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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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ㅡ 허공에 공허를 뿌리는 이방인이 되어
아침부터 동네 골목이 시끄럽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돌담을 무너뜨릴 기세다. 여자는 하루가 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말인즉슨 자기 집 마당에 쌓은 돌담을 치우라는 소리다. 그 돌담은 아주 오래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집과 그 집 사이 경계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여자의 우김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자신의 말에 도취된 듯 맹렬하게 퍼붓기에 바빴다.
내 기억엔 그 집엔 홀어머니와 아들 그렇게 단둘이 살았었다. 할머니는 그때 한쪽 눈이 멀었고 아들은 늦도록 장가를 못 갔다. 겨우 여자가 들어왔다 싶으면 견디지 못하고 금세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그 후 스무 살 무렵 나는 시골집을 떠났고 내 생활을 하느라 그 집 사정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훨씬 나중에야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 아들이 늦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았다고 했다. 지금 그 집에 사는 아들이다. 어릴 때 나는 그 집에 음식을 갖다 주러 몇 번 갔었다. 시골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일은 흔했으니까. 그때는 어려서인지 몰라도 마당이 그렇게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당 한구석에는 꽃도 피웠다. 단출한 살림살이로 오히려 집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자리에 할머니의 손자가 조립식 집을 지었는데 대지 면적에 비해 건물을 크게 지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당은 사라지고 우리 집과 경계에 있는 담장에 거의 맞닿은 꼴이 되었다. 현관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담이 무너질 것 같은 형태였다. 답답한 건 우리 집인데 오히려 그 집 아들의 아내가 틈만 나면 우리 집 돌담이 자기네 땅에 들어왔다며 돌담을 치우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다.
도저히 악다구니를 견딜 수 없어 토지 측량 기사를 불렀다. 그런데 측량을 하니 오히려 우리 땅이 그쪽 집에 더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아버지도 예전에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쪽 집을 배려해서 담을 쌓은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여자는 믿지 않았다.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는 말이 통할 줄 알았는지. 아무튼 여자는 이제 할 말이 없어졌다. 동네 사람들도 젊은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웃간에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던 시절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는 욕망만이 남았다. 여자는 자신의 주장이 무너지자 이젠 자기 집 앞 공터에 차를 세우지 못하도록 쇠창살 같은 걸 쳐놓았다. 한마을에 산다는 건 그 속으로 스며들어 함께 어우러지는 일이다. 이웃은 친척보다 가깝다고 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힘들 때 돕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시골인심이라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린 듯 씁쓸하다.
살면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우리는 적(敵)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로 싸우거나 해치고자 하는 상대라는 뜻이다. 아마 ‘적’이라는 단어가 처음 생긴 건 씨족사회에서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나 나라가 생긴 뒤에는 외침(外侵)으로 인해 생긴 말일 테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수시로 ‘적’이라는 단어를 쓴다.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까운 이웃, 동료,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도 등을 돌리며 ‘적’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가 만들어낸 물리적 결과물이 아닐까. 벽이 인간에게 스며들어 진화하는 방식은 아닐까. 사방이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나와 벽으로 가로막힌 직장에서 일하고 다시 벽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다. 꽉 막힌 삶에서 우리는 옆을 쳐다볼 여유도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손해 보지 않는 삶 쪽으로 흘러갔다. 양보와 배려보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목적 달성에는 훨씬 쉬웠으니까. 돌보다 차가운 마음이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시시포스의 바위를 굴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잠시 방관하는 사이 돌이 굴러떨어져 발등을 찍거나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하면서. 무거운 바위는 어떻게 하루라는, 매일매일이라는 시간으로 치환된 것일까. 신화는 인간의 선과 악을 지배하며 적절하게 조종하는 심판처럼 보인다. 그 끝에 올 미래가 어떤 얼굴인지를 보여주면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선택을 강요한다. 그 선택에는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대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신화 속 괴물을 닮아간다. 이성과 절제를 견디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는 신화 속 괴물들. 천국의 쓴맛보다 지옥의 달콤한 유혹이 우리 내면에 잠재된 또 하나의 얼굴을 건드려 깨운 건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얼굴. 너무나 굳건하고 단단해서 깨뜨리지 못할 것 같았던 화신.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의 고리가 풀리면서 순식간에 진행되기도 한다. 마치 지금의 자기로부터 멀어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 일을 해낸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의 자화상을 깨운다. 화석이 되어 흐르던 시간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 이성과 절제는 와르르 무너진다. 태양이 사그라든다. 생명을 갖는 순간 그것은 어디로든 손을 뻗어 욕망의 구름을 채우려 한다. 자꾸 텅 빈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럴수록 높은 빌딩에 걸린 공허 지수는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중이다.
생명은 자신의 영역을 갖길 원한다. 그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믿는다. 자신의 체취가 묻은 곳. 생명은 자기만의 체취를 지닌다. 오랫동안 익숙한 체취는 안정감을 준다. 체취의 진화는 무덤까지 이어진다. 돌이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모였을 때 다른 힘이 작용한다. 제일 처음 돌에 권력을 투영한 상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다. 높게 쌓아 올린 돌이 파라오의 위엄을 말해준다. 기껏 해봐야 돌인데 인간은 거기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자연이 상징물이 되는 순간 거대한 기운이 담기면서 돌은 힘과 권력을 갖게 된다. 인간은 그 아래 아주 미약한 존재가 되어 돌이라는 거대 상징물에 기도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감정을 지배하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 그 모든 기원을 감정이 없는 딱딱한 돌에 의지하려 한다니. 돌은 인간에 의해서 생명력을 부여받는 그 놀라운 일을 해낸다는 사실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말. 아주 가까운 골목에서 이주민과 마주친다. 토박이, 토착민, 원주민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물론 굴러온 돌만의 문제는 아니다. 갑자기 많은 돈을 준다니 덜컥 땅을 팔아치운 원주민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과감하게 팔아치우는 욕망을 저지르기까지 우리에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인간은 이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더 과감하고 더 맹렬해졌다. 정말이지 돌이라면 지긋지긋해서 벗어나고 싶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척박한 섬이라는 말은 돌이 많아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는 땅에서 비롯되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시간이 될 때마다 돌을 골라 한쪽에 쌓아두어야 했다. 주워도 주워도 돌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지긋지긋했던 돌밭은 땅값이 몇 배로 뛰었다. 돌도 사서 써야 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물론 내 몫은 없었다. 돌무더기처럼 쌓아둔 마음이 어디로 새어나가 무너졌는지 이제 우리에겐 고유의 영역도 없고 오래된 터전도 그 얼굴을 알 수 없다.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느낌. 무언가 자꾸 빠져나가는 느낌. 허공이 점점 공허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구름이 그 순간을 포착하고 예감을 흘려놓는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허공을 아름답게만 포장한다. 찰칵찰칵 불안한 소리를 찍는다. 우리는 모두 지구의 관광객이고 이방인이 된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생명이 생명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드럽고 무겁고 깨지기 쉬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더 쉽고 편리한 쪽으로 진화하고 복잡한 사유는 점점 퇴화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얼마나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인가. 물론 단단한 심지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드디어 치고 올라가야 할 힘이 생기기도 한다. 나약한 존재에서 단단한 존재로 진화해가는 과정이다. 인간이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돌이 어떤 물질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광물질이 아닐지 모른다. 처음 인류가 탄생하면서 겪었던 소용돌이와 거대한 폭발의 세계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된 기억과 흔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저 화가 날 때 발끝으로 툭툭 차버리는 돌멩이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과 흔적에 대한 기록이다. 돌로 굳어가기 전의 세계를 기억하고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하는 삶을 저장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들은 후각과 촉각을 이용해 빨아들이고 스며 그들만의 세계에 저장한다. 비록 다시는 그 기억을 꺼낼 수도 없고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돌을 숭배하고 기도하고 욕망을 위해 기꺼이 그 앞에 엎드리도록 말이다. 우리 내면에도 어쩌면 무거운 돌문 하나씩 숨겨져 있지 않을까. 그 문은 대체로 굳게 닫혀 있어 인식하지 못한다. 힘겹게 그 문을 열어젖힐 때 그 안으로 강렬한 햇빛이 들이친다. 우리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분명히 알 때 그 문은 서서히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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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