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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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공시사 월평
일상과 창조의 함수관계와 시의 가역반응
● 신수진
위대한 시는 한 시인과 당대와 언어의 한계를 넘어 지속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울림으로 진리로 아름다움으로서 고유의 생명력을 얻고 스스로 성장해간다. 한낱 개인이나 찰나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믿기 어려운 숭고한 예술의 성취와 절대적 영향은 그 무한하고 영원한 예술성 때문에 자의적이고 자율적인 노력과 기획에 의한 결과물이라기보다 무의식이나 신의 영역 같은 외부로부터 불현듯 찾아온 우연의 산물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로 많은 예술가들은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영감에 의지하기보다 규칙적이고 성실한 일상의 루틴을 엄수했으며 수면 패턴, 식사와 목욕, 산책과 취미, 책상에 앉는 시간과 장소 등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자기만의 습관들을 통해 삶에서 최적의 집필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은 생략되거나 희생되었으며 일상 자체가 작품 생산을 위한 완전한 몰입의 장이 되도록 섬세히 고안된다. 누가 강제적이고 규율적으로 정해주는 일은 그 책임과 가치를 깨닫기 어렵지만 스스로 원해서 짊어진 짐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도저한 극기와 전략이 된다. 일상과 창조의 함수관계에서 도출되는 이 고통과 환희의 양가성을 끌어안고 자신의 삶 자체를 핍진한 예술로 승화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예술은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각기 다른 자기만의 창작 방식이 있을 테지만 생계와 살림의 틈바구니에서도 출퇴근하듯 일정 시간을 지키며 글을 쓰는 것,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기만의 쓰는 공간을 갖는 것, 폭풍 같은 모티브가 떠오르지 않더라도 일단 쓰기 시작하는 것 등은 아마도 공통적인 작가의 작업 여건일 것이다. 가령 회사나 기관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홀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과, 사회생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은둔과 무위에 가까운 비활동적인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끊임없이 정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더이상 혼자가 될 수 없을 만큼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이 작업 환경의 세팅은 글쓰기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시간을 영위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예측불가능한 독창성을 발휘해 대작을 쓰고 어떤 이는 매너리즘 속에 파묻혀 의식주만을 겨우 해결하고 있을 뿐이다. 게으른 방종 속에서 운 좋게 뮤즈가 찾아오는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산이다. 자기세계를 이룩한 소수의 예술가들에게도 분명히 반복적이고 기본적인 생활의 영역이 있을 텐데 그들은 어떤 주도성과 효율성으로 힘이 센 일상을 극복하고 예술을 통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 일상과 창조의 함수관계를 조명하고 있는 시가 한 편 있다.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갔었어요
검은 갯벌 속의 조개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이었지요
조개를 줍든
이삭을 줍든
감자를 줍든
상자를 줍든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한다는 것
무엇을 만들거나 사지 않아도 돼요
줍고 또 줍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쓰레기, 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지 않나요?
누군가 남긴 음식이나 물건이 그렇게 표현되는 건 슬픈 일이지요
그들은 버림으로써 남긴 거예요
나의 나날은 그 잉여만으로도 충분해요
어떤 날은 운이 아주 좋아요
누군가 먹다 남긴 피자가 상자째 놓여 있기도 하지요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신선한 통조림
기분좋은 말 몇 마디나 표정을 주워오기도 해요
이따금 인상적인 뒷모습이나 그림자를 줍기도 하지요
자아, 둘러보세요
주울 것들은 사방에 널려 있어요
허리를 굽히며 다가가 건져올리기만 하면 돼요
손만큼 좋은 그물은 드물지요
다른 사람 몫을 조금 남겨두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그날의 해변처럼
빈껍데기만 남아 있지 않도록 말이지요
― 나희덕, 「줍다」 전문, 《애지》, 2022년 여름호
화자는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갔지만 검은 갯벌 속에서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이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도 있지만 때로 계획과 목표와 실행이 일치하지 않기도 하는 우리의 삶을 비유해주는 도입부다. 노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캄캄하고 끈적한 진흙 속을 헤집고 살피며 조개를 “줍고 또 줍는” 과정일 것이다.
“조개를 줍든 이삭을 줍든 감자를 줍든 상자를 줍든” 무엇인가를 주우려면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한다”는 이 간단명료한 동작에 대한 설명은 귀한 것이든 보잘것없는 것이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과 온몸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다.
‘줍다’와 유사한 뜻을 거느리고 있는 얻다, 받다, 맡다, 집다, 따다, 찾다, 갖다, 거두다, 누리다, 구하다, 획득하다, 차지하다, 데려오다, 습득하다 등의 동의어군에서 시인은 ‘줍다’라는 동사를 선택함으로써 시의 주제를 보다 예각화 하고 있다. ‘줍다’는 바닥에 떨어지거나 흩어져 있는 것을 집는다는 의미, 남이 분실한 것이나 버린 것을 지닌다는 의미, 이것저것 되는대로 취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단지 물리적으로 신체를 구부려서 아래쪽에 있는 것을 집어 올리는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거나 사지 않아도” 놓여진 것을 기꺼이 자기의 것으로 삼는 자세, 누군가 버린 것을 “남긴 것”으로 이해하는 자세, 남겨지거나 버려진 “잉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자세를 포괄한다.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신선한 통조림”은 내게 여전히 일용한 식량이 되며, “기분 좋은 말 몇 마디나 표정”은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따뜻한 위안이며, “이따금 인상적인 뒷모습이나 그림자”는 나를 위해 전시된 특별한 오브제가 된다. 이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사소함과 평범함 속에는 건져 올리기만 하면 나의 것이 되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이 가득하다. 물론 이러한 줍기의 과정에서조차 “다른 사람 몫을 조금 남겨두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할 만큼 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성숙하고 우아하다. 공짜라서 하찮게 취급하는 것도 오만한 것이지만 공짜라고 탐욕을 부리는 것도 천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삶에서 줍는 것은 남들의 눈에는 쓸모없는 잡동사니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쉽게 버려지고 미련 없이 남겨지며 아무 곳에서나 주울 수 있는 것들이 되어 뒹군다. 우리가 처음 떠올렸던 일상과 창조의 관계에 이 장면을 대입해보기로 한다.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온갖 흔하고 평범하고 익숙한 사물, 사람, 상황들은 이제 눈 밝은 시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잠재적인 작품으로 거듭날 것이다.
어둠이 바닥처럼 깊고
물너울 넘실거릴 때
빛을 갈망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한 이치
온통 닫혀 버린 벽이
눈앞을 막아선다 해도
밀고 나아갈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면
천길 바닥에 있을지라도
비로소
두터운 장막 활짝 열어젖히고
한 발짝
내디딜 힘 얻으리니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듯이
우리 모두 빛을 향해
언제든 온몸을 내던질
단 하나의 이유는
빛이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
― 박선욱, 「빛」 전문,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4월호
이 시는 빛과 어둠을 대비해 굴곡진 삶일지라도 희망을 찾아가기를 노래하고 있다. 본 작품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축인 어둠과 긍정적인 의미의 축인 빛은 바닥과 천장, 벽과 문, 막아섬과 나아감, 밤과 태양, 구속과 자유 등으로 변용되며 상반되는 대조의 계열을 이룬다. 다소 이분법적인 구도이긴 하지만 모든 물상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이 우리 삶이 지닌 양면성을 명징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상과 창조의 측면으로 되돌아가 볼 때 일상이 언제나 구차하고 번거로운 것이며 창조가 눈부시고 이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매 순간을 성스럽게 영위할 때 비로소 창조는 가능한 것이고 고대하던 창조의 순간이 개시될 때 일상의 고귀함은 복원된다. 그 둘은 서로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포함 관계인 것이다.
어떤 시는 잊지 못하는 한 시절을 고스란히 불러와 지금 여기에 재생시킨다. 한때는 생의 전부였던 어느 시간 어느 장소로 자신을 금세 데려다주는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내면의 표정을 마주하게 되고 그때 그 감정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된다.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했거나 잃어버렸던 진짜 자신을 불현듯 맞닥뜨리면서, 불편하고 낯선 기시감을 견디면서, 생경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말이다. 시공의 간극과 사고의 전후를 뒤죽박죽 섞고 흩트리면서 일상과 창조의 영역은 가능성의 최대치를 가늠해본다.
효율과 효용만을 좇는 세상에서 이제 시는 무용함과 무해함만을 자기의 것으로 갖게 된 것처럼 보인다. 가난조차 훔치는 부자들이 있듯 고독과 절망과 반전의 클라이막스마저도 스펙터클한 장르에 빼앗기고 시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공집합이 자신의 없음을 표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존재를 부상시키듯이 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박탈과 누락의 기호로서 스포트라이트와 박수가 없는 모서리에서 여전히 몰락의 자세 그대로 그렇게 홀로 있다.
시의 외형은 몸을 바꾸고 사라져 이제 시는 마침내 시 아닌 것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아졌고, 설계 구조나 작동 방식에 대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호함과 난해함으로 등장하며, 그러나 처음부터 이해를 구한 적 없다는 듯 무의미를 환기하는 무차별적인 운동성만을 지닌 채 움직여가는 장관을 보여준다. 시의 부정과 해체와 전위를 일컫는 것조차 불필요한 시도로 여겨질 만큼 시는 이제 일상의 모든 것 속으로 합류되었으며 바로 그 형체와 경계 없음 자체로 일상을 넘어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좌표와 고도를 활공하고 있다.
합리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은 황무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는 기제, 그래서 거의 마지막 지대로 남게 된 이 이상한 시의 생리는 잉여와 결핍으로, 부조화와 불균형으로, 무가치와 무력함으로, 또 어떤 예기치 못한 곳으로 자꾸만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 공백과 무위와 방향 없음의 방향이 결국 시를 시로 건재하게 할 것이다. 지겹고 비루한 일상성의 궤도를 공전하면서, 규범과 관습이 작동하는 트랙 바깥으로 벗어나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언어의 막다른 길을 결연하게 배회하고 태연하게 무효화하면서, 시는 계속해서 아무도 아무것도 중력이 될 수 없는 곳으로 탈주할 것이다.

신수진 I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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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