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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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진임 

 

 

 

 

음풍농월합시다

 

 

 

   

  뉘는 음풍농월이 시조의 특징이라고 한다. 고시조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에 바람과 달이 포함되어 있어 그러할 것이다. 바람을 노래하고 달을 유희하는 장르가 시조라고 설명한 것이다. 땀 흘려 일하고 현실과 대결하는 대신 한가하게 달이나 바람을 읊는 것을 비난하고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조는 일반 백성의 삶과는 유리된 것, 그리고 일부 양반들의 전유물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런 까닭에 시조는 현대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현대 사회에서는 시조의 존재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본다. 음풍농월이란 얼마나 시적인 것인가! 김훈 소설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어린 시절 피난지 부산에 화재가 자주 발생했는데 불을 피해 마을 뒷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소년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산 아래 불타는 동네를 보지 말고 밤하늘에 뜬 저 달을 보아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 발아래에서는 마을이 불타고 있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노라면 달은 훤하고도 무심한 듯 둥실 솟아 있었다니……. 김훈 소설가의 눈에 들었을 그 장면을 상상해 본다. 불타는 동네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달의 모습이 아프고도 아픈 시 그 자체다. 인간 삶의 모든 순간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비규환의 현실을 넘어서면 바로 초월의 순간이 기다린다. 고통 속에도 위로가 있고, 처절한 살육의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꽃이 핀다. 불타는 동네와 달의 이미지는 엘리아데가 이른 그 성(聖), 속(俗)을 선명하게 그려 보여주는 듯하다.

   시조가 지나간 시절의 안정적인 삶에서 탄생한 장르인 까닭에, 그리고 고정된 형식성을 요구하는 까닭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효용을 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인의 삶, 그 복잡다단함을 그려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주장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요즘처럼 바람과 달을 노래하는 것이 필요한 시절이 또 있을까? 자주 맑은 바람이 그립고 둥실 솟은 달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맑은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달빛을 벗 삼아 조용히 명상에 잠기고 싶은 날이 늘어난다. 무수한 삶의 소음들 속에서 쉽게 지치고 마음이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하이쿠는 그 철학적 배경에 선불교가 놓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조의 철학은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시조는 선비 정신을 그 철학적 기초로 삼는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유교 문명을 배경으로 거느린 채 사람답게 살아갈 방향을 찾고 있는 것이 시조 텍스트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연을 숭상하고 마음을 맑게 지니며 늘 공부하는 자세로 겸손하고도 조촐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시조 텍스트는 즐겨 보여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즐기면서 안빈낙도를 체화한 그런 삶을 멋으로 여기는 선비의 마음이 다양한 시조 텍스트들에 잘 투영되어 있다. 국화 피는 날에는 사랑에 술이 익고 그럴 때 먼 데 벗이 찾아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기쁨을 누리는 선비의 모습을 시조 텍스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삶의 소란으로 북적이는 현실을 떠나 비잔티움으로 배 저어가자고 노래한 적이 있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잉태하고 출산하고 사망하는 이 모든 삶의 북적거림을 떠나 지혜가 빛나는 동방으로 가자고 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도 「여행으로의 초대(L’invitation au voyage)」에서 영혼이 편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저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자고 노래했다. 삶을 영위하느라 엉겨 붙어 다투는 이곳의 현실을 떠나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곳으로 가 거기서 고운 사랑을 나누고 숭고하고 초월적인 것을 노래하고 예술을 즐기자고 노래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저 너머의 이상향으로, 오래된 동방의 도시로 노 저어 가는 대신에 이 땅의 자연 속으로 돌아가 그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그 자연에 스며드는 삶을 찬양했다. 선비는 먼 곳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세상에서 이상향을 찾았던 존재들이다. 학문을 숭상하는 마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에 바로 동방 도시보다 정결하고도 찬란한 왕국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 집이 白下山中 날 차즈리 뉘 이스리

   入我室者이 淸風이오 對我飮者이 明月이라

   庭畔에 鶴徘徊하니 긔 벗인가 하노라

    

   *

    

   나의 집이 백하산에 있으니 누가 날 찾아오겠는가

   나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청풍이오 나와 더불어 술 마시는 것은 밝은 달이라

   뜰가에 학이 배회하니 그것이 나의 벗인가 하노라.

ㅡ 尹淳

   

    

   조선 후기의 윤순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과 더불어 살면서 자기만의 이상향을 이 땅에 건설할 수 있음을 보여준 당시 선비들을 대표한다. 한반도 백하산 아래에 들어 청풍명월을 벗 삼아 살았던 것이다. 바람, 달, 그리고 가끔 찾아와 배회하는 학이 있어 그것으로 선비의 삶은 이루어진다고 노래한다. 그 간결하고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이 텍스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조년은 그 달이 배꽃 가지에 어리는 밤, 삼경에 마당을 거닐며 시심을 노래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일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못 이뤄 하노라

  

  

  꽃가지에 뻐꾸기까지 걸터앉은 모습을 언어의 화폭에 그려 넣으며 이조년은 선비의 어느 봄밤 풍경을 완성한다. ‘이화, 월백, 은한, 자규’……. 선비의 봄밤은 보들레르 시의 ‘화려함, 정숙함, 희열(Luxe, calme et volupté)’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두 텍스트는 전혀 다르면서도 또 어쩐지 닮아 있기도 하다. 모두 번잡하고 피곤한 이곳의 현실이 아닌, 그 대척점의 공간에서나 가능한 것들을 나열하기 때문이다.

  마음 상할 일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인심에다 세대 갈등에 성별 갈등까지 더하여지고 있다. 하루 하루의 삶을 전쟁처럼 다투며 살라고 부추기는 것이 우리 현실인 듯하다. 단단히 긴장하라는 신호는 여기저기서 날아드는데 그런 날, 그런 밤이면 오히려 달을 찾아 보아야겠다. 그럴수록 하늘에 뜬 달을 보면서 천천히 걸어 보아야겠다. 예이츠처럼 “flesh, fish and fowl”하고 f음의 반복을 노래하다가, “아이야, 누이야”하고 보들레르 시구를 외기도 하다가 “이화에 월백하고”를 외기도 해야겠다. 그러노라면 영혼이 우러러보는 저 달처럼 밝아질 것도 같다.

  혹은 박기섭 시인이 그려낸 우리 시대 뻐꾸기의 달을 생각해보아도 좋겠다. 찬밥 한 덩이를 구하여 우는 뻐꾸기의 달을 그려보면서 음풍농월의 새로운 방식도 함께 모색해 보아야겠다.

       

       

   외롭다면 은을 주고

   서럽다면 금을 주나

   은을 준들 뉘를 주고

   금을 준들 뉘를 주나

   금이야 은이야 말고

   한 끼 밥을 나를 다오

 

   금붙이 은붙이서껀

   울음 새경 받아놓고

   봄 하루 묵정밭을

   겨릿소로 갈아엎고

   묵은지 찬밥일망정

   허기 면하면 됐지

 

   밉기는 누가 밉노

   난 아무도 안 밉다

   섧기는 누가 섧노

   난 하나도 안 섧다

   저 혼자 밝은 저 달이

   그냥 섧고 미울 뿐

ㅡ 박기섭, 「뻐꾸기 울음 속의 찬밥 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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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임 |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평론집 『두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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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