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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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백인덕 

 

 

 

안팎의 춤

 

 

 

  1    

  영춘화(迎春化) 사진을 몇 장 봤다. 작년에도 그랬다, 전염병은 이제야 절정이라 하고 지루했던 방역 기간은 결국 지금의 절정으로 치닫기 위한 예비 과정으로 물러서고 만다. 내 몸은 생각보다 기저 질환이 많아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몸을 지키기 위해 가끔 마음이 상하는 것을 감수한다. 몸과 마음을 다 온전하게 보존(격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구도자의 면모가 좀 필요할 것 같아 짐짓 흉내 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내가 세상과 이토록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가, 새삼 되돌아보는 계기임은 틀림없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이가림 시인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전문이다. 1981년에 출간된 동명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한국 현대 시사에서 ‘유리창’의 계보에 대해서 혹은, ‘거울’과 ‘유리’의 은유를 정신 분석학을 빌려 분석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G. 바슐라르의 상상력 세계를 길게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작품을 ‘회상’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기억’은 우리의 실제 경험을 수정하고 유형화시켜 ‘완성된 경험’으로 재현한다. 또한, 기억된 사실은 항상 현재의 절박한 사정, 과거에 대한 공포, 미래의 희망 등에 의해 조정되고 재해석되어 소생되기 때문에 기억의 관계들은 비획일성(比劃一性)의 비약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알게 되었고 금세 암송하게 된 것은 1985년 봄 무렵이었다. 망설이다 가입한 문학 동아리의 방은 단 한순간도 햇볕이 들지 않는 음침한 그늘 속의 화장실 바로 옆이었다. 문학을 일종의 배설이라고 치부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 벽면에 커다란 칠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종종 회원들이 좋아하는 시가 적혀있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 한 달 가까이 적혀 있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지우고 바로 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를 정성껏 적어놓았다. 물론 무엇인가 두려워 일주일 정도 동아리 방을 찾아가지 못했다.

  왜, 그 기억이 현재화한 것일까? 어쩌면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과 “먼 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을 드디어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아니 내 현재의 절박한 사정이라는 게 비록 ‘유리창’이라도 경계의 저쪽을 투시할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라면 ‘모래알 같은 이름’과 ‘물방울 같은 이름’ 사이에서 더 방황해야 한다는 고지(告知)를 내가 간절히 염원하기 때문인가.

 

   

    2        

  고대 그리스에서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소크라테스(Socrates)지만 문헌상으로 가장 먼저 쓴 사람은 피타고라스(Pytagoras)다. 피타고라스는 본인의 직업을 ‘필로 소포스’(philosophos), 즉 ‘소피아’(sophia, 지혜)를 찾는 사람이라 했다. 그는 “누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열심히 뛰는 사람, 둘째, 뛰는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 셋째,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장사하는 사람. 즉 열심히 활동하는 삶, 구경하고 관찰하는 삶,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이 있다. 이 중 첫째, 둘째 내용을 ‘비타 악티바’(vita activa)와 ‘비타 컨템플라티바’(vita conpemplativa)로 구별 지을 수 있다. 비타 악티바는 분주하게 활동하는 삶, 비타 컨템플라티바는 관조하는 삶을 의미한다. 후자가 철학으로 발전하는데, 피타고라스 본인은 그다지 관조적 삶을 살지는 못한 것 같다. 요즘 말로 ‘페이크 뉴스(fake news)’에 홀린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었으니 말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죽음을 맞은 사람은 역시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의 죽음의 과정은 플라톤의 『변론』과 『크리톤』에 나타나 있다. 죽음의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아주 의연했다. 재판을 받을 때도 저자세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놀리기도 했으며, 여유 있게 약을 먹고 “자신들의 영혼을 잘 돌보게.”라는 유언을 하기도 했다. 초연한 태도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혼을 몸에서 풀어 주는 것, 코리스모스(korismos), 즉 분리를 말한다. 육신은 무덤인데 이 무덤에서 해방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의미로는 엘류테리아(eleuteria; 해방), 마지막으로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의 죽음이다. 소크라테스의 희망은 하데스(hades), 즉 죽은 사람들의 공간으로 가서 육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프시케(psyche), 즉 영혼이 갖고 있는 가장 탁월한 능력(noesis; 노에시스)을 가지고 참된 인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오감 때문에 알지 못하고 있던 순수지성을 가지고 참된 지성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인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고대 그리스식 이원론을 알지만 믿지 않는다. 가능성에 수긍할 수는 있지만 따르지는 않는다. ‘앎’이나 ‘참된 정의’가 꺾일 줄 모르는 이 전염병의 치세 아래서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예외 상태’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메시아는 더 이상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래할 뿐이며, 도착한 다음에야 비로소 도래하며, 또 최후의 심판의 날이 아니라 그야말로 최후의 마지막 날에 도래한다.”

 

  카프카의 「노트」에 적힌 내용이다. 영춘화 사진을 밀어내며 이제 곧 왕벚꽃 사진이 ‘봄’의 만개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얼음 방에 갇힌 사람들에게 유리창 너머 봄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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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I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 등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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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