케팅에 포섭된 이 감정을 구제하는 담론을 펼친다. 영원을 이데올로기로 이즘(ism)화하여 디지털 자본사회에 팔아넘기고, 노스탤지어를 심약하고 유아적인 정서로 취급한다면서 이 감정이 정작 여타의 인간 감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관점을 기술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향수에 잠긴 인간을 유약하게 본다. 영원할 것 같은 대상―사람·고향·사물 등 자신이 아끼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애착 관계가 깨지면 누구든 자동으로 추억이 작동하는데도 말이다. 대상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과거를 현재로 이전하고 싶어하고, 심지어 죄를 지은 것처럼 매사에 예민해져 과거로 돌아가야만 그 억압이 풀릴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그리움이나 향수와 맺는 관계도 매우 돈독해 보일 때가 많다. 아련한 이 감정이 시인의 언어를 이끌면서 개인적인 시간 단위나 주관적인 삶의 배경들이 저절로 표면에 떠오른다. 과거를 향하는 노스탤지어가 감상주의나 속물 낭만주의일 수만은 없는 건 거기에 과거를 보존하는 인간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보더라도 과거-현재-미래는 끊임없는 질적 변화의 연속선 상에 있다. 그는 과거와 현재는 공존하지만 시간은 부단히 분열한다면서, 과거를 보존하여 그것을 연장하면 현재가 되고, 이를 기반으로 불투명한 미래를 열어가는 기억 운동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고 적는다. 그가 말하는 기억은 암기에 의한 습관적 재생이 아니라, 저절로 보존되었다가 외부의 자극이 없더라도 자동으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이른다. 이는 연대기 순으로 배열하지도, 단일한 이미지로 표상하지도 못할 움직임 속에서 변하는 정신의 실재이기도 하다.3)
거기서 시간이라는 리얼리티와 기억이라는 향수가 수시로 만나면 이런 일이 생긴다. 망각이 기억에 침투할 만한 시간을 벌기가 어려워져 망각보다는 기억이 우세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는 연속적 삶을, 말하자면 ‘지속’의 노스탤지어를 살아가게 된다. 과거가 현재로 이동해야만 기억은 보존되기 때문에 여기에 관여하는 시간의 힘으로 이 일이 가능하게 된다. 하여 기억은 언제나 지속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와 달리 기억을 잃어버린 이는 이전과 같은 말을 되뇌면서 정신을 한 방향으로 고정하기 때문에 새로움의 생성인 창조 작업도, 자신의 의식 세계를 표현하는 일도 어려워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가. 죽음의 상태 같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낼 때 기억의 변동성을 겪기도 하지만 그는 도리어 수시로 달라지는 언어를 반긴다. 그때마다 이전에 겪었던 시간과 현재의 향수가 만난다.
1. 존재 감각과 소멸 감각
인간 타자에게는 물론이고 사물들에도 인간의 기억이 묻어 있다. 사물이 사라지면 기억도 일부분이 사라진다. 예컨대 과거의 사진을 가끔 꺼내 보는 이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기억 작용으로 그 시간을 살려낸다. 그러나 사진을 보지 않는 이는 기억의 많은 부분을 어느 겨를에 잃어버린다. 이렇게 선형적인 시간은 장소를 싸안고 흘러간다. 이때는 시간을 물질로 표상할 수 있어서 지금은 사라진 장소와 사물들이 소멸의 형태로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시간을 가리켜 시계의 시간, 과학적 시간, 물리적 시간이라 부른다. 아래 시에서 시인은 시간이라는 추상을 ‘소멸’의 의미로 짚어나가면서 “지워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 있다.
밤의 기억이 멀어진다
빛 위에 / 빛이 고이고
거기 머물던 / 까만 얼룩의 기억
지워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햇살 속 / 고양이가 핥는 건 / 제 몸일까 태양일까
겨울 입김은 / 존재의 감각을 일깨우고
생이여 / 햇살 속 퍼지는 입김이여
이곳은 / 소멸 체험관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지워졌나요?
입이 지워졌습니다 당신은 / 옆구리를 푹 찔려도 /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귀가 지워졌지요 / 피부색을 수군거려도 / 지워진 사람 당신은
분명 들었는데 / 만져도 잡히는 게 없는 사람
지우개를 쥔 사람들
잃은 게 무언지도 모른 채
어깨 으쓱 한 번으로
지우고 떠나는 사람
다시 / 돌아보지 않는 사람
그 안에 너도 있는가? / 있…다, 없지 않다! / 미웠거든, 네가, 찐으로,
너, 지나간 자리마다
나는 조금씩 허물어지고
투명 인간이 아닌데
공기처럼 통과 당한 채
그래, 나도 / 지워지는 사람
좌절의 기억을 옮겨적고 / 다시 좌절하는 사람
자판 위 손가락이 / 모래처럼 흩어지는 것을 /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
여기서 / 어서 나가고 싶은 사람
소멸 체험관에 / 출구는 있는가
있다
바로 여기 / 텅 빈 벤치 아래
삼색 고양이가 / 지운 것들을 / 천천히 게워내고 있다
자기를 닮은 것이 / 꿀렁꿀렁 밀려 나온다
지우개 내려놓은 / 태양이 /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 진수미, 「소멸 체험관」 (《현대시》 2026년 5월호)
“소멸 체험관”은 존재 망각을 획책하는 어떤 시대에 관한 전시 체험장일 수도,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레이저 빔으로 인간의 삶과 소멸 과정을 체험하게 하는 예술 전시장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사라짐이 필연인 인간사의 한 도막을 체험할 만한 곳이다. 체험 내용을 따라가 보면 화자가 먼저 대면하는 대상은 고양이다. 자신의 몸을 핥는 고양이와 햇살을 핥는 고양이라는 중의성으로 한 편에는 짧은 시간 단위의 실존적 주체를, 다른 한 편에는 영원성의 상징인 태양의 시간을 병치한다. 그의 ‘본다’는 감각이 곧장 존재/소멸이라는 이항과 연결될 만큼 지금의 그에게 소멸 감각은 절대적이다. 감탄사 “생이여”를 내뱉으며 소멸의 감각을 되씹는 사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존재의 감각”과 “소멸”의 감각이 부딪치는 현장에서 화자는 지금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당신”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주변 사람들이 “피부색”에 대해 수군거리며 “옆구리를 푹 찔”러도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만져도 잡히는 게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자의 재현물이거나, 레이저 빔으로 환생한 이전 시대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 시는 소멸 체험을 하는 중에 자신도 소멸이 예외일 수 없는 존재라는 필연성을 절감하는 경우를 범상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그친다. 그러나 시적 전환은 “지우개를 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한 무리의 움직임에서 일어난다. 이들 중에 ‘너’도 있는데 그는 화자에게 미움의 대상이다. 화자의 마음을 거스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처럼 너도 “잃은 게 무언지도 모른 채 / 어깨 으쓱 한 번으로 / 지우고 떠나는 사람”이다. 대상을 “다시 / 돌아보지 않는 사람”일 뿐이어서 화자와는 확연히 다른 마음의 지향을 보인다. 성찰과 기억의 문제를 담은 이 문장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쉽게 잊어버리는 인간의 속성을 한 무리의 사람들과 ‘너’의 행위를 통하여 일깨우는 이 시에서 눈여겨볼 상징은 지우개다. 머릿속에 지우개 기능을 장착한 것 같은 이들에게 기억이 들어앉을 자리는 애초에 없다. 자신만은 예외라는 특별성을 내면화한 채 타자의 소멸을 체험하고 있어서 지우개의 기능은 더욱 활성화한다. 그렇다면 화자는 어째서 체험관 바깥에 있는 고양이의 행위 동작에서 기억에 대한 해법을 찾고 싶었을까. 고양이가 무언가를 게워내는 광경을 기억의 복원으로 읽게 하는 결말 부분에서 화자는 이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요컨대 고양이를 빌려 인간이 씹어 삼켜 버려선 안 될 기억을 환기하는 동시에 머릿속 지우개 그 자체를 지우는 정신 작용이야말로 타자의 소멸을 관전하는 포인트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짧기만 한 삶이란 “햇살 속 퍼지는 입김”처럼 한순간의 호흡 같은 것. 과거의 호흡이 현재로 이어지지 않는 일을 우리는 에너지의 소멸, 생명의 소멸, 더 구체적으로는 죽음이라 부른다. 반면에 “태양”은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지닌 기억의 지속성을 지닌 물체로서 결코 망각을 모르는 역동적인 실재다.
이 시의 화자가 상대를 진정 미워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생명체의 소멸 과정을 체험하는 일이 단지 관전하고 감상하는 일로 그친 것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고양이도 자신이 지워버린 것을 “천천히 게워”낼 줄 알건만 하물며 인간이 마음먹고 지워버린 것을 다시 마음먹고 되새기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는 언제일지를 이 시는 묻는 듯하다. 체험 현장에서조차 존재의 감각을 소멸의 감각에 먹혀 버리는 현존재에게 그 시간은 요원하기만 하다는 마음이 시의 결구에 실려 있다. 시간이라는 지우개의 상징이기도 한 태양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는 장면을 보면 저 영원성의 상징물이 이런 속엣말을 하는 듯하다. 인간이! 하물며 인간이!
2. 영원한 ‘당’
우리는 대부분 서양식 교육의 비중이 높은 제도의 수혜자다. 그래서이겠지만 우리의 사고 체계는 어떤 존재가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상황에서 그 정체성을 결정하는 쪽으로 작동한다. 이런 경우를 떠올려 보자.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을 두고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 던진 “침묵의 봄”이라는 메타포는 이 지구가 점차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결정론에 가깝다. 그는 꿀벌의 있음과 없음을 지표로 인간 생멸의 문제까지 결정한다. 반면에 동양식 사고는 모든 존재의 숨겨진 실존을 발견하는 힘을 중요시한다. 그 존재의 성장 과정이나 변화에 주목하기 때문에 결과를 섣불리 예단하지 못한다. 이 같은 차이가 하나의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연히 다르게 만든다.
꿀벌이 등장하는 다음 시를 읽게 된 동인도 이 같은 지식을 배경으로 한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내게 있다. 최근에 음식쓰레기 배출함 근처에서 대여섯 마리의 꿀벌이 날아드는 바람에 소스라친 경험이 그것이다. 꿀벌이 순식간에 모여든 건 내가 들고 있는 음식쓰레기 통이 과일 맛 단내를 풍긴 데 이유가 있다. 레이첼 카슨에게 배운 대로 도시에서 벌의 사라짐을 당연시했기에 이 같은 현상이 밀원(蜜源)을 찾는 꿀벌의 생명 활동인 점과 곧장 연결되지는 않았다.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과 기후 생태를 묵시록으로 엮어 인류의 종말을 예감하는 방식에 길들인 탓이다.
양봉업자 아버지는 꿀벌이 모두 사라지면
멸망이 올 거라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나처럼 핸드폰 붙잡고 사는 인간들 때문에
애꿎은 꿀벌과 아버지만 멸종할 거라 하셨다
나는 세기말 키즈라 꿀따위 상관없고 설탕 범벅 디저트를 좋아해서
서울 맛집과 자살 자조 섞인 쇼츠를 번갈아 내리고 또 내렸다
밀랍을 걷어내고 꿀만 추출할 줄 아는 아버지의
기술력 자부심 하늘을 찌르고
돌려준 벌집에 다시 꿀 채워 넣는 꿀벌의
시끄런 날갯짓 귀를 찌르고
방주 없이 난 어디 가지?
아버지 나라가 오시면
일렁이는 정보 대홍수 몸 맡기면
결코 나 혼자 가라앉을 일 없을 테니까
곧바로 알룰로스와 스테비아가 등장하며
사람들은 꿀을 찾지 않게 됐다
대체당을 신뢰하십니까?
아무튼 다이어트!
끝 이전 시작되자마자 끝날 것들이 마침내 오고 있다
이십세기 말 보란 듯이 태어나고 자살도 멸망도 맞지 못하는
나와 같은
인공 꿀벌들이 수분을 잘도 옮겨대며 생태계를 활보했고
윙윙 소리 없이 인간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인간 만세!
아자아자 현대인!
아버지는 여전히 말세에 대한 숙취로
꿀물을 타 드셨고
전자파 스티커를 주변에 선물하고
케이블 티브이 연결 없이 행복하고
말세다!
말세!
아버지가 양봉을 그만두신
그해 나는 원인 모를 이석증에 시달리며
웅웅거리는 귀를 부여잡고
자를까 말까의 기로에서 고통을 받았다
의사는 그걸 현대인의 만성 질환
아버지는 핸드폰을 많이 해서
라고 진단했다
― 사강은, 「시대정신」 (《문파》 2026년 여름호)
전자파의 폐해에 대한 말하기인 것 같으나, 핵심어를 “대체당”(alternative sugar)으로도 읽게 한다. 인간에게 영원히 요긴한 ‘당’의 세계에서 “꿀”은 원당이고 “알룰로스와 스테비아”는 대체당이다. 꿀 생산자인 아버지와 대체당 세대인 화자의 갈등은 ‘당’을 대하는 차원, 즉 “시대정신”의 다름이 유발한다. 꿀을 보양식으로 여기는 아버지가 볼 때 꿀벌의 존재 이유는 에너지원인 당을 영원히 공급하는 자연 생명체라는 점에 있다. 때문에 아버지는 현대인이 사용하는 휴대폰이 내쏘는 전자파가 벌을 사라지게 하는 원흉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벌꿀 시대로의 회귀는 아버지의 기대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실존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구의 종말을 염려하는 아버지 때문에 화자는 인류 구원의 방주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설탕 범벅 디저트를 좋아”하는 그가 다이어트를 위한 식단에서 대안당을 빼는 일은 있어도, 아버지가 건강을 챙길 때 꿀을 제외하는 일은 없다. 아버지는 꿀물을 건강식으로 알고, 화자는 살기 위하여 대안당을 먹는 경우의 다름일 뿐, 시대가 바뀌어도 ‘당’은 인간의 영원한 기초 에너지원이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에 종말이 닥친다는 묵시록을 믿는 아버지에 비하면, 세계인의 우울을 부추기는 세기말 증후군이 편재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죽음의 증상들을 체화하지 못한 채 살아온 화자의 시대 정신은 아버지와 큰 격차가 난다.
시 현실에서는 벌이 사라지고, 벌만 한 크기의 마이크로봇인 “인공꿀벌”이 벌을 대체한다. 꿀벌 대신 꽃가루를 옮겨 주어 과일과 곡식이 열매를 맺도록 돕는다. 기계 꿀벌이 벌을 대체하는 시대를 주도하는 건 기술 자본이며, 이때의 강조점은 무엇보다 생산성 제고다. 벌이 사라지면서 그 벌의 이미지에 어린 인간의 기억도 사라져 간다. 그렇다면 내가 앞서 말한 벌의 나타남을 본연의 자연이 돌아온 현상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자연에서 밀원(꽃)을 찾지 못한 벌이 도시로 이동하여 쓰레기통 근처에서 단물로 갈증을 달래는 상황이라면 벌의 귀환과 인공 당의 자연화는 몹시 부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기계 꿀벌의 생산성이 우리의 식량을 남아돌게 한다 해도 고유의 생명체가 내는, 이명처럼 “웅웅거리는” 날갯짓은 들을 수 없게 된다. 기술 자본이 가차 없이 지워버리는 건 생명의 파동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인간이 자연의 소리를 듣는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이 또한 야만적인 상황이다.
지구상에서 벌이 사라졌다는 결과론을 앞당겨 대안당의 발명을 당연시하는 시대. 시인은, 인간과 자연의 연결 고리를 끊은 대안당이 다이어트 식품에 첨가되는 현대인의 식생활에 주목한다. 내가 음식물 쓰레기 통을 열자마자 달려들었던 벌들의 성마른 날갯짓 소리가 내내 마음을 들쑤신다. 자연의 일속인 벌이 도시로 날아들어 저들의 잃어버린 밀원을 음식쓰레기에서 흘러내린 단물로 대체하려는 몸짓은 신경질적인 데다 다급하게까지 보였다. 그 와중에도 분명한 것은 아직 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일부의 벌은 살충제 살포 탓에 농촌을 떠나기도 한다는 것. 내가 만난 벌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시의 공원을 대안처로 삼고, 인근의 공동주택 단지에서 밀원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 구조를 꿰뚫는 벌의 생존 본능과 생존 게임은 인간을 능가한다. 그럼에도 벌과 인간 사이에 변하지 않는 관계성이 있다. 인간은 꿀 수급을 위한 작업일 때를 제외하곤 자신의 영역에서 벌을 쫓아낸다. ‘당’에 기대어 기초대사를 유지하려는 기대가 무의식처럼 기억에 새겨진 까닭이다.
3. 유물화에서 기억을 구제하기
우리의 의식은 회상과 기억에 많은 자리를 내준다. 기억은, 자기 마음의 위치를 알아야 할 때나 이야기를 할 때도 매번 시작하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기억으로부터 기억까지의 비선형성과 듬성듬성함을 알면서도 굳이 의미 맥락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도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은 시간의 선형성을 따라 일직선으로 배열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 순서를 거역하면서 그 내용이 편집된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이끌어낼 때 우리가 흔히 빠지는 착오 속에도 기억의 진실은 숨어 있다. 기억이 부리는 마술에는 시간의 역행과 순행이 교차한다. 순차적 시간에 균열이 생기고, 장소와 시간이 어긋나면서 사실과 다른 제2의 시·공간이 이미지로 떠오르곤 한다. 시간은 일직선으로 진행하지만 기억은 거기에 침투하여 앞뒤 순서를 뒤섞으며 우리의 상상을 부풀린다. 이렇게 의식은 시계의 시간을 따라 작동하는 객관 지표들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즉흥적 정신이다. 정보화 시대의 증상들을 시계의 시간이 소비되는 것으로 보는 이유도 이 점에 기반한다. 그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의 시간을 현재화하고 표층화한다.
시는,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거나 이야기할 때 달라지고 새로이 발명되는 세계 속에서 지속되는 정신의 나타남이다. 개인의 언어가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되는 이치만 보더라도 기억은 막강한 강도를 지닌 정신 작용이다. 시인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내용에서 그의 정신을 읽게 되는 때는 어떤 의식이 시인에게서 지속되고 있을 때다. 시간과 상황이 바뀌어 형식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시인은 비가시적인 마음에서 지속되는 것에 관하여 써나간다.
소문이 깃든 자리에는
좋든 나쁘든 솟아오르는 것이 있으니까
꽁꽁 언 손의 손금 위에
입김을 불어 주던 사람과 멀어진 뒤로
산 사람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발밑의 흙을 그러모아
작은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겨울이 되어 첫눈을 맞고
장지에 다녀오는 일이 익숙해지면서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썩은 동아줄을 붙드는 마음으로
방지턱을 넘어설 때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손을 잡고
조금만 더
속삭였다
그는 종종
사람은 무엇을 감추기 위하여
이렇게 큰 몸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해했지만
그의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관이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그에 비해 그의 관은
너무 작아 보였다
이렇게나 작은 사람이
기억 속에는 이리도 거창한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새빨개진 손을 감싸 주는 입김처럼
그의 굳은 몸을 태우는 불길은
관을 뒤덮을 것이고
나는 언 땅에서
손에 생채기가 나도록 흙을 그러모으면서
조금만 더
속삭인다
고작
한 줌의 흙이 모인다
― 장대성, 「입로(入盧)」(《파란》 2026년 봄호)
누구나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 때문에 의식이 요동치는 경험을 한다. 그중 가장 거대한 사건이 이별의 형식이 아닐까. 근접거리에 있던 타자가 죽거나 사라짐으로써 온기마저 거둬가는 시간의 잔인성을 체감하게 되지만 우리 삶의 외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지속한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 가장 거대한 사건은 이별을 겪지 않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며, 누구든 예외 없이 삶이라는 긍정성과 죽음이라는 부정성,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균열을 겪는다. 이별은 유예될 뿐, 결과적으로 필연인 삶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그 끝에 죽음이 있다.
인용한 시에서 화술의 의도는 ‘그’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이별 감정에서 읽힌다. 그의 죽음 이전부터 화자는 온기를 나누던 누군가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이별의 형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기억이라는 마음작용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그의 “큰 몸”에 비하여 관의 크기가 “너무 작아 보”이는 지점에 기억의 문제를 심어 놓고 이것을 이별 감정으로 풀어낸다. 죽음이 거대 사건일 수 있는 건 거기에 상식을 초과하는 기억의 “거창”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삶을 이별의 과정이라 여기는 화자에게 기억은 어떤 마음의 작용점일까. 소문이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가는 구조를 들추면서 생물학적 죽음으로 의식이 진전하는 시적 구성에서 이 점을 짚어낼 수 있다. “산 사람”을 죽이는 소문이 곧바로 큰 무덤을 만드는 사회에서라면 화자처럼 남다른 은유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점. 큰 무덤은 죽음의 은유로서 소문의 무덤이므로 그는 “작은 무덤을 만들어” 상대를 조그만 사람으로 축소하여 보호하고자 한다.
이런 점은 ‘그’라고 부르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가 평소에 가졌던 의문에서도 읽힌다. 인간 몸의 크기가 무언가 거대한 것을 감추려는(“사람은 무엇을 감추기 위하여 / 이렇게 큰 몸을 가지게 되었는지”) 의도에 따른 설계물이 아닌가 하는 그의 궁금증도 소문에 의한 사회적 죽음에 대한 부정성으로 읽힌다. 시인은 그의 몸에 비하여 관의 크기가 “너무 작아 보였다”라고 적음으로써 죽음만이 거둬갈 수 있는 것, 죽음으로써만 단절되는 소문의 폭력성을 들춘다. 이 시의 의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사후에 더욱 증식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이 그의 몸보다 더 거대하다(“이렇게나 작은 사람이 / 기억 속에는 이리도 거창”)는 인식이 도달하는 곳에는 “조금 더”라는 화자의 요청을 들어주는 상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조금 더 간격을 좁혀 자신 곁으로 와 달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런 속삭임이 서로에게 따뜻한 “입김을 불어 주”는 일이기도 한 관계가 지속되기를 꿈꾸어 본다. 모두가 작은 사람이 되어 이 점이 그대로 보편적인 마음 나눔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화자는 “입로” 의식에 참례한다. 그러나 시의 결구에서 보듯이 그가 최종 움켜쥔 건 “고작/한 줌의 흙”일 뿐. 사람들은 여전히 가까이 오지 않고, 멀어지거나 떠날 뿐이다. 아래 시에는 유물화의 일로에 놓인 기억을 재생해 보는 이가 등장한다.
이 동네에는 아직도 생선 트럭이 옵니다
갈치나 오징어를 팔아요
아마도 목요일 어쩌면 수요일
생선이 왔어요, 생선이, 우렁차게 확성기를 울리며
생선이 왔다고요 우리에게 생선이
가차없이
이름처럼 머나먼 빅토리아 케이크 같은 걸 녹여 먹고 있는 오후에도
창틈으로 방충망 사이로 암막 커튼을 들추고 막무가내로
할 말이 있다는 듯
자꾸 생선이 옵니다
일방적으로 온몸을 훑고 가는
이 비린내 나는 다정함
오래 전 그는 내 음식을 먹고 싶다며 자취방에 찾아왔어요
하필 온갖 비린 것들을 넣어서 해물탕을 끓여 줬죠
그는 연신 맛있다고 했지만 반도 먹지 않았어요
몇 번씩 비누로 씻고 맥주로 씻어도
손에서 비린내가 없어지지 않아서
나는 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요
우리는 말없이 눈을 감고 노래를 몇 곡 들은 후 헤어졌지요
비린내 때문이었어요
그랬어야만 해요
내 사랑은 비린 해물탕 같은 거였는데
이름도 멀고 마음도 머나먼 빅토리아 케이크가 되려고
수식어가 설탕처럼 가득 뿌려진 문장들 속에 얼굴을 가둬 놓고
라즈베리 오렌지 바닐라 버터밀크
실은 갈치 오징어 고등어
사라진다는 걸 믿지 않으면서
마치 사라질 수 있을 것처럼
오늘은 목요일, 아니 어쩌면 수요일
지도가 펼쳐지고 길바닥에 주소가 적힙니다
기어코 생선이 옵니다
― 강은진, 「생선이 왔어요」(웹진 《문장》 2026년 6월)
시 초반에 후각을 끌어당기는 건 생선 냄새다. 중반으로 접어들며 “내 사랑”의 경험으로 의식이 전환한다. 죽은 생선을 끓이는 냄비와, 젊음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풍기는 “자취방”의 풍경은 이제 막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빤해 보이는 배치 속에서 어설프기만 했던 사랑 이야기가 재생된다. 젊은 풍모를 자랑하며 화자의 자취방을 찾아왔을 ‘그’에 비하여 화자가 끓여 내놓은 해물탕은 한물간 듯이 “비린내”를 풍긴다. 생기가 없다는 뜻으로도, 아직 미숙하다는 뜻으로도 읽히는 비린내의 메타포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에로스의 풍미는커녕 진득한 비린내가 풍겨 온다. 손을 거듭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로 하여 그는 맛있다는 칭찬의 말과 달리 해물탕을 반절도 먹지 않고 자취방을 나가버림으로써 자신의 속내를 침묵 속에 묻어둔다.
이 사랑 이야기에 에로스는 없다. 만남과 이별에 따른 감정의 에코도 없다. 있는 거라곤 “아직도 생선 트럭이” 오듯이 “기어코” 닥쳐드는 기억이 몰아오는 두 사람 간 거리 조정의 미숙성이다.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이나 퍼포먼스에 취약했기에 마음이 곧장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장, “사라진다는 걸 믿지 않으면서 / 마치 사라질 수 있을 것처럼”의 앞부분에 ‘기억이’를 넣어 읽어도 무관할 만큼 화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기억이다. 화자는 정곡을 에두르는 “수식어”로 마음을 숨겼기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사랑도 살아 있는 생명 활동이어서 성장하며 변화한다. 게다가 사랑이 사람의 일인 한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 활동이 지속된다. 이 시에서 화자의 사랑은 그만큼의 변화를 거치며 거기까지만 성장했다. 그에게 생선이 오는 날은 옛사랑의 기억이 오는 날.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믿는 마음이 드는 건 번번이 생선과 함께 오는 비릿한 사랑의 향수 탓이다. 자신 안에 살아 있는 사랑의 기억 때문에 점점 자라나는 것은 청년 시절의 어수룩함이다. 이는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존재자에게서 풍기는 비릿함과 다르지 않은 성장 구간의 한 증상이다. 사랑의 감정은 사랑에 빠진 자에게만 용인되는 변덕을 포함한다. 그러나 온 정성을 쏟았는데도 이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고, 아직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풋풋하고 어설픈 감정의 주체는 변덕을 사랑이라 여기지 않는다. 변덕을 모르는 화자의 기억 속에 “내 사랑”이 여전히 살아간다.
4. 기억 말살 장치를 부수는 시
예술 창조자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만들어낸다. 이는 물리적 균질화를 꾀하는 상품 제작자와는 다른 차원에서 작가 정신이 하는 일이다. 가장 낮은 단위의 기억이 물질화의 일로에 놓인다면, 높은 단위의 기억은 정신 영역으로 성큼 도약한다. 이는 인간 정신의 요체인 기억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성과 물질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음 같은 경우를 상상해 보자. 시인의 정신을 바위 같다고 비유하면 물질로서 바위는 시인의 신념을 말하기 위한 매재(媒材)쯤 된다. 문제는 그 시가 하나의 신앙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는 점이다. 움직임이 없이 견고한 정신과 예술의 관계는 성립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설령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예술품의 의도와 목적은 예술품 바깥 세계의 계산법에 묶이기 쉽다. 따라서 부단히 변신을 거치며 이전과 다른 언어를 창안해 내는 시인에게 높은 정신인 ‘기억’은 결국 자신을 물질화라는 신앙으로부터 구출해내는 에너지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기억의 문제를 따라가 본 건 이 같은 마음작용에 의한다. 소멸에 대한 감각이 무디다면 존재 감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감을 안기는 시에서 읽히는 것은 쉽게 망각하는 인간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어느 시인은, 레이저 빔이나 홀로그램으로 재생되는 인간 형상이 한순간의 빛 현상인 것처럼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도 지속되지 않는 한순간의 정신 작용인 점을 사유한다. 또 다른 시인은 인간이 유구하게 섭취해 온 ‘당’의 변천사에 꿀벌의 생태를 이입하여,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그 신체에 인간의 기억이 묻어 있음을 전한다. 이어지는 시에서는 풋풋하다 못해 비린내가 나는 사랑의 기억, 떠나기만 하는 사람들임을 잘 알면서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 보존된 기억을 현재로 끌어와 이것이 영원의 형식인 점을 시화한다.
영원을 무한궤도에서의 생명 운동이라 여기는 이라면 베르그송의 논리 앞에서 의식의 전환을 맞는다. 들뢰즈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듯이 그는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질적 변화의 연속성을 말하면서 ‘반복’에 의한 ‘차이’의 생산을 강조한다. 자기 자체의 반복이면서 그 반복이 자기와 차이를 만드는 변화와 새로운 생산의 연속을 ‘지속’이라 부른다. 과거를 한시도 잊지 않는 기억 운동만이 아니라, 기억하는 일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전과 다른 수준에서 달라지는 것이 지속이다. 앞의 시에서 읽었듯이 대상을 기억하는 일은 무의식중에 잔상처럼 떠오르는 이미지들의 파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를 순수기억이라 불러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시인이 당신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때 같은 하나의 실재가 그것이다.
이제니 시인이 쓴 대로 “영원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은 중첩되어 순환”하며, 그런 이유로 영원은 “과거였던 미래를 품은 기록”(이제니, 「영원은 젊어지는 분홍」)이다. 소멸이 아닌 지속의 무한성 안에서 “영원이 미래의 얼굴을 돌아볼”(「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 때 시·공간이 하나가 되는 경험 안에서 시인의 순수기억은 수시로 되살아난다. 이 시편들은 과거의 현재화, 현재의 미래화가 기억의 강도로 가능한 것임을 전한다. 이렇듯 과거를 끌어당겨 현재화하는 기억 작용은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우리를 아련한 그리움과 향수로 이끈다. 이는 적어도 인간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고유성, 인간주의를 믿는 한 결코 우리에게서 소멸하지 않을 내용이다. 끝내 보존하고 싶은 자신의 신체와 분리하지 못할 것들이지만 인간주의가 소멸한다면 더불어 가차없이 소멸하고 말 것들. 이것이 기억이다. 기억의 신체성을 이야기하는 「간빙기의 우리는」(김중일)에서 시인이 “각자 얼음” 같은 단독자들을 불러내는 작업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나만의 기억이나 너만의 기억은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기억이 뒤섞이면서 “간빙기의 우리”는 태어나고, ‘우리’는 기억의 만남으로만 가능한 관계성을 이룬다. 너의 기억에 의한 나, ‘나’가 기억하는 너라는 관계성의 지속만이 영원을 보장하며, 너도나도 같이 사라지는 세계에서는 기억도 사멸한다.
과거를 불러내어 마음껏 그리워하는 자만이 현재라는 기억 말살 장치에 강탈당하지 않고 기억을 보존할 수 있다.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 단위를 앞세우는 비-반성적 주체는 과거를 과거대로 굳혀 놓고 매끈한 현재성을 기획하여 공개하거나 판매할 것이다. 그 와중에도 시에 기대를 걸 수 있다면 다음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시인은 첨단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기억을 베껴내어 표층화하는 것과 다르게 생생한 감각을 밀고 나간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말하기는 삶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며 이 점을 보증하는 건 그의 기억이다. 현재의 목적에 따라 조직되지 않고 선선히 떠오르는 추억‧그리움‧향수에 기대는 존재론적 발화를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1) 박혜진, 「살아 있는 죽음의 이상한 사회」, 『현대시』, 2025년 11월호, 176쪽.
2) 그래프턴 태너, 『포에버리즘』, 김괜저 역, 워크룸프레스, 2024.
3) 김재희,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 살림출판사, 2008.

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시의성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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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호(VOL.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