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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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염창권 

 

 

 

 

뉘앙스가 곧 주제다

— 6인의 『객』에 모여든 연애시조

   

 

 

 

   

나, 라는 

 

 존재는 실체일까, 환영일까. 둘 다 맞는 것 같다. 스스로를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관념과 지금 만져지는 내 몸에 주목할 때 실체인 것도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직경 0.1mm가량의 난자 세포질을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원소들을 생각할 때, 나에게 겹쳐 있는 환영을 떠올리게 된다.

   

— 어떻게 

젊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느덧 나는 은퇴 이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아르튀르 랭보의 시적 생애는 10대 후반의 5년 남짓에 불과하고 이상, 윤동주, 기형도 등의 시도 20대에 마감되었으니 젊은 날의 몇 년일지라도 인생의 총량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나는 등단하기 전에 동년배였던 기형도의 부음을 들었다. 그 나이,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불멸을 이루었다.

 다양성과 불확정성은 현시대의 화두이고, 또 젊음이 직면한 생활 현실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일단은 시조단에서 젊은 개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 그들을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붙여줄 논리적, 미학적 설명력이 부족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조단의 미래는 역량 있는 신인의 발굴에 있다고 생각했고, 혹이라도 평론의 자리가 있으면 신인의 작품을 우선하여 내놓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시조 작품 6편을 들고 막 등단했을 때가 1990년이다. 나는 그때 원로 시인들의 시·시조가 나와 다른 상상 세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다름의 발생 지점을 명확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동인지를 제외하고 잡지로는 《시조문학》에 「운주사(運舟寺)」라는 시조 작품을 딱 한 편 발표하고 90년대 후반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역전되었다. 나는 내 연령대를 벗어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으로 그들의 시를 이해하고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이때만이라도 그동안의 내 창작의 습관에서 벗어나, 그들의 생각 속으로 달아나야 하고 그들의 기분과 고민을 읽어내야 한다.

      

 — 혁신은

 자기를 버리는 데서 온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를 감해가는 데서 혁신의 둥력이 발아한다. 가람은 「시조는 혁신하자」고 했다. 거의 1세기 전 일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가람의 격조와 조윤제의 자수율을 넘어선 곳에 있다. 마크 쇼러(Mark Schorer)는 「발견으로서의 기법(「Technique as Discovery」, 1947)」에서 “문체는 곧 주제다”라고 말한다. 이를 밀란 쿤데라에 연결해서 읽으면,

 

   시에 있어서 보들레르, 그러니까 천하의 보들레르가 전후의 무수한 시인과 똑같은 소네트 형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까 바로 그러한 것이 시의 기법이다. 시의 독창성은 상상력에 의해 발현되지 전체의 건축술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구성은 그 자체로 한 작가가 표방하는 스타일의 독창성을 보여준다.(『커튼』, 민음사, 2017, 221-222)

 

 시인을 거쳐 소설가가 된 쿤데라는 시와 소설을 차이를 설명하면서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여기서 서정적 시기란 “한 개인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이해하지도 판단하지도 못한 미성숙의 시기이다.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커튼』, 123)

 물론 위의 논변은 시 갈래의 특성 중에서 ‘서정적 상태’라는 특수한 국면을 강조한 데서 비롯된다. 극(drama)에서는 한 등장인물의 자기중심적 발화와 다른 등장인물의 자기중심적 발화간의 교차에 의해 스토리가 전개된다. 소설(fiction)에서는 한 세계에 소속된 개체들의 대화적 관계가 단성 혹은 다성적 내레이터에 의해 매개된다.

쇼러가 말하고 분석한 기법이란 용어는 현대언어학의 담론(discourse)이란 용어와 개념적으로 상호 교차 된다. 여기서 시조는 규칙이 정해진 정형시이니 담론의 틀이 주어진 상태이다. 그래서 형식이나 건축술을 새로 주문할 필요도 없이 정해진 틀 안에 상상력만 채워 넣으면 된다. 그렇게 하여 미성숙한 자기중심적 발화라는 평가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시조가 정해진 발화 틀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가람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다시 쿤데라의 마지막 페이지로 돌아가서,

 

  나는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혀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예술이 절대로 말해진 적이 없는 것 찾기를 그만두고 다시 유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예술은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개인이 기쁜 마음으로 순순히 획일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기를 요구하는 집단의 삶에 봉사할 테지(『커튼』, 244).

 

유순한 예술이란 집단에 종속되어 개체인 자기(예술가)를 잃어버린 형태의 예술이다. 전체주의 국가, 근본주의 종교 국가에서나 이러한 형태의 예술이 가능할 것이다.

관성적으로 수행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은 젊은 예술의 본질이다. 위험을 무릅쓰는 데서 혁신의 기초는 세워진다.

 

   이봐.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더듬거리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네 그려. 이렇게 캄캄해서야.

   이젠 아주 글렀네. 무서워서 한 발자국인들 내놓을 수 있겠는가?

   이봐.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 이상, 「누가 좀 불을 켜 주게나」 전문

 

당대에 이상의 시만큼 논란을 가져왔던 경우는 드물 것이다. 시인의 수가 얼마 안 되던 시절이니 가능했을 것이다. 동시대의 유럽에서 다다이즘을 거쳐 초현실주의 기법이 득세하고 있을 때, 경성의 지식인이었던 20대의 그는 난해성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시는 그의 작품 중에서 유다른 사례인데 21세기 우리 젊은 시조시인들의 생활사에 대입해도 고루한 느낌이 없이 소통될 수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AI시대 이후로 더욱 두각을 나타내리라 본다. 그 까닭은 시의 현대적 감수성에서 찾아야 하리라.

     

이쯤에서  

   

 늦었지만 6인의 『객』(제3집, 2024)에 모여든 12편의 연애시조를 읽어보기로 한다. 사회적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결혼 적령기가 20대에서 30대로 지연되었다. — OECD 학력 수준 1위 국가, 대학에서는 이를 교묘히 응용하여 학부에서 줄어든 수입을 대학원생 증원을 통해 메우려고 한다. 이를테면 스펙이다. — 내가 추측하는 바로 ‘객’들 중 다수가 미혼이거나 연애 중일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연애 감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시조단의 독자는 나이 든 중년이나 노년기가 대다수이니 누가 이들의 감수성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며 그들의 언술에 집중하여 감동을 찾을까?

다음 작품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빨긋한 입술은

   폐를 태우는 황홀경

 

   꽁초까지 태운 만큼

   맞닿은 살결조차

 

   ‘우리’란 곽이 빌 때는

   연기 냄새만 남는걸

 

   즈려밟는 네 한숨은

   잿가루처럼

   어둡다

 

   새 포장을 뜯는 기분은

   한 대 빼물 쯤 날아가도

 

   그 모두 연료로 삼아

   태워내는 이 불씨

- 이중원, 「사랑 한 개비」 전문

 

 우리 삶의 성취에서 무엇이 중요한 기준이 되는가? 재산, 명예, 사랑, 또는 건강인가? 분명하지 않다. 규정할 수 없는 이 불분명함은 개인차, 세대차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성장 과정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위의 시에 나타난 시적 화자의 태도에 주목해 본다. 여기서 서정적 상태로서의 ‘나’는 보이지만 ‘너’라는 타자는 익명의 타자이다. 여기서 필자가 느끼는 건 ‘너’에 대한 관심이 큰 것에 비해 너에 대한 신뢰감보다도 ‘나’ 자신의 현존이 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너’는 비어가는 대상이며 결과적으로 ‘재’로 남게 되는 일시적인 존재이다. 그렇지만 “즈려밟는 네 한숨”을 통해 현존의, 사랑의, 일시적 그리고 미래 없음을 인정한다. 사랑의 감각적이며 소모적인, 그리고 자해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포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문체와 뉘앙스

 한자어 문체(文體)는 文[글]의 體[형태]로 “글의 형식적 체계나 표현의 형태”를 뜻한다. 영어로 문체(style)는 라틴어 stilus(글을 새기던 쇠붙이, 필기구) 즉, 글을 쓰는 도구”를 의미했으나, 이후 “글을 쓰는 방식, 표현의 특성”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마크 쇼러는 제임스 조이스와 H. 로렌스의 소설에 나타난 기법적 특징을 통해 문체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는 “기법은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고 했다.

 12편의 연애시조에서, 김태경의 사설시조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는 평시조와 연시조이다. 즉 모두가 현대시조의 형식에 충실하다. 추가적 요소로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혼재된 상태이다. 기법적 동일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제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글에서는 그들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각적 표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때 뉘앙스(nuanc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의미나 느낌의 결을 지칭할 수 있다. 뉘앙스는 정동(affect)의 경사면 혹은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 말은 시론에서 언급하는 태도나 어조, 분위기(mood) 등의 경사면에 빗긴 그늘 같은 것, 즉 뉘앙스(shade of meaning/feeling)다. 불일치 혹은 불화는 흔히 이 뉘앙스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텍스트가 소유한 내밀한 인격 같은 것이라 하겠다. 앞의 시 「사랑 한 개비」에는 가볍게 소모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사랑 끝에는 남는 게 없다. 기실 그와 같은 가치평가는 “네 한숨”의 빛깔에서 예정되어 있다. 또는 허구적 자아의 설계일 수도 있다. ‘발악’하듯 사랑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곽”은 비워질 것이고, 새 포장을 부담 없이 뜯을 만큼 넉넉하거나 기회가 많지도 않다.

 뉘앙스는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흐릿한 경계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며, 그 흐릿한 경계나 그림자를 통해 (텍스트에) 함축된 기분을 드러낸다.”라고 하면 필자가 내린 세부 정의가 된다.

 

   그릇에 담길 때면

   서로를 껴안지만

 

   어쩌다 엎질러져서

   바닥에 쏟아지면

 

   잽싸게

   등을 돌린다

   돌아갈 수 없도록

- 서희, 「물」 전문

 

 이 시에서는 단 한 번의 “쏟아”짐, 실수만으로 관계는 파산된다. 바닥에 닿는 굴욕은 단 한 번만으로 족하다. 그릇에 “담겨진” 물을 다루는 것은 위험하며 조심성을 감내하는 일이다. 한 번의 실수는 차후에 반복되기 쉽다. ‘담겨지는’ 수동성의 이면에 날카로운 각성의 순간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이 시의 기분이다. 뉘앙스를 텍스트에 함축된 기분이라 할 때, 주제는 선언적인 명제로 요약되기 어렵다. 텍스트 자체에서 발생하는 기분 그 자체가 뉘앙스이자 주제이다.

 

   동전을 잃어버린 골목길에 서서

   생수를 가져 오는 그대를 기다린다

   점등된 마음속에서 누르는 빨간 버튼

 

   목마른 심장지부 우체부가 송부해요

   갈증을 빼곡 채운 답신의 동전들이

   1초 뒤 당신 마음을 노크하는 순간에

- 김샴, 「러브레터」 전문

 

 이 시는 다소 느긋한 태도로 “러브레터”의 낭만적 기질을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전”을 매개로 한 ‘주고받음’의 교환 가치에 의존한다. 축어적으로, 시적 화자의 눈앞에 생수를 파는 자판기가 있다. 동전을 넣고 생수를 뽑아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것은 생리적인 일상이다. 그런데 제목으로 내세운 “러브레터”라는 맥락이 개입되면서, 사랑과 관련된 의미의 층위를 따로 만든다. 이로써 사랑과 갈증 해소는 은유적 등가관계가 된다. 즉, 사랑은 거래되는 것이다. “목마른 심장지부 우체부가 송부”하는 러브레터는 갈증을 채워줄 생수이다. “동전”이 있는 타자인 “당신”은 이 자판기에서 생수를 꺼낼 수 있다.

 첫째 수에서 시적 화자는 동전을 잃고 그대를 기다리며 골목길에 서 있다. 그대가 생수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로 “점등된” 채 “빨간 버튼”을 눌렀으니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시의 어조는 다정하고 정감적이다. 반면에 시적 상황은 일방적인 기다림의 상태이다. 기실 그대라는 대상과 사랑 자체는 동전을 잃고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에 순종하는 것, 그와 같은 기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 기분(氣分)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로는 atmosphere, ambience, mood 등이 있다. 모두 ‘분위기’와 유사한 의미역을 갖는 단어들로 뉘앙스와는 개념 차가 있다. 따라서 ‘뉘앙스’의 개념을 ‘기분’이라는 단어에 대응시키고자 할 때, 기분의 내부에 함축된 색채나 결, 민감도, 지속성 등과 같은 정동의 지속적인 면과 심층적 상태에서 오는 감각적 느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태경의 「무례한」과 「무뢰한」은 상호텍스트성을 갖는다. 이들 시에 나타나는 사랑의 형태를 제목에 대응시키면 “무례한” 폭주이고 “무뢰한”의 독주이다. 이는 타자 희생을 요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형태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뜨거운 도로 위를 오토바이 질주해서

 

   너로 인해 잠 설치는 무리한 마음 같아서

 

   변주된 어제 속에서

 

   계속해서

 

   독주해서

- 김태경, 「무례한」 전문

 

 그런데 대상에 대한 시적 화자의 태도는 뜻밖에 적대적이지 않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너로 인해” 잠을 설치는 것은 나이고, 그것은 어제가 반복, 변주된 오늘의 연속이다. 사랑의 일방성은 소음이 심한 오토바이의 폭주와도 같다. 너는, 나와 무관한 마음의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너로 인해 “무리한” 심적 상태에 처한다.

 그렇다면 “뜨거운 도로 위를 오토바이 질주해서” , “무리한 마음 같아서”의 반복 구문에 함축된 주체는 누구인가. “질주”는 네가 보인 행동일 수도 있고 나의 마음을 은유한 것일 수도 있다.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너와 나의 관계는 반복되는 “무례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어쩌겠다, 와 같은 가치평가는 없다. 그의 다른 시에서

 

   내리는지 내려치는지 / 무례하고 무리하게 //

   …… 마음과 마음이 부딪친 채 함께 울지 눈먼 눈물 닦아주는 하얀 손을 꼬옥 잡지 부여잡아도 마음은 폭주를 멈추지 않지 //

   가는지 떠밀려가는지 / 폭우도 한때라서

- 김태경, 「무뢰한」 부분

 

와 같이 “무뢰한”은 너와 나의 양자에 걸쳐 있다. 폭주와 폭우 속에 잠을 못 이루는 신경증적인 사랑은 긍정되는 것도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눈먼 눈물 닦아주는” 맹목성에 대한 동정, 그리고 “네 아픔”에 대한 수긍이 가치평가의 흔적이다. 그리고 끝에서 “가는지 떠밀려가는지”와 같이 사랑에 관한 한 ‘무뢰한’임을 인정한다. 다만, “한때라서”에서 보듯 영속성은 부정된다.

 김상규의 다음 시는 불온하다. 이 시는 너를 향해 폭주하는 나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네가 무엇을 하든 난 너와 함께 있어

   바람난 애인을 신나게 저주할 때도

   찌질한 대학 동기를 사랑한다 고백할 때도

   물론 이럴 때도 널 떠나진 않을 거야

   마약상을 쫓아다닌 불순한 숙녀였어도

   매일 밤 고양일 죽인 초췌한 마녀였어도

 

   사랑에 익숙해야 사랑을 기다리는 법

   나 역시 그랬거든, 경험들은 단순하지

   하나가 어렵지 않게 둘을 부른 것처럼

   너에게 해줄 말이 너무나도 많아서

   언제나 너의 곁엔 내가 있음이 분명해

   누구나 아는 것들은 말하기 곤란하니까

 

   혹한에 지쳐버린 메마른 암늑대처럼

   두렵지만 신비로운 성년식을 시작할까?

   이별을 직감해야 했던 탯줄 속 입맞춤까지

- 김상규, 「언니의 연애」 전문(*밑줄 필자)

 

 “네가 무엇을 하든 난 너와 함께 있어”와 같은 두괄식 의미 구성은, 시조 3장의 순차적 의미 전개를 역전시킨 것이다. 초장에서 의미 선언을 하고, 중·종장에서 뒷받침하는 형식이다. 단숨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나의 감정은 ‘너’라는 대상을 향해 폭주해 간다. 나는 너에게 (두괄식의) 설득적인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불온하나 익숙해 가는 여성적 사랑의 방식이다. 여기서 너는 함축되어 보이지 않으나 내포독자를 추론하면 대학생 나이 정도의 아직 성장통을 겪고 있거나 아예 타락했을 수도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숙녀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의 숙녀가 아니라 그와 같은 상태로서의 무차별적인 너이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관대하고, 수용적이며, 성장통을 겪어낸 뒤로 알아야 할 것은 알 만큼 안다. 그런데 제목에서 “언니”라니…. 여기서 의미는 역전된다. “하나가 어렵지 않게 둘을 부른 것처럼” 반복되는 경험들, 1연에서 열거한 불온한 행위들, 그와 유사한 온갖 것들을 미리 알아차리고 경험해 온 언니가 아닌가. 그런 언니는 너라는 숙녀의 탈을 뒤집어쓴 ‘현재의 나’와 다름없다. “두렵지만 신비로운 성년식을 시작할까? / 이별을 직감해야 했던 탯줄 속 입맞춤까지”는 또 한 번의 불온성에 대한 도전이자 너라는 숙녀를 거듭 살아내는 일이다. 혹은 내가 모르는 ‘너’들이 직면해야 할 필연일 수도 있다. “네가 무엇을 하든 난 너와 함께 있어”와 같은 서두의 선언이 다시금 전체 의미를 강박한다. 아름답지만 불길한 숙녀야, 너는 결국 나와 다름없는 길을 따를 것이다. 이때의 뉘앙스가 이 시의 주제다. 이 뉘앙스가 표면적인 의미, 주제를 전복시킨다.

 인용 시에서 필자가 (무례하게) 밑줄 그은 시어들은 이 시의 활달한 율격 실현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 또한 구문 구조의 반복에서 오는 율동감이 추가되면서 랩의 가락에 얹어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외재적 율동감을 확보한다. 다만, 해당 시어들은 의미 생산 면에서는 기여도가 높지 않은 장식적인 요소에 그친다. 밑줄 그은 부분을 빼고 읽어도 의미 전개에는 지장이 없으나, 시조의 정형 규칙을 고려할 때 삭제는 불가하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 시조를 창작할 때 음보율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형어나 부사어 등의 수식어를 가감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시조를 쓰는 시인 누구나 겪게 되는 곤란일 것이다.

    

 — 위장된

 무표정이나 감정은 ‘무관심의 관심’을 드러낸다. 내 존재가 온통 ‘너’에게 기울어져 있음은 포즈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너를 향해 긴장해 있으니, 주시하는 눈길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소개한 시조 작품들은 ‘나-너’의 관계에서 너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 없는 ‘너’는 안 보이는 그곳에 머무르는 ‘그/그녀’이다. 관계 항에서 한쪽이 텅 빈 상태인 셈이다. 그런 ‘너’를 상상하는 포즈는 쿨하면서 시니컬하다. 이때의 포즈가 뉘앙스이다.

 

이에 비해, 서희의 「한 사람」과 이나영의 「꽃의 소원」은 ‘나-너’의 관계 영역에 ‘너’가 속해 있다. 나의 시야에 들어온 너를 통해서만, 역으로 주시의 시선을 가져간 너를 통해서만, 너의 ‘나’가 말하는 나는 ‘너’라는 근원어(根源語)에 닿을 수 있다.

 

   짧고 강렬하게 너는 날 비추이며

   ……

   시린 손바닥에 꽃송이가 피어난다

- 서희, 「한 사람」 부분

 

 너의 관심과 부름으로써만 나는 피어날 수 있다. 오래 기다렸던 것은, 날 찾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또 망설이다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머니에 내 이름 숨긴 뒤로

   손길과 입김으로 길러낸 동백꽃이

 

   손바닥 한가득 피어

   유음으로 흘러가요

 

   우리의 눈꺼풀에 불시착한 밀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나비가 된 동안

 

   애칭을 불러주세요

   한 잎 한 잎 기억하도록

 

   꽃잎을 떼어내어 입 속에 머금으면

   당신이 스며들까 우리가 완성될까

 

   온몸을 휘감을 거예요

   당신으로 차오르도록

- 이나영, 「꽃의 소원」 전문

 

  주시하는 시선은 곧바로 ‘너’가 온 것을 알아차린다. 그 순간 이미 너는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당신이 주머니에 내 이름 숨긴 뒤로” 너는 나를 살고, 나는 너를 살게 된다. 그러면서 욕망의 밀도는 점차 높아진다. “애칭”으로 불러 “한 잎 한 잎 기억”할 수 있도록, 더구나 “당신으로 차오르도록”과 같이 완전성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기대는 무산되기 쉽겠지만, 첫 만남에 오는 짜릿한 황홀감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충족적인 경험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나-너’의 근원적 관계는 ‘너’에게 속해 있는 상태로서의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감(感)은 

   

  의미나 느낌의 미묘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뉘앙스도 이와 유사하나 맥락적으로 사용되면서 의미를 강화하거나 반의적인 의미를 발생시킨다. 감(感)은 이 시대 청년들의 정신적 피톨 같은 것이다. 감으로 소통하고 헤어진다. 그 빗긴 면에 날카로운 뉘앙스가 스며있다. “뉘앙스가 곧 주제다”라고 했을 때, 이는 앞에서 언급한 마크 쇼러의 명제를 오마주(hommage)한 것이다. 현대예술은 기법에 스며있는 자질로서의 세미한 결(texture)을 중시한다. 그 감정, 감각적인 결을 형식 미학의 측면에서 뉘앙스라 할 수 있다.

  발랄함과 신선함은 젊음의 특권이다. 발랄한 생기는 그 자체로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다. 이는 형식적 미숙함이 아니므로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가치평가를 요구받는다. 뭇 시인들이 동경하는 반고흐의 회화는 바로크나 로코코, 낭만주의 미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반고흐의 회화는 그만의 특별한 평가 및 해석 방법을 요구한다.

   2030세대가 읽을 만한 시조를 찾다가 ‘객’ 동인들의 연애시조에 꽂혔다. 젊은 시인들의 시조가 갖는 가능성과 장점을 찾고 이에 관한 평이나 발화가 풍부해질 때, 비로소 시조가 MZ세대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모인 ‘객’들의 시조도 조금은 나이가 들었을 수도 있다. 창작에서 젊은 감(感)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끝으로, 이 글을 쓰게 해준 ‘객’ 동인들에게 감사드린다.

 

 

 

 

 

 

 

 

 

 

 


 

염창권.jpg

염창권  l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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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VOL.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