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병철 | ||
|---|---|---|---|
완전한 평화, 완벽한 행복
포르투갈 수도인 리스본에서 남쪽으로 400킬로미터 가량 차로 달리면 라구스(Lagos)에 닿는다. 라구스는 포르투갈 남부에 위치한 휴양지로 남대서양을 끼고 있는데, 총천연색 바다와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뤄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이 보석 같은 해안도시에서 이틀을 보낸 적 있다. 코로나가 없던 2018년 12월, 열하루 동안 포르투갈과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라구스에도 들른 것이다.
라구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여행 자랑 좀 해야겠다. ‘세상의 끝’으로 잘 알려진 호카곶의 석양을 볼 땐 시간이 정말 멈춘 것만 같았다. 절벽까지 솟아오른 파도가 야생 백마가 되어 달려드는 아제나스 두 마르의 장관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포르투갈 중부 산악 지대의 옛 요새 마을인 몬산토에 가 중세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지붕들로 내려앉는 저녁 해에 마음을 내어 말렸다. 모로코 마라케시에서부터 만년설 쌓인 아틀라스 산맥을 지나 뙤약볕이 쏟아지는 사하라 사막을 낙타 타고 이동했다. 사막에서의 밤, 세계 각국의 친구들과 모닥불 피우고 술을 마셨다. 고개를 들면 사막 모래보다 더 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어둠보다 별이 더 많은 밤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별빛 아니 별비를 카메라로 담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여행은 삶에서 잃어버린 감동하는 능력, 감동하는 마음을 회복시켜준다. 익숙한 일상의 자리를 떠나 말도 음식도 풍경도 사람도 생경한 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될 때의 고립감은 영혼을 위축시킨다. 하지만 조금씩 그들과 동화되어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전의 ‘나’가 아니다. 여행의 모든 아름다움들이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낯설고 두렵던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이 비로소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됐을 때, 세상은 내게 전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 낚시도 마찬가지다. 낚시를 할 때면 지루한 일상에서 잃어버린 ‘경이’를 되찾는다. 늘 반복되는 업무, 풍경, 사람, 공간을 벗어나 자연과 만나면 모든 게 다 신기하다. 우리 삶은 너무 뻔하다. 일상이라는 것은 보통 예측이 가능하고, 우연함이나 미지의 영역이 없다. 그런데 낚시는, 저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계가 있는지 모르면서 강과 종일 마주보고, 바다와 대화하는 행위다. 그 대화를 통해 자연과 마침내 동화될 때, 낚시꾼은 더 지혜롭고 내면이 풍부한 사람으로 성숙된다.
불확실성과 우연성, 낯섦과 새로움은 낚시의 매력인 동시에 여행의 기쁨이기도 하다. 이국의 강과 바다에서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를 잡는 꿈! 낚시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볼 것이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배낭여행을 다니기 시작해 나름대로 ‘외국 물’ 좀 마셔봤지만 낚시를 해볼 생각은 못 했다. 그러다 2016년 2월, 노르웨이 베르겐의 한 갯바위에서 70센티미터 황금빛 대구를 낚았다. 여행 일정 중 단 하루 낚시를 했는데 행운이 따른 것이다. 한국에서 챙겨 온 보급형 쏘가리 낚싯대와 2000번 릴, 합사 0.8호에 1/4 지그헤드, 4인치 그럽웜을 사용해 캐스팅 게임으로 잡아낸 노르웨이 대구는 내게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줬다. 앞으로 외국 여행을 가면 꼭 그곳 현지에서 낚시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12월 초지만 남부대서양의 온화한 햇살 아래 라구스는 온통 따사로웠다. 사람들은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나는 오전엔 작은 보트를 타고 라구스 앞바다의 해안 동굴과 기암괴석을 탐사하는 보트 투어를 체험했다. 에메랄드빛 바다 표층을 떼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니 오후에 예정된 선상 낚시가 무척 기대돼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국에서 여행 계획을 짤 때 ‘트립어드바이저’를 이용해 라구스 현지 낚싯배들을 알아봤고, 그중 빅게임과 체험낚시를 주로 하는 ‘블루샤크호’를 예약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네 시간 동안 나만 태우고 출항하는 반나절 독배였다.
선장 루스와 그의 친구 마누엘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둘 다 70세의 노장들, 우리 셋은 영어를 못해 몇 개의 단어와 몸짓으로만 대화했다. 그러나 낚시꾼들에게는 낚시가 만국 공용어다. 금방 살가워져서 낚시 이야기로 침을 튀기는 사이 포인트에 도착했다. 카고대 비슷한 릴대에 골동품 수준인 구형 6000번 릴, 나일론줄에 무거운 봉돌을 달아 새우 미끼를 내리는 생미끼 낚시였다. 마누엘이 방법을 설명하고 시범을 보였다. 루스와 마누엘과 나는 나란히 서서 채비를 내리고 부지런히 고패질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질이 들어왔다. 레드 스내퍼, 화이트 브림, 옐로우 브림, 그루퍼 등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런데 마누엘 쪽을 슬쩍 보니 그는 봉돌에 에기 하나를 달아 새우 미끼와 함께 내리는 게 아닌가? 물어보니 대형 갑오징어가 종종 잡힌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에기를 하나 얻어 봉돌에 달았다. 그리고 얼마 후, 큰 입질을 받았다. 엄청난 당길심, 한참을 씨름한 끝에 갑판에 올린 녀석은 초대형 갑오징어였다. 그렇게 큰 갑오징어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그 녀석이 마누엘의 얼굴에 먹물을 뿜어 배는 한바탕 폭소의 도가니가 됐다.
대서양의 태양이 은은한 금빛으로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낚시를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왠지 뭉클해져서는 코를 훌쩍거렸다. 라구스 바다에서 낚시한 오후 반나절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임을, 다시 만날 수 없을 시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 선장 루스와 그의 친구 마누엘, 그리고 나 셋이 함께 블루샤크호 후미에 서서 낚싯대를 드리울 때, 선실에 틀어놓은 올드팝 라디오에선 마침 ‘We are the world’가 흘러나오고, 늦은 오후의 해거름은 대서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운 좋게 잡은 초대형 갑오징어가 마누엘의 얼굴에 먹물을 뿜던 순간, 루스와 나는 정말 웃다가 눈물을 흘릴 만큼 박장대소했는데, 그건 삶에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완전한 평화이자 완벽한 행복이었다. 천진하고 바보 같은 아이들처럼 "컴온 피시!" "피시, 피시!"를 외치며 낚시하던 우리는 저무는 해를 뒤로 한 채 항구로 돌아왔다.불과 네 시간이었지만 한 편의 긴 모험이 끝난 느낌이었다.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헤어질 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으니까. 그렇게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여행과 낚시의 가장 아름다운 본질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이병철 l
2014년 《시인수첩》 시, 《작가세계》 평론 등단. 시집 『오늘의 냄새』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평론집 『원룸 속의 시인들』, 산문집 『낚; 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사랑의 무늬들』이 있음.
■ 25년 경력의 낚시꾼으로 FTV, FSTV 등 낚시방송에 출연했으며, 월간 《낚시춘추》에 조행기를 연재하고 있다. 낚시 의류업체 잔카, 조구업체 아이마루베이트로부터 후원을 받는 프로스텝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2019년 러시아 아무르강 정글에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령한 물고기 타이멘을 낚기도 했다.
—
2022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