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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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효선 

  

 

 

 

사과

ㅡ 의 부족들과 우리가 선택한 오해

 

 

  

   

      

 

  푸른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빛. 우리는 그것을 청춘이라 불렀을까. 지나고 나면 어깨를 돌려 아련하게 뒤돌아보는 눈빛, 눈빛이 눈빛으로 밀려나 아득함으로 멀어지고 마는 빛. 양가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아직도 먼 데서 사과꽃이 피고 올망졸망 열매가 달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은 이제 달이 되었을까. 별도 달도 따줄 수 없어서 사과나무를 심었다는 사람. 미래는 과거에서 흘러나오고 현재는 언제나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 심장은 비바람이 거쳐간 뒤에 푸른색을 띤다. 때로 조급함이 안쪽으로 고여 신맛이 흘러든다. 태양에 끈기 있게 맞서 단맛이 스며든다. 하지만 예고 없이 성급한 이별이 들이닥친다. 마음의 심지가 다 굳기도 전이다. 어디로든 휘어지는 가지는 붙잡을 용기가 부족하다. 붉은빛이 흘러들기도 전에 너는 내 손을 뿌리쳤다. 툭,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아오리라는 이름으로. 푸른 심장은 계절보다 먼저 절망을 배웠다.

  그 후로 너는 그렇게 소리 질렀다. 사과하지 마! 사과할 필요도 없고 사과받고 싶지도 않아. 미술 시간, 교탁 위에 올라온 너는 나를 향해 줄곧 그렇게 쏘아보고 있다. 싸늘하게 늘어진 그림자를 대동하고 와서. 아무도 사과를 건드리지 않는다. 미동도 할 수 없을 만큼 얼어버린 자세. 사과는 나에게 그런 자세를 요구했다. 아니,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는 책에 박힌 언어를 맹신했으며 어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믿었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정물화도 그렇게 탄생하는 것일까. 마치 본질이 그 자세에서 비롯된 것처럼. 어른이 되면서 진리가 얼마나 무서운 관념인지 알게 된다. 영웅은 악당이 되고 도덕은 파렴치했으며 왜곡된 진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과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던 세잔. 어떤 시점에서 보더라도 사과의 형태와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집념. 하나의 형태와 덩어리로 남아 사과라는 이름이 더 크게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그는 사과와 인간을 차별하지 않았다. 사물의 무표정을 통해 무(無)로 사라지길 원했다. 사물을 알기 위해 인간을 알기 위해 사과 속으로 들어간 사람. 끝내 에덴동산의 기억을 지우려 했던 사람. 아니, 에덴이 어떤 곳인지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그리는 사람. 전생은 그림자처럼 영원히 물질 뒤에 숨어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느 날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관념들. 우리는 사과의 전생을 잊지 못하는 사과의 부족 중 하나. 해가 구름에 완전히 가려질 때까지 그림자를 완성하지 못하고 훌쩍 어른이 된다. 떨어진 풋사과의 기억만 간직한 채.

  내가 태어난 계절은 스산하고 쓸쓸했다. 그곳의 동산이나 언덕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자주 버려진 기분을 데려왔다. 어떤 날은 아주아주 슬픈 허밍으로 모든 지붕이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 계절의 부족을 불투명 유리병에 담아 땅속 깊은 곳에 묻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밤을 지나 다시 병뚜껑을 열었을 때 스산한 달빛의 기운은 사라지고 온화한 표정의 달빛을 보기 위해. 파스칼 키냐르는 말한다. “언어의 영향권에 있는 것은 모두 지겨운 것이다. 언어 없이 지내는 것은 모두 회귀해서 다시 육체와 감각과 격정의 밀도를 높인다”라고.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 티끌로 먼지로 사라져 영원히 떠도는 물질로 남아 있겠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기억과 사물이 만나 시간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삶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지난날 부족의 기억을 지운다. 죄는 둥글게 갇힌 사과다. 반쪽으로 쪼개지는 벌. 씨앗은 다시 죄와 벌을 가진 사람을 잉태한다.

  그러나 사람의 호기심은 때때로 독을 불러온다. 선악과라는 상징이 그렇게 굳어진 듯하다.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라니. 에덴이라는 낙원과 원죄를 동시에 지닌 인간이라는 굴레. 기억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몸. 끝없이 이미지로 나타나는 환영들. 무의식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작은 씨앗.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둔 사과 씨앗은 어떤 그림자로 태어날까. 긍정의 맥락에서든 부정의 맥락에서든 삶은 이어진다. 희망으로 견디기도 하고 독으로 견뎌내기도 한다. 다양한 감정들이 혼재되어 때때로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사과라는 주체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물끄러미 거울을 본다. 정물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실제의 나는, 나의 부족들은 어디에 있을까.

  종종 아름다운 새들은 과일과 열매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코스타리카에 서식하는 긴꼬리 마나킨 새 역시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과일로 식단을 정했다. 자신만의 무대를 꾸미고 온갖 퍼포먼스를 통해 암컷을 유인한다. 하지만 대부분 수컷이 그렇듯 임신에 성공한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버려진 아름다움만이 남은 무대. 달콤하고 아름다운 무대는 사랑이 끝나면 여지없이 평범해지거나 방치되거나 폐허의 수순을 밟는다.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그토록 정성을 기울이지만 호기심의 유통기한은 종족 번식의 성공으로 끝이 난다.

  인간이라고 크게 다를까. 호기심과 무관심으로 상처를 입거나 입히거나 파멸에 이르기도 한다. 호기심의 기원은 신화적 요소에 기인하지만 신화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다. 온갖 상상력으로 불안과 미움과 불행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여준다. 신화를 믿지 않으면서 삶은 온통 신화적 스토리로 가득하다. 물론 호기심으로 인해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힘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단지 눈을 갖다 대거나 손끝으로 터치하거나 명령을 내리면 된다. 그러는 사이 점점 인간에게 무관심해졌다. 호기심과 무관심이 하나의 줄을 잡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호기심과 무관심이 한 손을 잡았다는 건 극과 극의 상태에서 언젠가 부딪힌다는 말이다. 나의 호기심과 너의 무관심이 부딪칠 때 그것은 비인간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언론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그 예이다. 자극에 중독이 된 사람들과 어떤 자극에도 무관심한 사람들. 전철에서 마주치는 나와 너는 그렇게 닮은꼴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인간적이라는 말의 온기가 남아 있다. 사과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전히 사과의 부족이다. 그 사과가 어떤 얼굴 어떤 성격을 띠든지 간에.

  그리고 우리에게는 호기심과 무관심과는 다른 이타적인 사랑이 남아 있다. 우리가 사과의 달콤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이타심은 나와 너를 떠나 지극히 이성적인 감각이며 초월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본능적인 사랑의 감정보다는 ‘사랑’이라는 본질에 충실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으며 미워하는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서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아내는 남편을 추궁하지 않고 자신이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며 오히려 이혼을 요구한다. 남편도 잘됐다 싶어 이혼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남자를 좋아한 것도 같이 가정을 꾸린 것도 다 남편을 속이기 위해 돈을 주고 남자를 잠깐 빌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말한다. 자신도 처음에는 힘들었고 죽고 싶었다고. 하지만 우연히 남편이 사랑한 여자가 편집해서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거기서 이타적 사랑에 관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찾고 이타적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아내는 그로써 자유를 얻었고 평화를 얻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런 걸 감각의 반응 중 ‘정동’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정동’은 일상의 감정 작용이 아니다. 본능적인 감정에서의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육체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닌 바깥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홍옥이나 홍로, 능금, 부사를 사과라고 퉁쳐서 부르는 건 사과의 육체에 불과할지 모른다. 사과의 육체가 아니라 사과의 본질을 그린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정지된 사물에서조차 흐름을 읽는 것, 삶의 궤적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기억과 물질의 방향성을 읽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타적인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에덴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것처럼.

  노스트라다무스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는 이미 달로 사라진 지 오래다. 21세기 사과는 땅에서 자라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손에 꼭 쥐고 있다. 사과는 자기장을 가지고 양극이 생겨 전류가 흐른다. 보이지 않지만 강한 빛을 발산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사과를 본다. 사과와 이야기하며 심지어 사랑에 빠진다. 사과에 중독되는 사람들. 간절함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대상일 경우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의미와 역으로 영원히 헤어지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간절하다는 건 그것으로 인해 불행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취와 관계될 경우 꼭 이루고 싶다는 소망과 꿈에서 멀리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의미인 것처럼. 물론 간절함으로 사과를 반으로 쪼갠다고 해서 사과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세운 규칙과 관습, 질서에 위배되지 않으려는 지독함이 숨어있다. 어느 순간 푸른 사과는 물기가 다 빠져나간 채 푸석하게 냉장고 아래 칸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사과는 썩지 않는다. 그저 말라갈 뿐이다. 영원한 에덴의 낭만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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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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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