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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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진임 

 

 

 

 

‘동음이의어’와 시

 

 

 

   

  모든 나라에는 나름대로의 ‘말놀이’가 있다. 비슷한 음가를 지닌 말들로 즐기는 ‘혀 돌리기(tongue twister)’놀이를 모든 나라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말의 “우리 고모 고무신은 검정 고무 고무신”처럼 말이다. 영어의 “Peter Piper picked a pack of pickled pepper”, 프랑스어의 “Si ton tonton tond tonton, ton tondon sera tondu par ton tonton”도 그런 말놀이 중의 하나이다. 모든 말들은 고유의 소리를 지니고 서로 다른 의미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말들의 소리를 뚜렷이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더러 있고 그런 말들을 이리저리 연결하며 말의 유희(jeu de mot)를 즐길 수 있다. 유사한 음가를 지닌 말들 사이를 누비어 가노라면 말의 유희를 통하여 새로이 빚어지는 세상을 볼 수도 있다.

  정확하고 명료한 말들로만 발화하더라도 타자와의 소통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말과 말, 즉 낱낱의 시니피앙(significant)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즉 시니피에(signifie)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릴 때 새로이 형성되는 의미의 공간이 있다. 말이 지니는 내포의 범위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면서 의미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런 말들을 통하여 우리 삶이 더욱 다채로워지는 듯도 하다. 옛시조에서 ‘님’과 ‘자네’라는 낱말을 근접 사용함으로써 말의 유희를 보여주는 텍스트를 찾아볼 수 있다. 저자 미상의 그 고시조 텍스트를 보자

 

    

   옥갓튼 님을 일코 임과 갓까 자네를 보니

   자네 긘자 긔 자네런지 아모긘줄 몰내라

   자네 긔나 긔 자네나 중에 자고나 갈가 하노라1)

  

 

   

  이해하기 쉽게 요즘 쓰는 한국어로 고쳐 써본다.

 

   

 

   옥과 같은 님을 잃고 님과 같은 자네를 보니

   자네가 그인지 그가 자네인지 아무개인줄 몰라라

   자네가 그든 그가 자네이든 간에 자고나 갈까 하노라.

   

  

  독자가 텍스트를 통하여 얻게 되는 전언은 다음과 같다. "옥같이 고운 님을 잃었다. 그 님과 유사한 대상, ‘자네’를 보았다. 님과 자네를 구별하기 어렵다. 님과 자네를 구별하기 어려우니 (자네를 님이라 여기고) 자고 갈까 한다." 시적 화자는 짓궂지만 딱히 밉지는 않은 희롱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네와 님의 구별이 어려운데 굳이 구별하려 들 필요가 있겠느냐, 자네를 님인 양 여기며 님 대하듯 자네를 대하면 자네가 곧 님이 되는 것 아니냐고 이른다. 님, 님, 자네, 자네, 그, 그, 자네, 자네, 그, 그, 자네, 자고나……. 어휘의 반복적 나열 과정에서 변별의 표지들을 슬그머니 감추거나 지워버리며 청자의 혼란을 유도한다. 말과 말 사이에 거리가 있어 차이와 구별이 가능한 것이지만 더러 말과 말의 연결을 계속하다 보면 이처럼 그 거리가 사라지거나 좁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의 유희가 잘 드러난다.

  동일한 음가를 지녔으면서도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의미를 동시에 지닌 말들도 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음절이 구성되며 음절이 모여 낱말, 즉 단어를 이루는데 그렇게 구성된 말들이 서로 동일한 외형을 지니면서도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음이의어가 탄생한다. 동음이의어는 언어 세계에서의 일란성 쌍둥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동음이의어가 지니는 의미의 이중성을 생각해보면 동음이의어는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시적 언어의 자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텍스트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종종 텍스트에 동원된 어휘들이 명료하고도 단순한 의미로 바로 해석되기 어려울 때이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말들, 즉 의미의 중첩성 혹은 모호성을 지닌 언어로 시가 구성되었을 때 텍스트는 한결 미묘해진다. 시적 텍스트는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들을 동시에 머금고 있다가 만화경(Kaleidoscope)을 통해 한꺼번에 그 빛을 드러내 보이는 그런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동음이의어는 계속 다른 모양으로 빛을 드러내는 만화경의 구실을 한다. 동음이의어를 동원하면 의미의 정체를 바꾸어가며 독자의 애를 태우기에 충분한 텍스트가 형성된다.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 같은.

  그처럼 동음이의어는 말의 유희를 통해 삶을 가볍고 즐겁게 만든다. 그러나 동음이의어의 활용이 반드시 유희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희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그 말이 지니는 의미의 복합성을 통하여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계 캐나다 시인, 에밀리 정민 윤(Emily Jung-min Yoon)의 시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윤 시인이 한국어의 동음이의어를 질료로 삼아 그것으로 트라우마를 재현한 바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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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한유주 소설가 번역본이다. 그런데 한국어로 바꾸었을 때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듯한데 영어로 된 원전은 텍스트의 형식 자체가 배를 상징하고 있다. 텍스트 자체가 시적 소재와 주제를 직접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페이지를 펼치면 한눈에 드는 텍스트의 모양이 배의 형상인 것이다. 시구의 배치에 있어서 적절한 공간을 시구 앞에 두어 텍스트 자체가 한 척의 배 모양을 이루게 만든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시도했던 바와 같은 형식적 특징을 윤의 텍스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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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윤의 시는 하나의 동음이의어를 통하여 거대한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다시 또 하나의 동음이의어를 들이대며 그 트라우마의 극복을 시도한다. 배와 사과라는 우리말의 명사들, 그 중 배는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구현하는 말이다. 과일 중의 하나인 배이면서 신체의 배이면서 또한 탈 것으로서의 배. 그리고 사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사과는 과일의 이름이면서도 동시에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두 단어가 새로운 의미로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오게 만든다. 우리에게 몹시도 친숙한 명사들이 갑자기 천 리 밖 만 리 밖으로 달려 나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희생 제물이 되기를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번역한 뒤에는 그처럼 미묘한 시의 향기는 거의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다. “나는 배의 심에 대고 말해, 움푹 파인 뱃속 씨앗들에게”라는 번역본 구절을 다시 보자. 한국어로만 읽으면 배의 세 가지 의미와 사과의 두 가지 의미가 서로 얽히며 전개되는 미묘함이 증발해버린다. “배(pear)의 한 가운데(core), 가라앉은 배(belly)의 씨앗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로 다시 바꾸어보아도 그다지 나아지는 바가 없다. 과일 배의 씨앗에게 사과하다, 사람의 뱃 속에 든 씨앗에게 사과하다, 그리고 가라앉는 세월호라는 배의 한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상들에게 사과하다……. 시인은 세 가지를 겹쳐 놓으면서도 그중 어느 것 한 가지로 의미를 고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말 사과와 배가 지닌 의미들이 각자 다른 목소리로 발화하면서 그것들이 어울려 합창하게 만든다.

  ‘말로써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묻는다. 이 거역 불가의 거대한 현실의 위력 앞에서 말의 본질을 궁리하고 말의 쓸모를 생각하며 말로써 한 편 시를 빚는 시인이 도대체 말로써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본다. 그 질문은 거꾸로 물어도 같은 질문이 된다. 앞선 질문의 대척점에서 다시 제기하는 그 질문은 성격이 묘해진다. 그것은 의문의 의미와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말로써 무엇을 할 수 없을까?’ 도대체 말로써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더러 사실은 없어지고 서술만 남게 되기도 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는가에 따라 사실의 진실성이 결정된다. 일어났던 일은 시간 속에서 사라질 운명을 지닌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말이 더욱 중요한 것이 된다. 말로써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고 말로써 물에 뛰어드는 사람을 멈추게 할 수 있다. 한마디 독한 말이 누군가를 살리고 한마디 따뜻한 말이 누군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말 중에서도 동음이의어는 위험하고도 절묘한, 대단한 힘을 지닌 말이다. 카멜레온처럼 정체를 바꿀 수 있는 말이라서 한꺼번에 정반대되는 일들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듯하다. 배의 한 가운데에 남아 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에게, 마치도 사과의 씨처럼 오롯이 남겨진 그 영혼들에게 시인은 사과를 보낸다. 배 한 알을 놓고 한 척의 배와 그 배의 뱃속에서 물에 잠겨버린 어린 영혼들을 생각한다. 사과 한 알을 그들에게 보내면서 사과를 한다.

  시조단의 문무학 시인은 시조 텍스트를 통하여 동음이의어의 시학을 새로이 구성하는 중이다. 카멜레온 같은 말들을 찾아내고 그 본질을 궁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홑음절 말들의 정체에 먼저 주목한다.

   

  

   빗길에

   비질해 뭣해

   빗나가고 말텐데

   ㅡ 문무학, 「빗」4)

   

  

  시집에는 영어 번역본도 포함되어 있으나 번역은 배반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라 번역된 텍스트는 출발 텍스트의 주제와 재치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게 마련이다. 한국어의 ‘비’와 ‘비’와 ‘빗나가다’라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음가의 말들이 생성해내는 묘미, 혹은 기미를 영어의 rain과 broom과 go astray는 눈치챌 길이 없다. 영어와 프랑스어 사이, 한국어와 일본어 사의의 번역에서는 말들이 서로에게 쉽게 다가가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어와 영어에서는 말들은 서로를 참 낯설어한다. 비, 빗길, 비질, 빗나가다……. 말과 말이 어깨동무한 채 텍스트에서 나란히 나아간다. 비는 기후 현상의 비이면서 동시에 청소도구인 비이기도 하다. 그 ';비' 음절의 연장선상에 '빗나가다'라는 말을 배치하면서 문무학 시인은 동음이의어와 함께 유사한 음가의 말들까지 하나로 정렬해본다. 그러면서 말들이 만나 이루는 절묘한 교향악을 시라는 이름의 악보에 받아쓴다.

  동음이의어는 이미 시어의 성격을 지니고 태어났음에 틀림 없다. 동음이의어를 더욱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우리 시의 영토가 넓어지기를 기대해본다.

 

 

 

                                 

  1) 김천택 편, 홍문표 강중탁 역주, 『청구영언』, (명지대학교 출판부, 1995) 680면.

  2) 에밀리 정민 윤, 한유주 역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열림원, 2018) 104~5면.

  3) Ibid, 222~3면.

  4) 문무학 『홑』(학이사, 2016) 2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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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임 |

2004년 《문학사상》 등단. 연구서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 『Narratives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평론집 『두겹의 언어』 『세이렌의 항해』 등이 있음.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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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호