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병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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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야도 앞바다에서의 표류
바다에는 단풍이 없지만, 바다도 가을빛으로 물이 든다. 가을 바다의 새벽 놀과 황혼은 그 어떤 단풍보다 짙은 그리움의 빛깔이다. 태양광이 지구 표면에 반사되는 기울기가 줄어들면 밤이 길어지고 복사 에너지가 감소한다. 산 능선마다 단풍이 불을 붙이지만 정작 기온은 내려간다. 그때 바다의 신열도 함께 내린다. 서늘해진 가을 바다는 아름다운 동시에 풍요롭다. 여름 동안 달아올랐던 수온이 차분해지면 물고기들은 쾌적하게 먹이활동을 하며 산란과 월동을 준비한다. 연중 낚시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 가을이다.

시월의 끝자락, 일행들과 함께 홍원항에서 레저 보트를 띄웠다.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바다도 한없이 푸르기만 했다. 바람도 파도도 없어 잔잔한 서해는 마치 청색 원피스 같고, 우리의 보트는 그 위를 스팀다리미처럼 미끄러져 나가며 바다의 주름을 부지런히 폈다. 달리는 보트 위에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내 옆구리에 파도가 스칠 때마다 은빛 비늘이 무성히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파도 낱알 속에 그리운 이의 눈시울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낚시가 다 재밌지만, 나는 소형 보트를 타고 즐기는 농어 캐스팅 낚시에서 가장 짜릿한 매력을 느낀다. 이날 우리는 죽도, 직언도, 석대도, 연도를 돌며 홈통과 곶부리와 수능능선을 게릴라처럼 치고 빠졌다. 7.6피트 미디움라이트 로드에 2500번 릴, 합사 1.2호 그리고 쇼크리더 3호로 만끽하는 가을 농어와의 경쾌한 파이팅은 그야말로 ‘스포츠’의 정수였다. 힘이 제대로 붙은 70~80센티미터급 농어들의 손맛이 끝내줬다. 이따금 보일링을 하는 삼치 떼를 향해 은색 스푼이나 메탈을 던져 빠르게 감으면 덜컥, 하는 요란한 바이트와 함께 달려 나가는 삼치의 당찬 질주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오후부터 바다가 수상했다.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김춘수, 「처용단장」)던 시구가 떠올랐다. 바람이 터지면서 너울이 치기 시작했다. 바다는 자꾸 음흉하고, 흐린 하늘에 지워진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몽롱했다. 그럼에도 낚시에 열중하느라 파도가 칠 때마다 물이 날카로운 예각으로 빛나는 것을, 바람의 모서리에서 물방울들이 거품을 물고 죽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늦가을 해는 일찍 수평선을 넘어 간다. 금세 어둑해진 개야도 앞바다, 우리의 보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어장의 폐그물에 걸려 갈피를 잃고 있었다. 겨우 벗어났더니 다시 어장, 스크루에 걸린 밧줄을 풀며 벗어났더니 또 다시 어장…….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 달빛은 배들이 지난 길들을 불러 모으다가 한꺼번에 흩어버리고, 낚시의 기쁨은 어느새 불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장에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밧줄을 넘고, 엔진을 끈 채 바람이 보트를 밀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세 시간쯤 표류 아닌 표류를 했다. 너울을 맞아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 칼바람에 오들오들 떨었다. 마침내 거미줄 같은 ‘바다 미로’에서 벗어났지만, 홍원항으로 귀항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개야도 선착장에 배를 대고 ‘이끼가 피어나는 섬’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찾은 곳은 ‘개야도 이모네 식당 민박’이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주인아저씨께 셔츠와 바지를 빌려 입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식당에 내려가 캔맥주 한 잔 마시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개야도 앞바다에서의 짧은 표류는, 내가 엄살이 심하긴 하지만, 하여간 심정적으로는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유명한 그림 ‘가나가와 난바다 파도 속’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 같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보던 일행들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린 하루의 에피소드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이모네 식당의 전라도 백반은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보트 어창에서 제일 큰 농어 한 마리를 꺼내 회를 떠 민박 사장님 내외, 그리고 김치에 ‘혼술’하시던 동네 어르신과 함께 나눠 먹었다. 살에 기름이 제대로 오른 가을 농어회는 꿀맛이었다. ‘인간’을 회복한 밤, 우리는 나란히 누워 뜨뜻한 구들에 등을 지지며 잠들었다. 얼마나 고되었는지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고는 사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 욕설로 잠꼬대를 하는 사람……. 자는 모습들이 천태만상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덜 마른 옷을 입고, 질척거리는 신발에 발을 넣고 다시 보트에 올랐다. 너울이 셌지만 어둠이 걷힌 바다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점점 환해지면서 빛의 다발이 수평선을 잡아당기는 아침 바다, 우리는 부지런히 달려 마침내 홍원항에 도착했다. 하루가 십 년처럼 길게 느껴지던 뜻밖의 1박2일 조행이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열선시트를 켰다. 차가운 몸이 점점 녹자 어제의 고생이 먼 옛날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통문명』의 저자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괴로움과 아픔이 없는 문명은 인류의 이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괴로움을 멀리 할 방법을 잘 알고 있고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들은 오히려 기쁨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잊고 있다. 쾌락과 자극과 쾌적함을 만들어내는 여러 사회 장치가 그물처럼 정비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들에 에워싸여 ‘생명의 기쁨’을 잃어 왔다. 그리고 우리들의 존재를 마음속에서부터 위협하는 듯한 진짜 고통과 예기치 않았던 듯한 진짜 해프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우리의 삶도 종종 어두운 바다 같아서, 맑아서 멀리까지 잘 보이는 날은 드물고, 한치 앞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 세상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개야도 앞바다의 표류가 내게 가르쳐줬다. 그러나 가끔은 그 우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이모네 민박 식당에서의 하룻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나는 삶을 뒤흔드는 그 어떤 우연과 혼돈도 두 팔 벌려 기꺼이 맞이하기로 다짐했다. 그러고는 스르르, 조수석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

이병철 l
2014년 《시인수첩》 시, 《작가세계》 평론 등단. 시집 『오늘의 냄새』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 『원룸 속의 시인들』, 산문집 『낚;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사랑의 무늬들』이 있음.
■ 25년 경력의 낚시꾼으로 FTV, FSTV 등 낚시방송에 출연했으며, 월간 《낚시춘추》에 조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낚시 의류업체 잔카, 조구업체 아이마루베이트로부터 후원을 받는 프로스텝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2019년 러시아 아무르강 정글에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령한 물고기 타이멘을 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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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